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학교생활기록부

2019.12.26 15:41

로이배티 조회 수:832

제 직종 사람들은 언제나 연말을 학교생활기록부 점검과 함께 하죠.

정확히는 그냥 담임 교사들만 하는 일이긴 한데 뭐 전 지금껏 거의 담임을 해와서. ㅋㅋ



제가 학생이었던 시절의 생활기록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죠.

그냥 좀 두꺼운 종이 쪼가리 한 장에 3년치 내용이 다 담겨 있었는데 담긴 내용이 뭐가 있었더라...

이름, 주소, 1, 2, 3학년의 소속 학급과 담임 이름, 출석 통계, 과목별 성적, 그리고 담임 교사 의견란 한 칸씩 정도?

3년 동안 쓰는 종이 한 장 양식에 매년 담임들이 수기로 적어주는 식이었는데 그나마도 담임이 뭔가 생각해서 적어줘야할 부분은 의견란 뿐이었죠.

그리고 이거 어디다가 제출하고 쓸 데도 없으니 다들 그냥 짧고 굵고 솔직하게 적어줬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주의가 산만하다'는 표현을 생기부를 통해 배웠.... (쿨럭;)



그에 비해 요즘 학교생활기록부는 어마어마해요.

중3이 되어 졸업할 때 쯤이면 보통 A4 10페이지 이상 분량이 나오는데 그 중 거의 절반은 담임과 교과 담당 교사들이 적어주거든요.

그리고 이걸 입시에 써야 하니 적으면 안 될 내용, 적어줘야만 하는 내용이 정해져 있는데 그 규칙이 해마다 계속 수정되고 추가됩니다.

예를 들어 이제는 생기부의 어디에라도 '대회'라는 단어를 적으면 안 돼요. 큰일 납니다. ㅋㅋ 그래서 학교 행사들 이름에서 '대회'가 죄다 빠졌죠.

영어, 그러니까 알파벳은 책 제목과 저자명에만 쓸 수 있습니다.

책 제목 외엔 유명한 사람이나 캐릭터 이름을 적으면 안 되는데 역사적 인물이나 고전 예술 작품 제목은 또 괜찮아요.

그러니까 링컨은 되고 뽀로로는 안 되는데 앤디 워홀은 애매하고 뭐 그렇습니다. ㅋㅋㅋ

대학교 이름이나 구체적인 무슨 기관 이름을 적어도 안 돼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주대에서 실시한 진로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뽀로로 캐릭터를 활용한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는 내용을 적고 싶으면

"대학교에서 실시한 진로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유명 캐릭터를 활용한 영상을 제작해 사람들과 공유했다"

라고 써야 하는, 뭐 그런 식이죠.



그런데 사실 가장 피곤한 건 이런 규칙들이 아니라 남이 쓴 문장을 들여다보며 오류를 찾는 일입니다.

다른 반의 학교생활기록부를 넘겨 받아서 점검하고 돌려주는 일인데, 그 학급 담임은 물론 그 학급에 수업을 들어가는 모든 교사들이 다 몇 문장씩 적어주게 되어 있기 때문에 십수명이 쓴 글들을 읽게 되는데... 교사라고 해도 딱히 작문 교육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라 다들 말은 잘 해도 그걸 문장으로 적으면 맞춤법 오류 같은 건 둘째 쳐도 비문이 난무하거든요. 사소하게 한 두 군데 고쳐주면 될만한 문장이면 그냥 체크하면 되지만 문장 자체가 총체적 난국일 때는 참말로 난감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고쳐달라고 알려드려도 '아 뭐 이런 것까지' 라면서 기분 나빠하시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난감.



하지만 그래도 할 일이니까... 라고 눈에 초점이 안 맞을 지경이 될 때까지 죽어라고 그 종이쪼가리들을 들여다보다보면 문득문득 찾아오는 슬픔이 있죠. 그게 뭐냐면,



아무도 이걸 안 읽을 거라는 겁니다.



제가 일 하는 곳이 고등학교가 아니다 보니 언젠가 이걸 읽을 사람은 어차피 교육청의 생기부 점검 담당자들 밖에 없고 (학생들 본인에게 보여주는 건 금지입니다) 그나마 그 양반들도 대충 스크롤하면서 눈에 띄는 오류만 찾지 이걸 그렇게 하나하나 다 읽지 않아요.

뭐 극소수의 특목고나 예고 같은 데 갈 아이들 같은 경우엔 그 학교 입시 담당자들이 읽게 되겠죠. 근데 그럴 학생은 대략 200명 좀 안 되는 한 학년 학생들 중에 많아야 너댓명이고 사실 그 입시 담당자들도 이런 거 문장 하나하나 다 읽지 않아요. 몇 군데 좀 중요해 보이는 부분만 발췌해서 보죠.



결국 나머지 학생들의 학교생활기록부는 이렇게 죽어라고 담임과 교과 담당들이 쓰고, 죽어라고 그 사람들이 점검하고, 그걸 또 교육청측 점검자가 훑어본 다음에, 교육청 서버 스토리지를 낭비하는 바이트 덩어리가 되어 영원히 숙성됩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바이트 낭비]라고 할 수 있겠죠.



어쨌든 이것도 일이니 매년 열심히 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뭔가 개선이나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한 마디로 '이 일 하기 싫어 죽겠어요'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끄읕.




+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덩달아 생각났는데. 조국네 딸 생기부 유출건은 왜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요즘 생기부는 조회해서 출력하면 거기에 몇년 몇월 며칠 몇시 몇분 몇초에 이용자 누구가 출력했다고 생기부 하단에 찍혀 나오고 그 기록도 교육청 서버에 다 남는데 말입니다. 2~3일이면 해결될 일이 영원한 미제 사건이 될 기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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