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7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철학자, 페미니스트, 정신분석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천재로 꼽은 세 명의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한나 아렌트와 멜라니 클라인, 그리고 콜레트입니다. 크리스테바는 이 세 여성을 위해 세 권으로 구성된 연작의 책을 냅니다. 그 중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정신분석가에 대한 책 <정신병, 모친살해 그리고 창조성: 멜라니 클라인>을 매우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크리스테바는 클라인을 두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위시한 남성 중심적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여성의 자리를 되찾아낸 천재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제가 멜라니 클라인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평생 앓아왔던 우울증을 기어코 이겨낸 인물이라는 점이 꽤 큰 몫을 합니다. 남편의 직업 특성상 끊임없이 이사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매우 불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하던 그는 1914년에 프로이트의 꿈에 관한 저서를 발견합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순간 그것이 바로 내 추구하던 것임을 깨달았다. 적어도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나를 만족시킬 만한 것을 찾으려고 애쓰던 그 시절에는 그랬다"1)


그리고 그는 정신분석에 헌신하여 평생의 작업, 특히 아동들과의 분석을 통해서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아주 큰 이름을 남깁니다. 현재 열 개 정도의 정신분석 학파 중, 가장 큰 학파가 바로 클라인 학파입니다. 교양과목으로 듣는 심리학 과목에서는 프로이트만 다루고 넘어가는, 마치 현대에 와서는 거의 폐기된 학문인 듯한 뉘앙스를 주며 넘어가는, 정신분석이지만, 정신분석은 프로이트 이후 현재까지도 살아 숨 쉬고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학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치료사들이 그들의 치료 실제에서 도움과 영감을 받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문이기도 하고요. 한국에서도 여러 협회에서 활발히 학술 활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는 학문으로서, 정신분석적으로 지향된 심리치료사들의 치료 실제에 영향을 끼치는 정신분석을 저는 '현대 정신분석'이라 부르겠습니다. 이제 현대 정신분석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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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이가 든 클라인의 모습을 랩탑의 바탕화면에 깔아둘 정도로 좋아합니다. 지난한 우울의 세월들을 이겨내고 끝내 마음의 평화를 찾은 듯한 그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제게 묘한 안정감을 주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1. 편집-분열적 자리

클라인의 이론에 따르면,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무의식적 환상(phantasy) 속에서 엄청난 불안을 느낍니다. 이를 멸절불안(annihilation anxiety)라고 부릅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자기 자신이 소멸되어져 버릴 것 같은 불안입니다. 그러다가 머지 않아 대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첫 대상(object)은 주로 어머니의 젖가슴입니다. 아기는 어머니를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신체의 한 부분인 젖가슴만을 부분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를 부분 대상(part object)이라고 부릅니다. 이 때의 아기는 세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분리해서 본다고 합니다. 이를 분열(splitting) 기제라고 부릅니다. 세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보는 아기가 시달리는 불안은 '박해'불안(persecutory anxiety)입니다. 자신이 배가 고플 때 젖가슴이 다가와서 수유를 해주고 익숙한 냄새를 풍기고 안아주고 달래주면, 그 젖가슴은 아기의 마음 속 표상에 좋은 젖가슴으로 새겨지고 좋은 기억(물론 언어적인 기억이 아닙니다.)으로 남게 되지만, 반대로 아기가 배고파서 울고 있는데도 젖가슴이 다가와서 먹여주고 안아주고 달래주질 않으면 그 때 아기는 마음 속에서 (정말 신기하게도) 나쁜 젖가슴이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박해'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나쁜 기억으로 남게 됩니다. 이 좋고, 나쁜 기억들이 아기의 마음 안에 각각의 표상(representation)으로 남게 되는데 이를 대상(object)이라고 부릅니다. 클라인은 이 마음 속 표상인 대상과 아기의 자아가 갖는 관계인 '대상관계'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면서 대상관계 이론(Object-relation Theory)의 중심적 인물이 됩니다. 지금 설명한 일들이 일어나는 시기는 출생부터 생후 약 4개월에서 6개월정도 까지의 기간이고 이 기간의 정신적 체계를 편집-분열적 자리(paranoid-schizoid position)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보통의 성격발달 과정의 이론들에서 쓰이는 단어인 '단계(stage)' 로 쓰이지 않고 '자리(position)'이라고 쓰인 것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더 설명하겠지만, 이 것은 첫째, 성격발달의 과정 중에도 편집-분열적 자리와 뒤에 설명할 우울적 자리 사이에서 앞으로 뒤로 이동하기 때문이고, 둘째,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가 일시적으로 이러한 자리로 이동 혹은 퇴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기에 그렇습니다. 



2. 우울적 자리

아기는 '시기심'이 넘칩니다. 시기심이란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은 마음인데, 그 특징은 남의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좋은 것마저도 끝끝내 파괴해버리는 것에 있습니다. 아기가 무엇에 시기심을 느낄까요? 앞서 아기의 첫 대상이 어머니의 젖가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기는 자신을 먹여주고 달래주고 안아주는 어머니의 젖가슴에 시기심을 느낍니다.


"유아는 영양과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젖가슴에 비굴할 정도로 의존해야 한다. 클라인은 유아가 젖가슴을 매우 풍요롭고 강력한 것으로 경험한다고 상상하였다. 그러나 무언가 순조롭지 못한 순간에 유아는 그 젖가슴이 훌륭한 물질 또는 좋은 젖을 자신만을 위해 저장해 놓은 채, 유아에게는 지속적이고 전적으로 그것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느낀다."2)


사실 15년 전에 용산 도서관 열람실 한쪽에서 이 구절을 읽다가 숨죽여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저의 영유아기의 전언어적 기억이 건드려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꿈의 해석(1900)>을 집어 들고 다짐했던 멜라니 클라인처럼, 저는 클라인의 이론에 대한 이 구절을 접하고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꼭 이 학문을 하겠다고요.


유아는 시기심에 불타며 자신의 마음 안에서 엄마의 젖가슴(실제 젖가슴이 아니라 아기 마음속의 표상)을 무자비하게 공격합니다. 그런데도 어머니 혹은 어머니 인물이 (이상적인 경우) 아기에게 보복을 하지 않고 다 받아주고 수유해주고(혹은 젖병을 물려주고), 어르고 달래주고 사랑해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좋은 대상 경험들이 점점 쌓이면서 나쁜 대상 경험의 양을 점점 압도하게 됩니다. (이 두 경험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고, 이 시기에 나쁜 경험이 좋은 경험을 압도해버리면 어쩌면 평생을 이곳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렇게 좋은 경험이 쌓이면서, "성장하는 자아는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이 동일한 대상임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3) 즉 아기는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을 구분하던 것에서 벗어나게 되고 분열(splitting)이라는 방어기제의 사용을 점진적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또 아기는 이때 부분 대상들(part objects)을 전체 대상(whole object)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즉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이 통합되고, 주로 젖가슴이라는 부분으로만 존재하던 엄마의 신체 부분들을 통합해 전체 인격으로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스핏쯔라는 학자는 이 이 시기(생후 6~8개월)의 아기가 어머니가 아닌 낯선 사람에 대해 염려, 눈 맞춤의 회피, 숨는 것 등의 고통스러운 반응을 보임을 관찰했습니다. 이를 '낯선 이 불안'4)이라고 부르는 데 이 시기에 아기가 엄마를 전체 인격으로서 인식하게 되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시기심 때문에 그렇게 공격했던 대상들이 자신을 사랑해주고 먹여주고 안아주던 사랑하는 어머니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유아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바로 이때 어마어마한 죄책감과 우울감이 몰려옵니다.


"유아는 자신을 박해받는 수동적인 희생자로 경험하기보다는 손상을 입히는 행위자로 경험한다; 이제 박해는 자아보다는 대상이 겪는 것이 되고, 위험의 원천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는 것이 된다. 클라인은 사랑하는 대상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인식이 "우울적 자리"에 속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런 느낌이 일으키는 불안을 "우울 불안"이라고 불렀다."5)


문학작품 중에서는 소월의 시 '접동새'에서 이러한 정서가 잘 드러납니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웁이나 남아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크나큰 죄책감은 성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힘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삶 자체를 끝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월이 32세의 나이에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통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요. 이러한 우울감이 찾아오는 시기의 정신의 체계를 우울적 자리(depressive position)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편집 분열적 자리가 끝난 4~6개월부터 24개월 정도까지의 기간에 걸칩니다.


여기서 제가 번역 중인 논문 중, 소월의 한(恨)을 우울적 자리에 속한 심리적 역동으로 분석한 부분을 가져와, 소월을 죽음으로 이끈 우울과 그의 우울적 자리에 일어난 고착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학술적 근거를 제시해보겠습니다.


"소월의 한의 병인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단서 외에는, 소월의 유아기에 대해 자세히 기술된 자료가 없다. 그는 1902년에 부유한 가정에서 첫째로 태어났고, 태어난 첫 해는 순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소월이 한 살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는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정신증적 증상들에 의해 정신적으로 장애를 겪었다. 소월에게 아주 헌신적이었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을 간호하기 위해 소월을 할아버지 손에 맡겨야 했다. 소월의 초기 인생의 이러한 비극적인 가족 환경에서 소월의 한의 기원을 찾는 박목월처럼, 우리는 아기 소월이 그의 사랑 대상, 어머니의 상실로 인해 외상을 겪었음을 상상해볼 수 있다. 클라인의 체계에서 보면, 이러한 외상은 우울적 자리의 발달 단계에서 일어났고 소월의 성격의 영구적인 고착점이 되었다. ... 아기 소월은 할아버지의 눈에서 그의 잃어버린 엄마를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6)

 

소월은 우울적 자리에 있을 때 어머니라는 주 양육자를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는, 그가 그의 엄마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는데 엄마가 살아남지 못하고 정말로 죽어버린 사건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기 소월은 우울적 자리에 고착되었고,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평생을 우울감에 시달리며 우울적 자리에 속한 이슈들과 싸우는데 생의 에너지 중 많은 부분을 써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자신이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어서 죽은 줄 알았던 대상이 알고 보니 살아있더라'라는 희소식이 유아에게 들려옵니다. 이렇게 어머니 대상이 죽지 않고 살아있기만 한다면, 아기는 우울적 자리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보상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자신이 해를 끼쳤다고 인식하게 된 대상에 대해 보상을 해주는 경험을 통해서, 엄청나게 무거운 죄책감을 극복하고 자아가 긍정적인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죠.


"만약 유아가 환상 속에서 손상된 대상을 고쳐주고 회복시킬 수 있다고 느낀다면, 죄책감은 장애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보상 경험은 이 단계에서 고통스런 죄책감 불안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손상된 것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은 편집적 자리에서 좋은 대상의 내사와 계속적인 좋은 신체 다루기에 의존되어있다ㅡ이것들은 좋은 외적 대상에 대한 지각을 허용한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 긍정적 경험은 아이에게 자신의 공격성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다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런 느낌은 죄책감을 완화시킨다. 그러나 내사된 좋은 대상이 약하고 불안정하거나 이 단계에서의 경험이 지나치게 부정적이라면, 유아의 인격은 해결되지 않은 과도한 죄책감과 무가치감에 지배되기 쉬울 것이다." 7)


위의 볼드체로 표시해 놓은 부분이 바로 정신분석 이론 내에서, 아니 클라인의 정신분석 체계 내에서 성인 우울증의 뿌리로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클라인은 또한 성인의 연애나 사랑과 우울적 자리의 보상 경험이 깊은 관계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클라인은 성인의 삶에서 사랑할 수 있고 사랑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우울적 자리의 보상 경험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이런 경험이 없을 경우, 그런 개인은 자신의 공격성이 사랑하는 대상을 손상시키고 파괴할 것이라고 만성적으로 두려워하게 된다. 그 결과, 사랑 관계에 관한 끝없는 불확실성에 시달리게 된다. 특히 공격적 느낌이 나타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이유로 클라인은 성인의 삶에서 좋은 대상관계는 대체로 우울적 자리의 결과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동시에 그녀는 또한 성인의 삶에서 성공적인 사랑 관계는 우울적 자리에서 완성하지 못한 보상을 완성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Klein, 1937). 이러한 후기 삶에서 이루어지는 해결과 관련해서, 결정적인 문제는 초기 삶에서 보상이 완전히 가로막힌다면 성공적인 사랑 관계 자체가 아예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아기 우울적 자리에서 보상 경험이 충분히 이루어져야만, 이후의 사랑 관계가 유아기에 정지되었던 보상 능력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8)


저는 이 구절을 읽고 썸, 연애, 사랑 등을 못 하는 사람들이 모두 우울적 자리의 보상 경험과 관련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내면 안의 문제에 더해서, 우리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환경이 개인이 자유롭게 연애하고, 사랑하는 것을 크게 방해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어쨌든, 개인의 내면 차원에서, 클라인의 통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인은 계속해서 우울적 자리에 속한 우울 불안이 해결되지 못했을 때의 증상들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해결되지 못한 우울 불안의 가장 전형적인 병리는 애정 대상의 손상에 대한 만성적인 공포이며, 그 결과로 임상적 우울증(clinical depression)이 발생한다(Klein, 1935, 1937, 1940). 클라인의 모델에 따르면, 침울증 환자(melancholic)는 애정 대상을 손상시키는 것에 대한 불안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공격성을 억압한 사람이다. 우울증 환자의 가혹한 내적 자기-박해(self-persecution)는 애정 대상에게 손상을 입힌 것에 대한 자기-증오의 산물이다. 침울증 환자는 보상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즉 공격성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통해서 대상을 구하고자 한다. 우울증 환자의 자기 학대는 죄책감의 산물일 뿐 아니라, 좋은 대상을 보호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지속적인 관계는 붕괴되고 망가지는데, 그것은 그런 개인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이 애정 대상을 파괴하는 위험스런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대상에게서 만족을 경험할 수 있게 되면, 우울증 환자는 곧 애정 대상을 손상시키거나 파괴할까봐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게 된다. 그런 만족이 발생하면 개인은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따라서 우울증 증상을 나타내게 된다."9)


여기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는 단어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많이 들어보셨을 자아의 방어기제들입니다. 방어기제에는 원시적 철수, 부인, 전능통제, 원시적 이상화, 투사, 내사, 투사적 동일시, 자아의 분열, 해리, / 억압, 퇴행, 격리, 주지화, 합리화, 도덕화, 구획화, 취소, 자기비난, 치환, 반동형성, 역할역전, 동일시, 행동화, 성애화, 승화등이 있습니다.10) 특히 슬래쉬(/) 뒷부분에 나타나는 이차적(상위) 방어 과정들에 대해서 많은 분이 오해를 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방어기제들이 의식적인 사고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역할역전(reversal)'이라는 방어기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역할역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자기에게 심리적 위협을 가하는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자신의 위치를 주체에서 객체로 혹은 그 반대로 바꿔 놓는 시나리오를 실행하는 것"11)


역할역전의 대표적인 예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아기 초기에 부모로부터 좋은 돌봄을 받지 못했던, 수동적이고 무력했던 객체에 불과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좋은 돌봄을 베푸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 성인기를 거쳐 치료사가 된다." 어쩌면 많은 치료사들이 치료사가 되는 이유를 한 줄로 요약해주는 이 예제는, 의식 수준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실행된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무의식적 과정에 의해 실행된 시나리오인 것입니다. 또, 클라인이 성인의 사랑 관계를 언급했으니 얹어보자면, 매번 연애할 때마다 애인을 차버리는 우울한 기질의 개인을 상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분명 의식 수준에서는 애인을 차야 할 이유가 있어서 찬 것입니다. 애인의 어떤 점이 부족했다든지, 사소한 버릇이 매우 신경이 쓰였다든지,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 찼던 것 같은데, 그가 분명 자신을 사랑했다는 확신이 들고 자기 자신도 그를 사랑했다는 확신이 듭니다. 주변에서도 왜 헤어졌냐고 물어봅니다. 이제는 도대체 왜 헤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헤어진 연인에 대해서 (남들이 봤을 때는 지나치게) 큰 죄책감을 느끼며 이러저러한 것들을 못 해줬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혹은 헤어진 연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계기와 이유로 깊은 우울함에 빠져 몇 년이 지나도 다른 사람과 다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 지나치게 상세히 상정했습니다만, 꽤 흔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어쩌면 엄정화가 1999년 발표한 <몰라>가 이런 상황 속 정서를 잘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런 경우 최초에 헤어지게 된 이유 자체가 의식 수준에서의 생각이나 결심 따위가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서 자기 자신을 '애정 대상을 파괴하는 위험스러운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무의식적 동기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이별의 구실을 만들어내서 생긴 비극이죠. 



참고문헌

1) 스테판 밋첼, 마가렛 블랙, <프로이트 이후>, 159p. 

2) 스테판 밋첼, 마가렛 블랙, <프로이트 이후>, 181p. 

3) 프랭크 써머즈, <대상관계 이론과 정신병리학>, 132p. 

4) 미국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용어사전>, 92p.

5) 프랭크 써머즈, <대상관계 이론과 정신병리학>, 133p. '

6) 이재훈, <The Exploration of the Inner Wounds--Han>, 76p.

7) 프랭크 써머즈, <대상관계 이론과 정신병리학>, 134p.  

8) 프랭크 써머즈, <대상관계 이론과 정신병리학>, 134-135p. 

9) 프랭크 써머즈, <대상관계 이론과 정신병리학>, 139-140p. 

10) 낸시 맥윌리엄즈, <정신분석적 진단: 성격구조의 이해>, 11p. 

11) 낸시 맥윌리엄즈, <정신분석적 진단: 성격구조의 이해>,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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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 글의 제목을 <우울감 극복을 위한 멜라니 클라인>이라고 정했었습니다. 듀게에서 이제는 잘 볼 수 없게 됐지만, 오랜 전통이었던 신변잡기적인 자기 고백+고민 글들을 통해, 우울감을 토로하시는 분들이 많았었고, 저 역시도 꽤나 우울한 성향의 사람이어서, 항상 언젠가 이런 내용에 대해서 함께 나눠봐야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내용이 생각 외로 많아져서, <멜라니 클라인과 우울 ~극복 편~>은 다음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먼저 클라인의 발달이론 상에서 이상적인 경우, 아기가 '보상 경험'을 통해 어떻게 우울적 자리를 극복하고 '성숙한 우울적 자리'(이때의 주된 정서는 감사와 만족, 창조 의욕입니다.(와... 벌써부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드네요.))로 들어가는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또 이런 성격 발달과정을 이상적으로 거친 성인의 특징을 기술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정신분석적으로 지향된 심리치료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클라인 학파의 입장에서 우울감으로 괴로워하거나, 우울을 앓고 있는 내담자를 어떻게 돕게 되는지 그 과정을 기술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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