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동생이랑 놀이공원 후기

2020.03.09 21:01

Sonny 조회 수:941

저는 제 사촌동생을 볼 때마다 괜히 일일 아빠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얘가 아직 어린 데 성격은 드세고 가정환경 상 부드럽고 사려깊은 대화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한테 아 알았다고, 아 그만 좀 전화하라고, 내가 알아서 한다고, 같은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는 걸 보면 욱 하면서도 하기사 나는 더했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애랑 더 놀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죠. 사촌동생은 저를 쓸데없이 좋은 사람으로 봅니다. 하기사 저도 어렸을 때 저희 고모가 아이돌 이야기하고 이쁜 옷 사다주면 엄청 쿨하고 멋져보였어요. <보이 후드>의 이썬 호크처럼 특별한 순간들을 사로잡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좀 들기도 하죠. 좋은 허영 아닐까요.


사촌 동생이 오기 전날 저희 집에서 재우는 건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집이 추웠습니다. 이건 진짜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구요. 사.동.(청년이면 줄임말 씁시다)은 환경에 좀 예민한 편입니다. 저도 서울 놀러온 동생을 그렇게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구요. 저는 그냥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그렇게 사는 인간인데도 가끔은 자다가 추워서 깨니 할 말 다했죠. 온수매트는 고장. 보일러는 중앙 난방. 어차피 돌아다니면서 서울의 추위를 만끽할텐데 김승옥의 소설을 제 방에서 재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숙박업소들을 찾았는데...


이게 좀 골 때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몰랐어요. 모텔에 미성년자를 데리고 가는 것은 법적으로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롯데월드 근처의 모텔들을 찾아본 후 전화를 했는데 카운터에서 의외로 단호박을 내리치는 겁니다. 동생은 남자고, 나도 남자다, 이런 설명을 해도 안됩니다 죄송합니다만 돌아오더군요. 법적 보호자의 증명서류가 있어도 그게 안된대요. 귀찮은 일 싫다고. 전화로 몇군데 찔러봤지만 다 그런 대답이었습니다. 약간 분노했습니다. 아니 왜 드러운 아재들 때문에 가족여행을 하는 나까지 불편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런데 찜질방에 재울 순 없잖아요. 청소년 숙박 가능한 유스호스텔은 가격은 두배인데 시설은 좀 많이 구려보였습니다. 거기다 2인실은 거의 다 나가있었고요.


할 수 없이 무인텔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네 쓰면서도 뭔가 좀 이상하네요... 그런데 진짜 재울만한 곳이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무인텔이 종로 쪽에 딱 한군데가 있더군요. 이런 데를 이용을 해봤어야지... 그래도 무인텔이면 눈치를 좀 덜 보겠지 싶어서 예약했습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무인텔이 말만 무인이지 유인텔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키를 받으면서 속으로 조용히 욕을 했습니다. 武人이라서 무인텔인거냐? 왜 무인텔이라고 하고 사람을 유인함? 이 유인원 같은 놈들아. 별 일은 없었고 그냥 제가 긴장하긴 했습니다. 아무튼 이 시시한 잠자리 문제는 조금 있다 더 쓰겠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오전에 조조 영화를 보고 터미널에서 사.동.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고모부한테 전화가 몇통이나 걸려와있는 겁니다. 아침에 몇시까지 간다고 컨펌을 이미 받아놨었는데. 사.동.과 재회한 후 고모부에게 바로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사.동.과 돌아다니면서 저는 사.동.의 성질이 더러워진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고모부가 좀 많이 케어를 하시더라구요. 두시간 간격으로 전화를 하는데 나중에는 보는 제가 지칠 지경이었습니다. 놀이동산이라서 전화를 못받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그 전화가 저한테 옵니다. 사.동.한테 부재중 두 통, 저한테 부재중 세 통. 한 두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나중에는 부재중 전화를 다시 걸 때마다 설명을 해야하니 제가 좀 심적인 에너지가 소모되더군요. 네 기구 타느라 전화를 못받았어요. 그런가? 재미있게 놀게~ 아무리 서울이라지만 그래도 사.동.한테는 부모님 품을 벗어난 여행이기도 할텐데... 나중에 해외를 같이 가면 아예 핸드폰을 꺼놓고 같이 여행을 다니면 좋겠다는 복수 비슷한 계획을 떠올렸습니다. 사.동.도 그게 좀 짜증났나봅니다. 제 딴에는 친척 형이랑 좀 놀고 싶은데 계속 아빠의 전화가 그걸 산통 다 깨놓으니까... 고모는 딱 한번인가 전화했습니다. 저는 고모랑은 친해서 짬짬이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긴 했습니다. 고모는 그냥 ㅋㅋㅋ라고 답하고요. 고숙고숙하던 고숙...


사.동.이랑 잠실 역에서 좀 헤맸습니다. 졸지에 지하철 역에서부터 둘이 어드벤쳐를... 저는 분명히 확신을 갖고 걷는데 사.동.이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형 여기서 쩔루 가야 하는 거 아냐? 그럼 저는 저대로 리더십을 발휘해서 그냥 제 정보를 밀어붙이면 되는데 또 바보같이 그런가...? 하고 유턴을 합니다. 그런 다음 갔다가 이 산이 아닌가벼~ 하는 쌍팔년도 꽁트를 한번 찍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후 둘이 갔던 길로 다시 갑니다. 그리고 저는 사.동.을 타박합니다. 아 여기 맞잖아! 그럼 사.동.은 그냥 웃습니다. 아ㅋㅋㅋㅋㅋㅋ 꿈과 희망이 가득한 인테리어들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뱉었습니다. 표를 예매하고 드디어 입장! 그 당시에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이라서 시민들의 얼굴에 꿈과 희망이 가득했더랬습니다...


입장을 하고도 좀 헤맸습니다. 일단 뭘 타지 고민을 하는데 분명히 제 기억속에는 바깥에서 자이로 드롭을 탔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어드벤쳐 안에서 매직 아일랜드가는 길을 찾아 지도를 정신없이 봤습니다. 졸지에 탈조선인 행세. 일단 눈에 들어오는 풍선비행을 타려고 했지만 어디서 타는지 포기. 아이스링크를 휘젓고 있던 리틀 김연아도 같이 구경했구요. 오랜만에 오니 들뜨긴 하더군요. 내가 맨날 타는 지하철 1호선은 파카 입은 할아버지들이랑 피곤에 절여진 회사맨들만 있는데 여기는 왜 이렇게 모노레일이 화사하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별천지에 온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위화감에 휩쌓였습니다.


어드벤쳐 관을 지나가는 그 통로에서 와~ 하고 놀라다가 교복을 입은 여자남자가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20살 더 먹은 으른들이 기분낼려고 일부러 저렇게 입고 온건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학생들인 겁니다. 다 커플들이더라구요. 정말 죄다 커플들이었습니다. 혹시 내가... 눈치 없이 와선 안될 곳을 온 건가? 제 사촌동생은 신경도 안쓰는데 제가 괜히 신경이 쓰였습니다. 롯데월드는 1020의 데이트 성지였던건가? 민들레 영토에 혼밥하러 온 할배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대학생들도 별로 없는 것 같았고 온통 교복교복교복. 나 지금 나잇살 먹고 애들 노는 데서 뭐하는거지 이런 자괴감이 좀 들었습니다. 아니 재미있었는데, 근데 저도 나름 즐기고는 있었는데, 그냥 연령값 못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좀... 


제가 또 몰랐던 게 일단 세고 강한 것부터 예약해야한다는 걸 몰랐습니다. 평일이기도 하고 날도 좀 추워서 사람이 많이 없을 줄 알았는데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태극전사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자이로드롭은 수리 중이어서 못타고, 아트란티스는 계속 풀로 예약이 차있고. 그 때 전 롯데월드 어플로 기구를 예약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매직 아일랜드 안에 있는 그 예약자판기(...)에서 계속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랑 사.동.은 멍텅구리같이 번지드롭 같은 시시한 기구에 예약기회를 써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일단 이거라도 빨리 타자는 심정이었는데 시간 좀 걸리더라도 좀 쎄고 재미난 자이로스핀이나 아트란티스에 걸어놓고 어드벤쳐에서 즐기고 있을 걸... 번지드롭은 소박했지만 꽤 무서웠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약간 많이 무서워서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습니다. 옛날에는 끝나고 나면 웃으면서 다시 또 타고 싶었는데 이제는 <현기증>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된 것만 같았네요. 트랙 아웃, 줌 인... 트랙 아웃, 줌 인...


뭘 바로 또 탈까 하다가 체력을 채우기 위해 점심을 먹었습니다. 사.동.이 판다 익스프레스가 개쩌는 맛집이라면서 누가 인스타에 뭘 올려놨다 어쩐다 이야기를 하길래 갔습니다. 그냥 급식소 중국집이던데... 그래도 배고파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전 볶음밥 좋아합니다. 딱 귀엽고 유치한 맛이었네요. 그리고 귀신의 집을 기다리다가 와플을 먹으려는데 와플집도 길고 긴 줄... 와플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고 뭔가 큼직하니 맛나보여서 추위를 무릅쓰고 기다렸는데 막상 베어무니까 너무 두꺼웠습니다. 소스는 손에 다묻고 질질... 딱 하나 사서 넷이 나눠먹으면 좋을 그런 덩어리였습니다. 저희 동네에 있는 와플대학에 편입하고 싶은 맛이었네요. 옥수수도 먹고 싶었지만 이미 와플에 위장이 점령당해서 식욕이 다 항복해버렸습니다. 귀신의 집은 꽤 재미있었네요.


의외로 재미있던 게 플라이벤쳐? 이제 시간도 별로 없고 괜히 추위에 떨면서 고생하느니 자잘한 거 연속으로 타자고 합의를 하고 입장한 건데 꽤 재미있더라구요. 씨지인 걸 아는데도 약간 속을 수 밖에 없는 비쥬얼? 사람은 시각이 정보의 80%정도를 차지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밑바닥이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처럼 되어있으니까 목끝이 근질근질했습니다. 번지드롭도 못견디는 20세기맨은 이제 그런 가짜 신문물에 희희낙낙해야하는 것인지. 신밧드도 탔고... 파라오의 저주도 꽤 오래 기다려서 탔는데 기냥저냥이었습니다. 기다리면서 무대 공연을 멀리서 보는데 진짜 예쁘더라구요. 가까이서 봤으면 좋았을걸.


이제 대망의 복귀 이야기입니다. 둘다 진이 빠져서 그 무인텔로 가는데... 제가 또 괜히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다른 데면 모르겠는데 위치가 또 종로라서요. 사촌동생한테 안경 쓰고 후드 쓰고 있으라고 했더니 그게 더 의심스럽다면서 거절당했습니다. 일단 제가 먼저 가서 키를 받고 다시 나갔다가 둘이서 들어오는데 이게 왜 이렇게 껄쩍찌근한건지... 침대는 푹신했구요. 방은 따뜻했습니다. 사.동.이 눈치없이 자꾸 나가서 뭐라도 사먹자고 하는데 지금 밤 열시가 넘었고 너 데리고 다니면 나 신고당할지도 모른다면서 말로 꼬집어줬습니다. 그래서 둘이 짬짜탕 세트를 시켜먹었는데 짬뽕 국물이 너무 시원하고 맛있어서 놀랐네요. 왜 나는 대학생의 데이트 코스를 이렇게 밟고 있는 걸까... 것도 종로에서...


늦잠을 자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뭔가 찜찜한 기분으로 숙박업소를 나왔습니다. 익선동 새우라멘집에서 둘이 힙스터 흉내를 내면서 라멘을 먹었구요. 터미널에서는 쉑쉑버거에서 쉐이크를 먹은 뒤 빠이빠이했습니다. 그 전에 고모부의 전화를 한 삼백통쯤 받고요. 사.동.이는 형 롯데월드 존잼이었음 ㅋㅋ 이라고 짧은 후기를 보냈습니다. 재미는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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