2016.07.28 22:43
내일 서울에 놀러가는데 지하철을 한참 타야될 것 같아서 핸드폰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을 찾다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생의 명시 100선>이라는 책을 전자도서관에서 다운받았어요.
그런데 이건 뭐 다 처음 보는 시네요. ^^ (제가 한국인이 아니거나 제목이 뻥이거나 ^^)
이 시들을 정말 한국인이 좋아하는지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재미있는 시가 몇 편 나와서 옮겨 봅니다.
취하라
샤를 보들레르
늘 취해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것만이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하는
시간의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노상 취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당신 뜻대로
다만 취하기만 하라.
그러다가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나
당신 방의 음침한 고독 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취기가 이미 덜하거나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파도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달아나는 모든 것에게,
울부짖는 모든 것에게,
굴러가는 모든 것에게,
노래하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몇 시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파도가,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하리라.
"취할 시간이다!"
시간에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노상 취해 있으라!
술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당신 뜻대로.
(앞으로 누가 몇 시냐고 물어보면 "취할 시간이다!!!"라고 대답해 줘야겠어요. ^^
술자리에서 이 시 한번 읊어주면 술맛 제대로 나겠는데요. ^^)
고양이와 새
자크 프레베르
온 마을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상처 입은 새의 노래를 듣네
마을에 한 마리뿐인 새
마을에 한 마리뿐인 고양이
고양이가 새를 반이나 먹어치워 버렸다네
새는 노래를 그치고
고양이는 가르랑거리지도
콧등을 핥지도 않는다네
마을 사람들은 새에게
훌륭한 장례식을 치러주고
고양이도 초대받아
지푸라기 작은 관 뒤를 따라가네
죽은 새가 누워있는 관을 멘
작은 소녀는 눈물을 그칠 줄을 모르네
고양이가 소녀에게 말했네
이런 일로 네가 그토록 가슴 아플 줄 알았다면
새를 통째로 다 먹어치워 버릴 걸
그런 다음 얘기해 줄 걸
새가 훨훨 날아가는 걸 봤다고
세상 끝까지 훨훨 날아가더라고
너무도 먼 곳으로 가버려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러면 네 슬픔도 덜어줄 수 있었을 걸
그저 섭섭하고 아쉽기만 했을 걸
어떤 일이든 반쪽만 하다
그만두면 안된다니깐
(정녕 이런 엽기적이고 잔혹한 시를 한국인이 좋아한단 말입니까.... orz)
술 노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그것뿐.
나는 입으로 잔을 가져가며
그대를 바라보고 한숨짓는다.
(이건 어쩐지 한국인이 좋아할 것 같아요. ^^)
늙은 선승의 노래
모리야 센안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 줘.
운이 좋으면
밑동이 샐지도 몰라.
(저는 왜 이렇게 술에 관한 시가 재밌을까요?? ^^)
용서하는 마음
로버트 뮬러
일요일에는 자신을 용서하라.
월요일에는 가족을 용서하라.
화요일에는 친구와 동료를 용서하라.
수요일에는 국가의 경제기관을 용서하라.
목요일에는 국가의 문화기관을 용서하라.
금요일에는 국가의 정치기관을 용서하라.
토요일에는 다른 나라들을 용서하라.
(역시 국가는 죄가 많군요. 사흘에 걸쳐 꼼꼼하게 국가 기관들을 용서해야 하다니... ^^
그나저나 이건 한국인이 좋아할 시 같지 않은데 말이죠. ^^)
음악은
퍼시 비시 셸리
음악은, 부드러운 음성이 멈출 때
기억 속에서 떨리고,
향기는, 달콤한 제비꽃이 시들 때
깨어난 감각 속에 살아 있네.
장미 꽃잎은, 장미가 죽었을 때
사랑하는 이의 침상에 쌓이고,
그대 생각은, 그대가 떠나고 없는 날
사랑이 그 위에서 잠들리라.
(좀 쓸쓸하지만 로맨틱해요. ~.~)
유월이 오면
로버트 브리지스
유월이 오면 나는
온종일 향긋한 건초더미 속에
내 사랑과 함께 앉아
산들바람 부는 하늘에
흰 구름이 지어놓은
눈부신 궁전을 바라보련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나는 노래를 지어주고
아름다운 시를 온종일 부르리.
남몰래 내 사랑과 건초더미 속에 누워 있을 때
오, 인생은 즐거우리, 유월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과 건초더미 속에 누워 하늘을 본다고 상상하니 흐물흐물 기분 조아요. ^^)
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
에밀리 디킨슨
애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한 생명의 아픔 덜어줄 수 있거나
괴로움 하나 달래줄 수 있다면.
헐떡이는 작은 새 한 마리 도와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이 시를 읽으니 헛되지 않은 삶을 살기는 의외로 쉬운 것 같기도 하네요.)
고독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독은 비와 같은 것
저물 무렵 바다에서,
멀고 쓸쓸한 들녘에서,
언제나 그것을 품고 있는 하늘로 간다.
그리고 하늘에서 도시로 내린다.
그것은 내린다.
밤과 낮이 뒤엉킨 시간에,
아침을 향해 거리가 몸을 일으키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육신들이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를 떠나갈 때,
그리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침대에서 잠을 이루어야 할 때.
그리고 고독은 강물과 함께 흘러간다.
(뭔가 몹시 고독한 느낌이에요. ^^)
혹시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세계의 명시를 알고 계신가요?? ^^
2016.07.28 22:52
2016.07.28 23:01
찾아보니 다 유명한 시인들이고 제법 유명한 시들인 것 같아요.
제가 '세계의 명시'에 약해서 모르고 있었을 뿐 ^^
짧은 시 한 편~~
안개
칼 샌드버그
안개가 내리네
작은 고양이 발에.
안개는 조용히 앉아
항구와 도시를 허리 굽혀
말없이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떠나가네.
2016.07.28 23:37
아주아주 오래전 옛날에는 롱펠로우, 구르몽, 타골, 푸쉬킨 등이 순위권에 있었는데
2016.07.29 00:13
타골, 푸쉬킨의 시는 없었고 제가 아는 몇 안 되는 시로 구르몽의 '낙엽'이 있더군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이 시는 첫인상이 잘못 박혀서 언제 봐도 느끼함 ㅠㅠ)
요즘 비가 와서 날도 선선하니 롱펠로우의 시 한 편~
비 오는 날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
날은 춥고 어둡고 쓸쓸하여라.
비는 내리고 바람은 쉬지도 않고
넝쿨은 아직 무너져가는 벽에 매달려 있건만
바람이 불 때마다 죽은 잎새 떨어지네.
날은 어둡고 쓸쓸하네.
내 인생도 춥고 어둡고 쓸쓸하네.
비는 내리고 바람은 쉬지도 않네.
나의 생각은 아직 무너져가는 과거에 매달려 있지만
거친 바람에 젊음의 꿈은 흩어지고
날은 어둡고 쓸쓸하네.
진정하라, 슬픈 마음이여!
한탄일랑 말지어다.
구름 뒤에 태양은 아직 비치고
그대 운명은 뭇사람의 운명이니
누구의 생에도 얼마간의 비는 내리고
어둡고 쓸쓸한 날 있는 법이니.
2016.07.29 00:21
아름다움은 진실이며 진실은 또한 아름다움이다. 들리는 멜로디는 아름답다, 그렇지만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 아름답다....이 싯구는 처음 들은 그 날부터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지요
2016.07.29 01:08
검색해 보니 존 키츠의 시 '그리스의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의 2연과 5연에 나오는 구절인 것 같은데
전체 시가 길어서 일단 2연만 ^^ (멋지군요!!)
2
들리는 선율은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선율은
더욱 아름답다. 그러니 부드러운 피리들아 계속 불어라.
육체의 귀에다 불지 말고, 더욱 아름답게,
영혼의 귀에다 불어라, 소리 없는 노래를.
나무 밑에 있는 아름다운 젊은이여, 그대는 노래를
그칠 수 없고, 또 저 나무들의 잎들도 질 수 없으리.
대담한 연인이여, 그대 결코 키스할 수 없으리.
비록 목표 가까이 이른다 해도. 허나 슬퍼하지 말라.
그대 비록 행복은 갖지 못한다 해도 그녀는 시들 수 없으리.
영원히 그대는 사랑할 것이며 그녀는 아름다우리!
2016.07.30 01:11
초원의 빛
윌리엄 워즈워드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눈 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는구나.
어떤 것도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해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서러워하지 않고
다만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이제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항상 있을 근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 주는 세월에서
2016.07.30 11:13
최근 영미시선 이라는 시집을 하나 샀어요
제가 좋아하는 수줍어 하는 연인에게 라는 시가 있어서요,,
르 귄에 소설제목에 시의 한구절이 차용되었거든요
그런 이유로 슈롭셔의 젊은이라는 연작 시 도 좋아합니다. 그 시는 두 개의 소설에 제목과 모티브로 쓰여졌거든요,
검색해보니 저처럼 이 두개를 같이 좋아하시는 분들도 꽤 되더라구요 ㅎㅎ
시는 너무 길어서 댓글로 쓰진 않겠지만 한 번 찾아 읽어보시면 좋을 듯
2016.07.30 13:17
이 시가 맞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수줍어하는 사람을 좋아해서 열심히 찾아봤어요. ^^
아주 멋진 시네요. ('슈롭셔의 젊은이'도 찾아봤는데 이 시가 좀 더 마음에 들어서 일단 이 시만...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줍은 연인에게
앤드류 마블
만약 우리에게 충분한 세상과 시간이 있다면
연인이여, 그대의 수줍음을 탓할 것 없다.
우리는 허구한 사랑의 나날을 어느 길로 거닐면서
더러는 앉아 곰곰 생각해 보기도 할 텐데 …
그대는 인도의 갠지스 강 가에서 루비를 찾고
나는 고향의 졸졸대는 험버강 가에서
애틋한 사랑의 노래를 읊조려도 무관하겠다. 나는
대홍수 10년 전부터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가 바란다면 유태인의 개종 때까지
나의 구혼을 거절해도 좋다.
나의 식물적인 사랑은 제국보다도
광대하게, 서서히 자랄 것이다.
일백 년은 그대의 두 눈을 찬양하고
앞이마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보내고,
이백 년은 그대의 두 젖가슴을 경모하면서,
삼만 년은 육체의 남은 부분을 숭앙하다가 보내리라.
육체의 각 부분을 기리는 데에 최소한 한 시대씩 걸릴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에 그대의 사랑의 승낙을 받고 말겠다.
연인이여, 그대는 이만한 대접을 받을 만하고
나도 이보다 덜한 비율로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허나 나는 등 뒤로 노상 듣노니,
시간의 날개 돋친 전차가 다그쳐 오는 굉음을,
그리고 우리들의 시야엔 온통
광막한 영원의 사막이 가로놓여 있다.
그대의 아름다움은 더는 볼 수 없게 되고
그대 차가운 대리석 무덤에는
나의 사랑의 노래 이르지 못하리니, 굼벵이는
그토록 소중히 간직하던 처녀성을 시식하고,
그대의 고아한 존귀로움도 티끌이 되고
나의 온갖 욕망 또한 재로 변할지니,
무덤은 속편하고 아늑한 곳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아무도 껴안지를 못하는 곳 …
그러므로 지금 그대의 아침 이슬같이
고운 살결 고운 때깔 가시기 전에,
도약하는 영혼이 기공마다에서
찰나의 격렬한 불꽃을 내뿜는 동안에
우리는 어우러져 즐거움 만끽하고,
시간의 아가리에 어적어적 씹어 먹히기보다는
한창 사랑에 빠진 맹금처럼,
차라리 시간을 게걸스레 먹어치우자.
우리의 있는 힘과 온갖 감미로움을
한 개 공으로 똘똘 뭉쳐 굴려서,
삶의 철문의 이쪽에서 저 끝까지
거친 투쟁으로 우리의 쾌락을 쟁취하자.
이처럼, 우리는 태양을 멈추게는 못하지만
우리는 태양을 달아나게 할 수는 있다.
취해 있으라는 보들레르의 시는 좋아해요. 언뜻 언뜻 들어는 본 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시들도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