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여인

2021.06.04 20:02

Sonny 조회 수:1449

저는 듀나게시판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가 힘들어했던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우울증 환자와 친분이 생겼는데 저에게 본인의 자살 트라우마나 자살하겠다는 이야기를 너무 자주 하고 약속을 펑크내거나 연락을 끊고 잠적하는 등 불안정한 관계로 저를 힘들게 했다고요.  어림잡아 3년간은 그가 어떻게 자살을 시도했었는지, 어떻게 자살할 것인지 저에게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말들을 끊이지 않고 듣는 것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자살을 말리기 위해 화도 내보고 따뜻하게 위로도 해보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돌리기도 해보고 희망찬 선언도 해봤지만 그게 먹힌다 싶으면 며칠 후에 또 죽고 싶다며 전화가 걸려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연락이 끊겼고 저는 타인의 불행을 공유한다는 게 꼭 진실을 공유한다는 게 아니라 가장 귀찮고 곤란한 부분을 떠맡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겪으며 한편으로는 더 터프해졌고 한편으로는 더 무감각해진 것 같습니다. 


최근에 다시 연락이 왔고 그는 저에게 해왔던 것들을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같은 패턴의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미안하다는 사과와 민폐를 끼친다는 자책과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말들이 뒤섞인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진작 쳐내지 않았냐고 답답해하실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네시간을 통화하고서 전화를 끊으면 5분 후에 다시 전화를 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하면 안되겠냐며 대화를 청하는 사람을 냉정히 끊는 방법을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5월 말에 그 분이 또 자살예고를 했고 심상치않다고 느낀 저는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뭐하러 경찰을 불렀냐고 타박을 받은 저는 완전히 지칠 대로 지쳐서 더 이상 연락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분께 그래도 마음써준 거였는데 미안하다면서 짤막한 문자가 왔고 저는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것이 저희의 마지막 연락이었음을 그도 대략 눈치챘을 것입니다. 


어제 그의 소식을 신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http://mnews.imaeil.com/Society/2021060311002432847


제가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당한다는 고통을 듀게에서 알게 된 분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그 분의 성폭력 피해자 정체성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그것은 그의 개인사라서 제가 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떠들어대는 것이 부적절하다 느꼈고, 그가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단어에 의해 축소되거나 그가 통제했어야 하는 요소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저를 소모적으로 대한 것에 대해서는 그의 피해자 정체성과 무관하게 토로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미 절망과 환란의 시간을 지나쳤기에 그의 부고 뉴스를 보고서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하는 짧은 탄식 같은 것만이 속에서 맴돌 뿐입니다. 


이제 그와 저의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원망이나 동정 같은 것들을 모두 내려놓은 채 다른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성추행 피해자였습니다. 그의 우울증에는 복잡한 가정사와 때마침 이어진 관계의 파산들 등 여러 요소들이 복합되어있었지만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직장 내 성추행이었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한샘 성폭력 편에서 그는 자신의 직장에서 사내 성추행을 당한 또 다른 피해자로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는 직장 내 성추행을 당해서 그에 대한 공식적인 항의를 했지만 거의 묵살당했고 사내의 모든 직원들이 그를 따돌렸습니다. 전과 16범이네 꽃뱀이네 등등 별의별 괴소문이 다 돌았고 직장 내 동료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공유했습니다. 그는 끝내 회사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https://www.nemopan.com/pan_issue/11443751


그와 제가 연락이 닿게 된 것은 원래부터 친했던 사이여서는 아닙니다. 어느 커뮤니티 정모에서 아주 잠깐 스쳐지나간 정도의 인연밖에는 없었는데, 그가 성폭력 이슈를 검색하다가 제 블로그에 우연히 오게되었고 그가 자신의 사건을 저에게 설명하다가 통화까지 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죠. 그의 성폭력 사실을 이해하고 같이 분개해주는 주변인들이 있었다면 그가 굳이 저에게 연락을 했을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매우 불우하게도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이 성폭력 사건에 무심하고 사건의 해결보다 사건으로 인한 소요를 멈추길 바랬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2차 가해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그만해도 되지 않겠느냐, 너의 분노와 고통은 이해한다만 이제 잊고 앞으로 나아가면 안되겠느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유난 떠는 사람으로 몰렸고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활동하던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렸고 많은 회원들의 위로와 공감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당신이 당한 일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 전체를 일반화하지 말라거나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선동을 하지 말라는 댓글들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성의 인권과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그는 계속해서 "개인화"를 당하며 불쌍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몰려야했습니다. 메갈, 페미, 프로불편러 여자들에 대한 항명을 하면 할 수록 그는 예외적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그가 저에게 몇십번이나 반복해서 경멸했던 댓글이 있습니다. 선거 게시판에서 다른 의견을 나누던 중 "이러니까 성추행이나 당하지"라는 댓글을 누가 달았다고 하더군요. 그는 환멸을 느껴서 그 사이트를 나왔고 오프라인과 온라인 어느 곳에서도 소외감을 느끼는 상태였습니다. 때마침 저는 분노에 차있던 상태였고 그를 이해할 동기와 사명감이 충분했습니다. 온라인에서 혼자 화만 내면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에 저도 적잖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기 떄문에 저는 그를 도와야한다는 책임감을 크게 느꼈었죠. Sympathy보다 Empathy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건 한참 후의 이야기지만.


2106041.png

(가장 최근에 했던 통화 시간)


3년전 그와 처음 통화를 했을 때 저는 무려 10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여자사람들과 핸드폰으로 수다 떨었던 경험이 많았고 날을 새서 이야기해본 일도 많았지만 단 한번도 끊지 않고 무려 정말로 10시간을 이야기했던 건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제가 단기간에 가장 오랫동안 통화했던, 그리고 가장 많이 통화했던 사람이며 이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막 분노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만 늘어놨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와 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학교 때 첫사랑 이야기, 망한 연애 이야기, 한국남자 이야기, 어렸을 적 이야기,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 등... 그는 그 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고 부지런히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었죠.


그를 돕기 위해 대화를 시작했지만 그게 전적인 저의 선의나 희생만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경청에 힘을 꽤 쏟아야했지만 저는 그와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며 많이 웃었고 아픈 기억들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갖고 있을 가족에 대한 쓰리고 서러운 기억들이라거나, 골때리게 사고친 이야기라거나. 그 역시 한국 거의 모든 여자들이 갖고 있을 "자기한테 으시대며 들이댄 남자들"에 대한 경험담이 있었고 "기껏 좋아하게 되었더니 자기를 팽한 남자들"에 대한 경험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풀어놓을 순 없지만 그와 제가 서로 깜짝 놀래며 몇번이나 "진짜요? 왜 그랬어요? 이해가 안가는데요?"를 연발했던 사연들도 있었습니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그는 제가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입니다. 아마 만난 적이 없는 상황에서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는 등 일절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없으니 대화밖에 할 게 없어서 더 열정적으로 대화에 몰두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제가 그와 대화를 하면서 깨달은 절망적 사실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지인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자신도 인정할만큼 꽤 억척스럽고 빠릿빠릿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를 증명하고 배상을 받기 위해 바로 증거수집을 했고 모든 대화를 기록하거나 녹음으로 남겨놓으면서 자신의 재판에 유리한 증거들을 수집했습니다. 그의 변호사도 이만하면 됐다고 했고 그는 질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었지만 그는 몇번이나 제 도움을 사양했습니다. 그건 제가 무력한 탓도 있었지만 그의 싸움이 본질적으로는 그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재판일에 그는 너무 긴장이 된다고 했고 저는 방청을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몇번이나 그러지 말라고 저를 만류했습니다.


당시 저는 재판에 패소했던 사람들이나, 역으로 명예훼손으로 고소된 피해자들의 사례를 알고 있어서 은근히 초조하기도 했습니다. (신림동 XX님...) 그런 저를 오히려 그가 안심시키며 덤덤하고 행정적으로 법적 싸움을 벌려나갔죠. 이때 제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재판이라는 건 무척이나 오래 걸리고 피곤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변호사도 만나고, 필요한 자료도 수집하고, 그의 경우 법적 공방에 필요한 행정적 서류를 회사에 제출하는 등 이래저래 굉장히 할 일이 많았고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늘 재판입니다, 라고 말 할 때 저는 그게 끝인 줄 알았지만 그 이후로도 그는 법원에 더 가야했습니다. 이것만 처리하기도 귀찮은데 그는 회사에서 병가를 얻어야했기 때문에 또 서류를 제출해야했고 이런 저런 일들을 도맡아야했습니다. 어찌됐든 사람이 살아야하고 거기에는 돈이 들어가니까요.


"고소하세요"란 말은 절대 가벼운 말로도 권유할 게 안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누군가와 1년간 계속 다퉈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사적으로도 그런 싸움을 이어나가는 건 머리가 빠지거나 하얗게 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법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명예와 책임을 걸고 해야 합니다. 고소하라는 말은 쉽습니다. 그걸 실제로 진행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귀찮고 생계에 대단한 부작용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실 그가 그렇게 법적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예 병가를 내놓고 1년 가까운 시간을 아예 쉬었기 때문입니다. 회사 다니면서 고소를 하고 법정싸움을 하는 수고로움을 저는 상상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이런 법적 투쟁을 혼자서 대단히 잘 해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 과정에서 꽤 많은 스트레스를 겪었고 고립감과 피로를 저에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상급자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자신을 아예 고립시켜놓고 법적 맞불을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면 그 부담감이 어떨지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는 끝내 승소했고 그에게 벌금을 먹이는 데 성공했지만 공무원으로서 국가로부터의 손해배상을 인정받는데는 실패했습니다. 변호사가 가해자로부터 승소를 거둬낸 것에 만족해야된다고 만류했다면서요. (참고로 여자변호사입니다) 이런 싸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자체가 사람을 좀먹습니다. 저는 그래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너무 쉽게 고소하라거나 법적으로 "인실좇"을 보여주라는 응원을 하는 걸 좀 자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회원활동을 했던 그 커뮤니티의 회원들은 다 그런 댓글들을 달았습니다만 그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


사내 성추행은 한 사람의 인생을 파탄내기에 충분한 폭력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최소한의 경제력을 갖추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을 어디에서 하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얻습니다. 그런데 사내 성추행은 피해자의 경제력과 사회성을 일거에 다 부숴버립니다. 피해자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러나 가해자의  입김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는 눈총을 받으며 그 직장을 그만둬야합니다. 잘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자기가 피해자인데, 그것 때문에 그 직장을 그만두고 생계유지의 수단과 사회적 지위를 다 박탈당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내 성추행은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타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경우 그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이직이나 다른 회사에 새로이 입사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 역시도 피해자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요구를 했었죠. 부서를 이동해달라, 가해자를 안볼 수 있게끔 해달라 등.. 그런 요구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계속해서 2차 가해에 맞닥트려야했습니다. 안그래도 그는 오래 전부터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 사내 성폭력과 사내 따돌림은 그의 고통을 가증시켰습니다. 그는 공무원인 덕택으로 1년간 병가를 얻어서 쉴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이런 사건이 사기업에서 일어난다고 했을 때 피해자가 달리 무얼 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십시오. 


특히나 우울증 환자의 경우 자신의 병이 역으로 음해의 도구가 됩니다. 원래 이상한 여자다, 제정신이 아니다, 정신이 아파서 아무 말이나 한다... 여태까지 아무 문제없던 사람이 성폭력 고발 이후에는 상종하기 힘든 광인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어떤 정신적인 흔들림이나 의학적 증상도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이 꼿꼿하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우울증과 논리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가 속한 모든 사회에서 '당신이 당한 일 때문에 사리분별이 잘 안되는 것 같다'는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2차 가해는 그가 활동했던 커뮤니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는 저에게 그 커뮤니티를 포함한 남초 커뮤니티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치를 떨었습니다. 


---


그와 연락이 잠시 끊겼다가 다시 연락이 되었을 때는 박원순의 자살 사건 때였습니다. 저 역시도 그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당한 일과 박원순 성추행 사건이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공무원 사회, 상급자의 추행, 고발 이후 이어지는 수많은 음해와 신상 파헤치기, 가해자는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앙과 위로, 음모론... 저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그가 겪은 일들이 박원순이라는 훨씬 더 사이즈가 큰 가해자로 재구성되어 재현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2차 가해라는 것이 어떻게 국민적인 범위로 자행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남성의 도덕성에 대한 맹신은 어떻게 한 여자를 말살할 수 있는지.


그와 통화하면서 저는 다른 의미로 조금 힘들었습니다. 그가 다시 우울해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그가 거의 신이 난 것처럼 활기가 넘쳐서 이 사건을 즐거워하며 떠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게 자연스러운 게, 온 세상이 성폭력을 어떻게 해석하고 피해자 여성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국가적 규모로 날 것의 2차 가해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매번 울먹거리며 쓰러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산입니다. 사람이 독해지면 슬픔이나 비탄같은 감정들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한 때 이런 문장이 돌았었죠. "미투가 남자를 죽였다"라는, 가해자 남성을 연민하고 피해자 여성에게 죄책감을 씌우려는 이상한 남성중심적 자기연민을 담은 문장말이죠. 그 때 트위터에서 누가 그랬습니다. "미투가 남자 더 죽였으면 좋겠다." 상대가 자신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가해자로 꾸밀 때, 그것을 해명하지 않고 어떤 설득도 거부하면서 더 나가버리는 게 원, 혹은 한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과 사람을 향한 환멸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이 크게 나오지 않습니다. 타인들이 경악하고 화를 낼 때 먼 심적 거리를 유지하며 그것을 아무렇지않게 조롱하고 풍자하죠. 이런 말들을 내뱉을 정도로 차가워진 사람들의 심정은 헤아리지 못하고 그것이 비인간적이라며 경악하는 사람들이 중립을 자처하는 걸 볼 때, 솔직히 저도 웃기긴 했습니다. 


당시 박원순의 죽음에 대해 정론을 펼치며 분노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풍자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박원순이 어떤 방식으로 자살을 했을지, 명탐정 코난처럼 추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는 배꼽을 잡고 웃더군요. 그 사람도 분명히 자살을 해본 사람이라서 저렇게 디테일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라면서, 그는 박원순의 죽음을 그의 큰 스트레스 해소창구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복수심이라는 걸 박찬욱 영화나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픽션에서만 봐서 그게 대단히 극적이고 보는 사람의 가슴을 멎게 하는 무언가인줄 압니다. 제가 옆에서 본 복수심이란 건 딱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건 오히려 인간성에 더이상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아주 속되고 가벼운 것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저나 그, 혹은 페미니스트들의 비인간성을 통탄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정말 웃기는 소리입니다.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막 타오르거나 거대한 그런 분노같은 게 없습니다. 수많은 피로와 스트레스로 마모되어서 인간성에 연연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줄 수 있는 그런 자유로움만이 가득하죠.


그는 박원순 이야기를 하면서 엄청나게 화를 내고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기도 했지만 엄청나게 조롱하면서 놀려댔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감정에 좀 동하게 되더군요. 인간성이니 생명이니 죽음이니 하면서 근엄을 떨고 가해자 편을 드는 사람들을 하도 이곳저곳에서 많이 보게 되니 말이죠.


---


그와 나누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 압축해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에 대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를 기리기 위함이 첫번째이고 그가 성추행 피해자로서 어떤 고통과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최대한 전달을 하고 싶은 게 두번째입니다. 그가 회사를 쉬고 있을 때 저에게 종종 말하던 게 또 다른 성추행이나 여자로서 겪는 불합리한 일들이었습니다. 그가 쉴려고 제주도에 갔는데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가 자꾸 아가씨 아가씨 타령을 하면서 끈질기게 번호를 묻더란 겁니다. 또 한번은 그가 차를 주차해뒀는데 같은 동에 사는 어떤 남자가 자기 차의 창문에 일부러 침을 뱉는 일이 몇번이나 반복되었단 겁니다. 그는 그 남자와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가 저에게 되풀이했던 말들, 잊어버리고 싶은데 잊어버릴 수가 없어서 게워내듯 쏟아내는 말들은 진실의 개념을 저에게 새로 가르쳤습니다. 진실에 무슨 근거와 증거와 과학적인 무엇이 그리 필요한지를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거나, 증거가 없다거나, 중립기어로 일단 기다리겠다는 그런 말들이 우습습니다.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이란 엄청 뻔하고 시시합니다. 그건 김전일에 나오는 아주 계획적인 범죄가 아니라 피해자 여성을 만만하게 보고 저지르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남자를 감싸는 사회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아무리 피해를 이야기해도 믿어주지 않겠다는, 그래도 남자 측에서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남자가 그래도 집행유예로 끝날만한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인물이라는 본보기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성추행했다는 진실은 이런 평향 속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일단 여자를 의심하고 보는 게 무슨 공정인줄 아는 사람들이 가득하니까요.


그가 사내성추행을 당하기 전까지 성희롱이나 성추행 같은 일을 한번도 안당했을까요. 혹은 그가 유별나게 재수가 없어서 그런 일을 당했지 대다수 여자들은 다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에서 살며 대다수의 선한 남자들과 아무 트러블도 일으키지 않으며 살아갈까요? 제가 이 게시판에서도 느끼는 건데, 성범죄자 남성이나 성범죄 피해자 여성을 별세계의 특이 케이스라고 여기는 남자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무죄추정의 원칙이니 객관이니 귀납이니 하는 쓸모없는 통찰을 대단히 많이 떠듭니다. 진실이란 건 꼭 숫자나 통계가 아니라 어떤 사실과 그 사실이 사회에 끼치는 파장입니다. 이런 말을 또 대다수 남자들은 선량합니다 같은 소리를 할 텐데 그런 전제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매일매일 발생하는 진실 앞에서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성대상 성폭력 범죄들만 집중적으로 올리는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고 그 덕에 매일매일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들을 봅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쌓여가는 데이터들과 그 데이터로 얻어지는 감각이 있어야 볼 수 있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가 저에게 전화나 카톡으로 '오늘 어떤 사건 보셨어요?'라고 물어본 사건들은 얼마나 많은지 아시나요. 그가 백퍼센트 확신을 하며 피해자를 동정하고 용의자에게 쌍욕을 했던 사건들은 얼마나 많은지 아시나요. 대다수의 남자들은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그냥 삽니다. 그러면서 여성상위시대니 남자가 역차별을 당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계속합니다. 듣는 저도 이렇게 피곤한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지겹고 환멸이 쌓여있을지 다들 좀 상상을 해볼 때가 되었습니다.


---


성폭력 피해자들은 상상 속의 동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불행과 고통 때문에 미쳐버린 환자도 아닙니다. 그냥 똑같은 사람이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교 폭력의 피해자, 군대내 부조리의 피해자에게는 무한한 공감과 지지를 하면서 성폭력 피해자 여성에게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참 쉽게들 합니다. 모르겠으면 지나가면 될 일입니다. 여성이 살기 편하다, 남자가 무고에 시달린다, 악의를 가진 여자들이 법을 망친다, 이런 음모론은 그만 좀 떠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사자에게 몇년이나 하소연을 들은 저로서는 너무나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들일뿐이니까요.


그는 잠을 못자서 힘들어했습니다. 몇년간 이어지는 불면의 밤을 전화통화로나마 같이 샜던 사람으로서, 그가 이제는 편히 자길 바랍니다. 더이상 누군가의 밤을 꺠트리고 잠을 해치는 그런 말들이 최소한 이곳에서라도 줄어들길 바랍니다. 물론 이런 저의 바람을 그는 비웃었을 겁니다. '남자들은 다 쓰레기에요, 아무리 당사자가 말을 해도 듣지도 믿지도 않는데 뭐하러 그런 데 힘을 써요?' 라며 몇번이나 저에게 핀잔을 주곤 했으니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3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9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90
124091 조금 늦은 2023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후기~ [2] Sonny 2023.08.24 399
124090 <에릭 클랩튼: 어크로스 24 나이츠>를 보고왔어요. [7] jeremy 2023.08.23 242
124089 [넷플릭스바낭] 매우 하이 컨셉하고(?) 아트 하우스스러운(??) SF 소품, '더 나은 선택' 잡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3.08.23 385
124088 미임파7에서 떠올린 로저 래빗/김혜리 팟캐스트 에피소드 daviddain 2023.08.23 207
124087 프레임드 #530 [4] Lunagazer 2023.08.23 94
124086 레저수트 입은 래리 [6] 돌도끼 2023.08.23 316
124085 작가 폴오스터 말입니다 [6] toast 2023.08.23 601
124084 부천 빵집 메종블랑제 [2] catgotmy 2023.08.23 347
124083 뒤늦게 재장마중에... 비, 눈, 폭설, 번개등, 날씨나 계절, 특정 시기에 생각나는 영화, 노래들 [6] 상수 2023.08.23 256
124082 [티빙바낭] 대체 이 제목 누가 붙였어!! 시리즈에 한 편 추가. '타이거맨' 잡담입니다 [11] 로이배티 2023.08.22 444
124081 디즈니플러스 무빙 7회까지 (스포) [2] skelington 2023.08.22 470
124080 미임파7 오펜하이머 잡담 [5] daviddain 2023.08.22 364
124079 사악한 얼간이들이 나라를 지휘하고 있을 때 [2] 상수 2023.08.22 481
124078 에피소드 #51 [4] Lunagazer 2023.08.22 86
124077 프레임드 #529 [4] Lunagazer 2023.08.22 83
124076 멀어질 결심 [8] Sonny 2023.08.22 576
124075 안녕하세요 nixon 입니다 [15] nixon 2023.08.22 695
124074 후쿠시마 핵발전소 오염수 24일 방류 결정 [2] 상수 2023.08.22 371
124073 듀게 오픈채팅방 멤버 모집 물휴지 2023.08.22 105
124072 [아마존프라임] 시작부터 할 것 다했던 타란티노씨, '저수지의 개들' 재감상 잡담입니다 [14] 로이배티 2023.08.22 45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