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같은 동네 같은 헬스장을 다닙니다. 회원들과 친목하는 것은 없지만 긴 시간 다니다 보니 비슷한 시간대에 운동 나오는 분들과는 가볍게 목례 정도는 나눠요. 같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공동 샤워장에서 함께 몸을 씻는, 오래 본 사이.


거기서 중장년을 지난 분들이 나누는 몸에 관한 얘기를 우연찮게 듣습니다. 단순히 살이 쪘다, 빠졌다를 넘어 어딘가 몸이 아팠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수술을 하고 왔다, 그 전에는 살이 쪘는데 그러고나서 살이 몇 킬로그램이 또 빠졌다, 그러다가 불쑥 “눈으로 볼 때 느껴지냐” 저에게 묻기도 합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구석구석 바디로션을 바르다가 때로 서로간의 속옷에 대한 칭찬으로까지 이어지는 어른들의 귀여운 담화에는 더 이상 젊지 않지만 당신들 몸에 대한 애정과 지극한 정성이 느껴져요. 지금보다 좀 더 젊었을 때만 해도 저런 얘기들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죠. 오히려 젊었음에도 항상 불만족스럽고 아쉽기만 했던 몸.


사실 건강보다는 미용이 주목적이었던 체력단련을 하고 그러면서 습관적인 식이조절을 병행하고, 일정 정도 이하의 숫자를 늘 유지해야만 안심이 되던 강박적인 시기야 벗어났지만, 늘 잘 구획되고 정리된 몸에서만 아름다움을 봐왔던 제가 중장년을 넘어 노인의 몸에서도 귀함과 생기를 느끼게 되는 건, 멀지 않은 미래의 제 모습에 대한 관대함을 허용하는 모순일지도요.        


세상에는 아직 내가 못 입어본 옷들이 너무 많고 그 옷들을 다 입어 보기 전까지는 못 죽는다고, 이것을 삶을 연명하는 큰 이유로 들기도 했던 제가 물욕이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체감한 것도 벌써 몇 년째입니다만... 실은 20년 넘게 같은 사이즈의 청바지를 입어요. 청바지뿐만 아니라 다른 옷도 같은 사이즈를 입지요. 하지만 같은 사이즈를 입는다 해서 같은 옷을 계속 입는다는 의미도, 같은 옷을 입어도 옛날과 같은 핏이라는 의미도 아니죠. 몸은 분명 옷항아리에 들어가지만 그 때의 느낌과 분위기도 아니고 유행도 바뀌었고, 옷도 저도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깨닫죠.

 

아직도, 여전히 회사를 다닙니다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목표치로 설정한 시기에 얼추 다 와 갑니다...

지난 달에 같이 일하던 스탭이 유학을 가면서 사람을 하나 뽑아야 했어요. 그 전에는 이미 뽑아 놓은 직원들 틈에 관리자로 들어가거나 또는 구인광고

자체를 내는게 제 역할이 아니었는데, 이번엔 나랑 가장 가깝게 일해야 할 사람을 직접 구해야 할 만한 상황이 돼서 올렸는데… 거의 쉬지 않고 수십 년을 직장생활 해 온 저에게 취업난은 늘 현실감이 안 느껴지는 단어였는데, 이미 원하는 연령대와 경력 그리고 연봉까지 정확하게 설정해 놓았음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구직자들은 젊으면 30대 후반, 주로 40대 중반 그리고 심지어 57세에 지원을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특히 이 분의 이력서 제목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히던 감정이란...

 

회사란 뭘까요? 직장이란 뭘까요? 저는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습니다좀 더 젊었을 때 내뱉던 거창한 의미도 묵직한 운명감 같은 것도 없이 어느 때부턴가 징글징글한 습관처럼 그리고 이제는 본능적인 생활처럼 반복되는 이 일도, 내가 해왔고 원한다는 이유로만 더 할 수 없는 날이 곧 올 것 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성과는 올렸지만 올 한 해는 정말 힘들었어요. 기다리는게 반인 이 직종에서도 결국 끝은 있는 기다림인데, 기다리다가 끝나는 일이 더 많았거든요. 지금 이 연말의 미결들은, 내년 새해를 새로 시작하는 일들로 더 끌어올릴 수 있겠거니 낙관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 와중에 지속하고 있는 발레는 도통 늘지 않은 채 겨우 1보 전진해 놓으면 5보 후퇴하는 퇴행의 반복이다가, 그 위기들을 장비빨로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분명 윗글에는 물욕은 사라졌다 했는데, 장비는 왜 늘었죠? 그래요. 저는 일반옷을 안 사고 가방과 구두를 사지 않았을 뿐 각종 브랜드의 발레착장들과 토슈즈 일습을 쟁여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개의 취미가 그러하듯 이쪽 분야에서도 선호하는 대세 브랜드가 있기 마련이고

저 역시 이런저런 시도 끝에 내 몸과 분위기에 맞는 기능적인 장점이 좋은 특정 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한 벌 두벌 사들인 것이 무슨 컬렉션 수준이 되었네요. 진즉에 무용복 전용 행거를 마련하고 정기적으로 한번씩 정리하면서 일전에 이제 진짜 안 입는 것들 나눔 좀 하려고 레오타드고 스커트고 아무리 솎아내 봐야 행거의 행간이 늘어나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만...


취미발레계가 야금야금 시장을 확장해 오다 요 몇년 사이 급속도록 팽창되기 시작하면서 핑크택스니 뭐니 하는 것도 울며 겨자먹기로 수용하는 상황이 된 지라 학원비나 장비값 그리고 성인 콩쿨이라도 나가려면 가외로 들어가는 비용이 꽤 만만찮지만...인생취미로 이만한 게 없다는 중론들이니 한동안 이 기세는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 저의 개인 목표는 내년엔 진짜 마음에 드는 연습용 클래식튜튜를 손에 넣는 거에요?(무대의상 및 로맨틱튜튜도 이미 다 갖고 있다는 게 함정)

 

그리고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의 끝판왕! 우리 고양이도 이 추운 겨울을 저와 벌써 일곱번째 맞이하며 잘 지내고 있어요. 묘령에 역행하며 갈수록 아기가 되어가는 이 녀석의 앙탈을 받아주며, 여전히 뼈다귀놀음 대용인 제 손목을 내주며 틈만 나면 딱 붙어서 살고 있어요. 올 가을엔 정기 검진에 큰 맘먹고 치아 스케일링도 단행했고, 내년부턴 노령묘로 들어가니 먹는 사료도 바꿔줘야 한다는데 그 생각만 해도 눈물이 그렁그렁. 살짝 이름만 불러도 뱃살을 튕기며 저를 향해 달려오는 녀석을 볼 때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깝고 소중합니다. 이제 저는 이 아이가 하는 모든 말을 다 알아듣고 불만과 칭찬도 다 구분할 수 있어요. 우린 세상에서 가장 사이좋은 친구고 단짝이죠.

 

언제부턴가 신체의 노화가 1년 단위가 아닌, 3, 5년치가 한 번에 오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어요. 한 번에 확 늙는거.

물론 날마다 늙고 있는데 애써 외면하거나 깨달음이 더딘 것이겠죠. 욕실 거울로 볼 때마다 확연히 늘어난 새치에 화들짝 놀라거나 분명 같은 사이즈인데 달라진 듯한 체형에 낙담하는 주기가 자주 와요. 하지만, 삶의 궤적에 큰 변화가 없이 아직은 크게 아프지 않고 가동범위가 줄지 않은 채, 생계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활동을 할 수 있고, 세상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 몇 가지는 곁에 두고 향유할 수 있으면 이 정도면 괜찮은 거겠지요.


올 한 해도 저마다 살아내느라 애썼고 고생 많았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마무리가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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