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소설 <죄와 벌>을 읽고

2017.01.16 18:39

underground 조회 수:1212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1, 2>를 다 읽었어요. 헉헉;;  


원래 지난 주 금요일까지 다 읽으려고 했는데 띵까띵까 게으름을 피우다보니 금요일까지 읽은 게 고작 1권의 250페이지... 


전체 분량의 딱 4분의 1이었죠. (1권이 500페이지, 2권도 500페이지 정도 됩니다.) 


토요일엔 좀 열심히 읽어서 1권은 다 읽었고, 어제는 새해 독서 계획을 사수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몰려들면서 


죽어라 읽어서 2권 다 읽었어요. ^^ (역시 책은 평소에 놀 거 다 놀면서는 못 읽는다는 깨달음이... ㅠㅠ) 


민음사 번역은 한 가지 특이한 게 주인공 이름을 '라스콜니코프'로 했더군요.


'라스콜리니코프'로 알고 있다가 한 글자가 빠지니 뭔가 허전 ^^ 


1권의 중반까지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주인공이 전당포 노파를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는 과정, 실제로 그 노파와 여동생까지  


도끼로 때려죽이는 장면과 그 후의 피를 말리는 듯한 불안, 초조, 긴장, 공포 등 주인공의 심리적 고통이 어찌나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역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심리를 아는 작가, 뭔가 다른 차원의 작가라는 경외감이 솟아오르더군요.   


서머싯 몸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오, 이 작가 나랑 생각이 비슷하네' 라고 느꼈다면 ^^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오, 이 분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모습까지 꿰뚫어보시는구나.' 뭐 이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라스콜니코프라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심리 소설이고 제겐 그게 참 매력적이었어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나올 때는 광속으로 읽히다가 주변 인물들 얘기가 나오면 집중력 흐려짐)


라스콜니코프는 옳은 일을 하기 위해 거머리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였다기보다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머리 같은 자신을 죽이고 싶었던 것 같아요.  


1권 초반에 나온 마르멜라도프의 얘기, 그의 딸 소냐가 몸을 팔아 만든 돈으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며 탕진하는 아버지의 얘기는  


라스콜니코프의 상황, 그의 누이동생이 모욕을 받고 원치 않는 결혼까지 하며 그의 학비를 보태려는 상황과 겹치면서   


그런 희생에 대한 라스콜니코프의 혐오감이 강하게 표출되는데 잠시 도스토예프스키가 페미니스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 안 할 비도덕적인 행위도 가족을 위해서는 기꺼이 하게 된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기도 했고요. 


아무 의욕도 없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하숙방에 처박혀 있던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는 하지만 사실 결행할 의지는 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한 사건으로 강박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그 일을 저질러 버려요. 


정신없이 저질러 버린 살인 현장에서 운좋게 빠져나갔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숙방에 꼭꼭 숨어있으면 될 텐데 그것도 제대로 못하죠.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견디지 못하고 마치 얼른 잡아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자기가 범인임을 알리는 위험한 짓들을 하고 돌아다녀서 


제 심장을 졸아들게 만듭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정 서스펜스 스릴러가 뭔지 아시는 분 ^^)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 후에 밀려드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죠. 그 감정이 살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죄의식인지, 경찰에 붙잡힐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살인을 저지른 후 안절부절, 기진맥진, 신경이 곤두서고, 열이 나고, 흥분해서 미쳐 날뛰고, 


스스로의 감정의 사슬에 묶여서 끊임없이 괴로워해요. 독자의 심장이 조여들게 만드는 그런 심리 묘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는 것 같아요. 


1권 후반과 2권 전반의 몇몇 부분들에서는 긴장감이 좀 떨어지는데 제 생각에는 번역가의 성향이 좀 반영된 것 같기도 해요. 


김연경 번역가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괜찮게 읽어서 <죄와 벌>도 별 생각 없이 민음사 책을 선택했는데 


이 분은 원본을 충실히 번역하는 것 같긴 한데 뭔가 문장들의 유기적 연결성이 떨어진다고 할까, 읽을 때 속도감이랄까, 


긴장감이랄까 그런 게 좀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약간 건조하고 차분하고 꼼꼼하게 번역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죄와 벌>을 다소 격정적이고 굵은 선으로 묘사하는 남성 번역가의 문장으로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학수 번역의 <죄와 벌>이 문예출판사에서 나와 있던데 어떨지...) 


2권 중반부터는 다시 라스콜니코프의 심리 묘사가 많아지고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집중력이 높아집니다.  


저는 이 소설의 결말에서 라스콜니코프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으리라 기대했고 그 깨달음을 저도 덩달아 좀 얻어볼까 했는데 


그런 건 아니더군요. ^^ 그는 노파를 죽인 게 잘못임을 깨닫고 뉘우쳐서 자수한 게 아니라 그 일을 저지른 후 몰려드는 


심리적인 고통을 못 이겨서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수했을 뿐이었어요. 


그러니 자수한 후에도 그가 어떤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다거나 구원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세상이 요구하는 대가를 치르기로 하는 순간, 그는 자신만의 관념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실제 삶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소냐의 역할은 그가 자수할 수 있는 용기를 내게 하여 그 자신의 폐쇄된 세계로부터 


걸어나오게 한 것, 스스로에게 계속 가하고 있던 정신적 고통을 멈추게 한 것, 그 정도인 것 같아요.  


앞으로 라스콜니코프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열린 결말로 남아있네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저 그 모순과 한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없어지는 게 세상에 이롭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만 그의 감정은 전혀 다르게 작동하죠.   


노파를 죽이는 것도 어느 날 강박적으로 실행해버렸고, 노파를 죽인 후에도 스스로 범인임을 드러내는 행동을 충동적으로 해버리는데 


한편으로는 그가 노파를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 공포에 휩싸여 있어요.  


다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왜 그래야 하는가를 묻는 마음 사이에서 분열되고 고통받고...  


인간은 그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그래서 그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지기 참 힘든 존재인 것 같아요. 


범죄를 저지른 후 그 감정적 후폭풍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은 저 같은 사람은 그저 나쁜 짓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평범한 교훈을 끌어내며 저는 이만 총총... ^^ 


이번 주에는 페터 회(정영목 번역)의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상, 하>와 카프카의 <소송>을 읽으려고 합니다. 


혹시 이런 저런 책을 읽고 계시는 듀게분들 중에 새 글로 올릴 마음까지는 없지만 간단히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편하게 댓글 달아주세요. 다른 분들 책 읽는 얘기를 들으면 저도 막 읽고 싶은 의욕이 솟구치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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