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에게서 배우다

2019.11.23 11:20

어디로갈까 조회 수:701

강단에 서는 선배가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는 게시판의 게시물들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아마도 선배는 에세이 하나를 수업 중에 학생들과 같이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냈던 것 같아요. 스무 편 가까운 짧은 감상문들이 올라와 있었는데, 그 중 몇 학생의 글이 흥미롭고/착잡하게 다가왔습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확연히 어둑해지는 쓸쓸함을 느꼈어요. 에세이의 화자인 <나>에 대한 학생들의 냉정한 통찰이 마치 '진지함'에 대한 가차없는 공박처럼 느껴졌거든요. 

추측해 보건대 에세이는 이런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합니다. 현재 공무원인 <나>는 어느 날 장기체납자의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런데 체납자의 이름이 과거의 한 여자를 떠올리게 만들어요.  <나>가 청년시절 야학에서 가르치다 알게 된 여학생과 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엄습한 그 과거에 대한 느낌이란  그리움과 죄책감이 뒤섞인 것이에요.  왜 죄스러운가 하면,  그녀가 <나>를 무척 좋아했고, <나>에게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관계 - 남녀의 관계- 를 호소했는데, 그걸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거절한 이유는 당시의 <나>가 젊었기 -보다 어렸기 -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가난한 삶을 감당할 자신이 <나>에겐 없었다는 것이죠.
특히 그때 그녀가 <나>에게 했던 질문, "선생님은 한번도 고생을 해보신 적이 없지요?" 라는 말이 그때나 20 년이 지난 오늘에나 <나>의 마음을 몹시 마음 아프게 합니다. 
 
감상문을 적은 학생들은 대부분 화자인 <나>의  위선, 우스꽝스러움, 내려다보는 자세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공박하고 있었어요. 몇 줄의 짧은 글들이었지만 '난자'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공격들이었습니다.
원문을 읽어보지 못했으나, 제게 수필의 화자는 '윤리의식이 민감한 사람'이라는 쪽으로 정리가 되었기에 그 반응들이 좀 뜻밖의 관점으로 다가왔어요.  '세대 차이'라면 너무 거창한 말이 되겠지만, 어쨌든 화자의 정체된 삶과 태도를 단박에 깨트려버리는 자유로운 입지가 저에게는 약간 생소하기도 신선하기도 하네요.
 
글로 전하는 생각의 엄숙함과 아름다움이  이런 점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공부를 오래 했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진실 혹은 통찰의 열쇠를 쥐고 나타나는 인물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동시에 저는 문학동네의 옛경고훈들을 기억해 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말이에요.  
"문학은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또는 "문학은 화해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는 문학이 끌어당기고, 맺힌 것을 풀고, 이해의 조명탄을 띄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냉정함과 동등하게 의미를 지니는 것이 따뜻함 혹은 화해라고 생각합니다. )

절대적인 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필 속의 <나>는 하자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글 전반에 나타나 있는 한 인간의 프로필은 '윤리적인 것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므로 "우습다, 그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A학생의 평가가 옳은 것이라 해도, 그처럼 모든 것이 단죄되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학생 B의 감상 : " 그녀는 희미한 옛사랑의 이미지라기 보다 지금의 <나>가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나>는 가난을 모른다. 그들의 삶 또한 알지 못한다.  그녀의 말이 가슴 아팠지만 그 후로도 <나>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 결국 그녀는 <나>의 타인이다. 가난을 모르는 '내' 삶만이 <나>의 것이다. <나>의 태도가 우습다. 하지만 앞으로도 바뀔 것 같지는 않다."

학생 C의 감상:  "글 속의 주인공은 무척 무료한 공무원으로 보인다. 그는 그녀를 생각함으로써 옛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최대한 아닌 척 포장하고 있지만 내 생각엔 <나>는 그녀를 생각하면서 굳이 표현하자면 우쭐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하하. B 학생 글에 대해선 90 퍼센트쯤의, C 학생 글에는 50 퍼센트쯤의 동감을 보냅니다.  보내는 동시에 곧 모두 부정하다가,  다시 전적으로 긍정합니다. 말하자면 저는 그들의 의견에 갈팡질팡하며 안착하지 못하는 생각들의 둘레에 있습니다. 
제가 두 학생과는 다르게 감상문을 쓰는 입장이더라도 그들의 의견은 이미 제 나이쯤에는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학생과 같은 글을 쓰더라도 이미 저는 그 다음을 생각하는 중이어야 하는 나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음?)

저 에세이의 화자와 그에 대한 논박을 보노라니 '위선의 완성'이라는 은사님의 화두가 떠올랐어요. 이제 저는 '불편하고 힘들게 어떤 자세에 매달린다'는 그 의미와 그것에의 추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냉철한 통찰이 냉철함과 통찰이 되고 나서 또 어떤 삶을 이룰 수 있는 건지, 학생들보다 십 년 이상 나이가 많은 제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덧1: 에세이에 대한 감상 대신 이런 글을 남긴 학생이 있었어요. "우리 세대를 묶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이 필요하다는 강박관념밖에는 공통된 의식도 없어요."
그럴지도 모르는 이십대 초반의 '자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과정, 의미, 추구, 보람, 공동체, 주체성, 삶의 가치... 같은 말들이 가닿을 수는 없겠죠. 아직은...

덧2:  문득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머리말이 떠올랐어요. '죽음'이란 단어를 '젊음'으로 바꾸면 지금의 제 느낌과 싱크로율 80% 정도 됩니다. - -
"사는 것은 그 정의상 배우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삶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아니고, 삶에 의해서 배우는 것도 아니다. 오직 타자로부터, 죽음에 의해서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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