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니까 바낭

2020.09.05 01:11

여름 조회 수:327

베란다 문을 닫으려다가 피부에 와 닿는 찬바람이  좋아서 한참을 서 있었어요.

둥근 달은 높이 떠 있고 저 달이 한 번 더 기울었다 찰 때면 추석이 오겠죠.


저는 명절에 집에 가지 않아요. 세상 분별할 줄 모르던 어린 눈에도 명절의 풍경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온기를 느끼기에 그들은 좀 거칠고 투박했거든요. 쟤는 애가 참 이상해,  어른들은 이야기 했지만 저 역시 그들을 놓고 같은 생각을 했어요.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명절에 여기에 오지 않을거라 오랜 시간 되뇌었고, 그러고 있어요.


명절이 되면 도심에 가요. 텅 빈 도심의 한 중앙에 서서 서늘한 바람이 부는 풍경을 그저 가만히 바라 봐요. 반드시 이정표로 찍고 오는 곳은 광화문이에요. 광장으로의 광화문 말고 경복궁에 들어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광화문이요. 그 가운데에 서서 남대문 방향을 향해 한참을 바라 봐요. 화려하게 명멸하는 도시의 불빛 속에 텅빈 대로로 밀려 들었다 사라지는 자동차들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아득하게 흩어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러다 보니 그런 풍경을 보는 것이  취미 중 하나가 되었어요.


서울의 오래 된 동네를 하나 정해 목적 없이 걷는 거예요. 오래된 동네는 집집마다 다른 표정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 집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담겨 있을 이야기들이 상상이 되서 즐거워요. 이왕이면 해질녘에 시작해서 새벽녁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목적 없는 산책을 해요. 동행이 있고 날씨가 허락한다면 맥주도 홀짝이죠.  때로는 오래된 건물을 하나 점 찍어 두고 그 동네를 가기도 해요. 지도를 켜지 않고 그저 발 닿는 대로 돌아 다니다 어느 순간 모퉁이를 돌았더니, 그 건물이 쨘!하고 눈 앞에 나타날 때의 반가움. 그래서 한동안 산책과 관련된 책들을 참 많이 읽었어요. 자연스럽게 손이 갔거든요. 그 중 최고는 "아보카도를 만지며 산책을 합니다"예요. "그냥 모퉁이를 돌았을 뿐인데, 위안을 얻을 때가 있다"라고 프롤로그에 적은 것처럼 내가 산책을 좋아 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작가도 산책을 좋아해요.


코로나로 일상이 멈추었다고 생각했어요. 다시는 예전처럼 느리게 걷지 못 할거라 생각했는데 일상이 멈추고 나니  돌아 가려 그렇게 애를 써도 되지 않던 예전의 속도가 다시 찾아 오더라구요. 이제 나는 노력 하지 않아도 다시 느리게 걸을 수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내가 그리워 하던 코로나 이전의 일상이란 게 정말 그렇게 이상적이었던가? 의문이 들어요. 아마 이건 얼마 전에 읽은 칼럼의 영향도 클 거예요. 세상이란 건 한 번도 건강했던 적이 없는데 우리가 그리워 하는 코로나 이전은 정말 아름다웠었나? 코로나 이후는 정말 그 이상으로 아름다울까?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지 코로나라는 "현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라는 내용의 칼럼이었으니, 분명 영향을 받았겠죠. 태풍이 지나 가도 노을은 아름답고. 바람에 흩어지며 서정과 서사를 넘나 드는 퇴근길이었어요.


지금의 현재를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 들이자는 마음에서-"뉴노멀"이라는 말은 부대껴요. "노멀"이 의미하는 어떤 정상성 때문이겠죠- 오랜만에 음주독서 하는 금밤을 보내려 기네스 네 캔(에 만원 흐흐)을 사서 들어 왔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말을 담기 보다는 뱉고 싶은 날인가 봐요. 계절이 바뀌고 있으니까요. 비슷한 공기가 흐르던 시간들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분주해져요.


산책을 하다 우연히 999번 버스가 옆 동네를 지나 가는 걸 봤어요. 다음엔 친구와 함께 그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 볼 거예요. 아, 앞 문장을 "언젠가"로 바꿔야 하는 나날이었죠. 자꾸만 달이 삼켜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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