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이후.

2020.01.02 23:13

잔인한오후 조회 수:1129

1_ 연애를 시작한지 좀 부풀려서 햇수로는 4년이 되었네요. 있었던 일들의 앞 뒤를 헤아리기 어려워지고, 문뜩 문뜩 나와 많이 닮아버린 애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두 소도시의 어떤 곳을 가도 적어도 한 번은 지나친 곳입니다. 같이 있으면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버리는 것에 깜짝깜짝 놀라고, 지나보낸 기간이 의외로 길다는 것에 새삼스러워 합니다. (몇 년 함께 보냈네 ~ 이러면 실감이 안 나는데, 00살부터 00살까지 함께 보냈네 하면 뭔가 다른 기분이 듭니다.)


2_ 애인과 저는 많은 면에서 서로 다르고, 그렇기에 관계가 유지되기도 하고 또한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애인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없는듯 넘어가는걸 선호하고, 저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걸 좋아합니다. 다양한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불확정성 혹은 확정성 선호는 여러모로 생각해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무서운 일이나 힘든 일이 언젠가 생길거라면? 애인은 5분 전이나 하루 전에 그 일이 일어날 사실을 알게 되는걸 바랍니다. 저는 한 달이나 3개월 전 쯤에는 아는게 좋죠. 시간이 흐르면서 불확정성 선호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언어화 되지 않은 상황이 얼마나 다중의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떤 다층적 감정에 겨워할 때, 거기에 특정한 이름을 붙이게 되면 실제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 특정 방향으로 정제화 됩니다. 그런 고체화가 다른 의미들을 모두 쫒아 내버리는데 고통을 받는 것이었죠. 


서로에게 화가 나서, 그 사실을 반복적으로 되짚을 때 저는 그런 사실이 뚜렷해지며 인과와 논리가 확실해지고 서로의 사과를 통해 감정까지 정중히 정리되는 해소감을 맛보는 반면, 애인은 되짚으면 되짚을수록 사실이 크게 강화되고 아주 오랫동안 마음의 한 자리를 차지하여 은은히 고통을 녹여 스며들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둘 사이에서의 분위기가 둘의 협의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중력을 합의 하에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아, 그런 무거운 분위기는 이제는 제가 먼저 정리해 버리게 되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는 좀 더 경쾌하고, 핫핫핫 하고 웃고, 한 달 보다 더 길게 미래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_ 한동안 꽤 오랜 기간 애인과 싸우는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갑니다. 가끔 어쩌다 상대방을 슬프게 만들거나 하긴 하지만 말이죠. 


4_ 연애 기간 동안, 애인은 레디컬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브레지어를 벗고, 화장품을 전부 폐기하고, 옷을 편하게 입기 시작했죠. 저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입장인데, 저와 같은 입장을 뭐라고 지칭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아이에 대한 생각도 없고 결혼도 유보적이었던 저와, 원래부터 주변의 혼인 이후를 보며 고통 받고 이제는 결혼이라면 학을 떼는 애인과의 연애란 지금, 여기의 연속이었죠. ( 종교적인 이들이 가득했던 공간에서 벗어난 저로서는, 특정한 이념에 깊게 빠지고 전파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 논리가 옳던 그르던 일단은 거리를 두고 냉정할 수 밖에 없는 습성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깊은 공감에 침잠하지 못하는 이런 습성은 일평생 고쳐지지 않을 듯 싶습니다.) 


그리하여 연애-이후, (도대체 포스트-무엇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를 제가 생각하는 시점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결혼이 없는 세계에서 연애의 다음(?) 단계라는게 따로 존재할까요? 보통 이런 문제에 부딪혔을 때 문헌을 뒤적거라는 저로서는 "비혼 장기 연애"라는 기묘한 주제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더군요. 어떠한 롤모델 없이 알아서 계속 잘 살아본다면 어떨까 싶은 방식은 저와는 어울리지 않고 말이죠. 사실 바로 방금 한 말이 해답에 가깝긴 하군요, 원치 않지만 선구자가 되는 길 말이지요. 


5_최근 애인과 함께 이승환 콘서트를 다녀왔습니다. 낯 부끄럽고 우스운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노래 가사 주제가 이별이었고, 특히 "언젠가 서로가 더 먼 곳을 보며 헤어질 것을 알았지만"이라던가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 만나지 말자!"라던가를 들으니 여러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더군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모처럼 애인이 큰 돈을 들여 제 몫까지 내준 콘서트 후기로는 슬픈 이야기를 꺼냈고 애인은 슬퍼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이래 저래 다 푼 뒤지만 제 자신을 어떻게 안정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써보는 글입니다. (감정적으로는 충분히 안정적인 상태이지만 논리나 철학적인 면에서) 


쓰기 전에, 그리고 쓰면서 생각 해보니 어떠한 계약을 한다손 치더라도 헤어질 것이라면 헤어지게 될 것이고, 서로 밉고 싫다면 그렇게 되는걸 막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연애 상태라는게 매 번 절차가 복잡하지 않은 '헤어짐'이 도사리고 있는 진검 승부의 반복으로도 생각할 수 있고, 다르게 생각하면 서로가 편안한 상태에서는 꽤 긍정적인 상태인 것 같기도 하고요. 많은 구술사적 자료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연애한 지 7년 째였는데...", "11년 연애의 ..". 


하하, 역시 처음에 잠깐 설명했던 개인의 속성적 고통을 얼마나 잘 버틸 수 있느냐가 개인의 성숙도를 나타내나 봅니다. 저는 근본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하고, 애인은 고정을 두려워합니다. 연애하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변화와 고정의 영향을 끼치고 달라져 가니 이제 이렇게까지 멀리 가지 않으면 갈등이 나타나지도 않는 것이겠죠. 함께 조금 더 먼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함께 조금 더 먼 미래까지 고정시켜버리는 것일 수도 있겠죠. 


애인에게 자주 불리는 별칭이 허당인데, 그렇게 칭하는 걸 들을 때마다 자각합니다. 옳은 말을 많이 쓰더라도 상관 없이 감정에 휘둘리고, 슬프고 괴로우면 시야가 좁아지고 행동은 틀어지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 때 그 때 정신을 집중해서 잘 사는게 더 중요한 게 아닌지 싶고. 다 치우고 여러 걸음 걸을 생각 말고 한 걸음 한 걸음만 생각해야겠어요. 


(하하, 이렇게 단정적으로 결론을 짓는 버릇 때문에 또 짓고 말았는데 허당인걸 고려하시고 조언 등 다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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