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9 09:45
- 2019년작이고 상영 시간은 한 시간 48분.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적겠습니다.
(그냥 '첫사랑' 이라고 제목 달아서 개봉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요.)
-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 받고 고아로 자란, 할 줄 아는 게 어쩌다 얻어 걸린 권투 밖에 없어서 별 의욕도 야망도 없이 권투를 하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제법 잘 해요. 그러다 어느 날 허접한 상대방이 슥 내민 럭키 펀치에 K.O.를 당해 버리고, 혹시 몸 어디가 안 좋은가 해서 찾은 병원에서 뇌종양 말기 판정을 받습니다.
요 젊은이의 신세가 팔자 좋아 보일 정도로 인생 꼬인 젊은이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빠에게 학대 당하며 자랐는데 이 망할 아빠는 본인 사채빚 대신 딸을 야쿠자에게 팔아 버린 거죠. 그래서 감금 성매매로 빚을 갚는 생활을 하다가 마약 중독까지 되었네요.
그런데 이 둘이 살고 있는 동네의 상황 또한 매우 좋지 않습니다. 야쿠자와 중국 마피아가 나와바리 지배권을 두고 혈전을 벌이는 중인데... 그 와중에 야쿠자 한 놈이 부패 형사 한 놈을 끌어들여서 조직의 마약을 빼돌리고 은퇴할 계획을 세워요. 그리고 그 계획이 꼬이면서 주인공들이 말려들어 버리고, 결국 주인공들은 두 범죄 조직과 배신자 콤비에게 영문도 모르고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팔자 기구 주인공 콤비)
- 일단 감독이 미이케 다카시잖아요. 그리고 저 위의 포스터를 보세요. 그럼 이 영화가 어떤 영화가 될 것 같으십니까.
거두절미하고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미이케 다카시 버전 '트루 로맨스' 비스무리한 물건입니다.
피칠갑에 사지 절단되는 폭력이 난무하지만 기본 장르는 코미디이고, 그 핵심에는 미래 없어 보이는 청춘들의 로맨스가 자리잡고 있는 거죠.
근데 그 '트루 로맨스'의 작가가 타란티노이고, 이 양반은 본인이 미이케 다카시의 팬이라고 떠들고 다니며 미이케 다카시 영화에 출연까지 했었죠.
그리고 이 영화를 보다 보면 타란티노 스타일의 영향 같은 게 느껴져서 괜히 좀 재밌었습니다. 돌고 도는 영향이랄까...
(특히 이 분은 아무리 봐도 딱 '킬빌'의 그 일본 여고생 포지션인지라. ㅋㅋ)
- 그러니까 결국 기본적으로는 일본 야쿠자, 중국 마피아, 배신자 콤비 & 주인공 둘. 이렇게 네 팀으로 나뉘어져서 서로 지지고 볶고 얽히고 섥히고 하면서 점점 일이 복잡해지고 커지고 하면서 상황이 미쳐 돌아가는 범죄, 스릴러물의 외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가이 리치가 옛날에 잘 만들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 스타일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냥 타란티노 초기작들 스타일이라고도 볼 수 있죠. 거기에다가 미이케 다카시 스타일의 과장된 유혈 폭력 묘사를 곁들이고 톤을 (많이 썩은) 코미디로 잡아 놓은 것인데.
놀랍게도(?) 폭력 묘사 쪽은 상당히 얌전한 편입니다. 시작부터 잘려나간 사람 머리통이 굴러다니는 영화 치고는 끔찍한 폭력 묘사가 적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끔찍한 폭력들이 자주 나오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가끔 대놓고 보여줄 때도 그걸 개그로 승화시켜 버리는 거죠. 그래서 의외로 그렇게 보기 부담스러운 영화는 아닙니다.
(배신 야쿠자, 부패 형사 콤비. 얘들은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개그만 합니다.)
-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 두 젊은이 주인공들은...
이 분들 또한 좀 재밌는 게. 일단 영화 런닝타임의 절반이 지나갈 때까지 얘들은 전혀 상황 파악을 못 해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쫓기고 있다는 걸 모릅니다. ㅋㅋ
그래서 정말 느그읏하게. 차분하게 서로를 알아가고 호감을 키워가는 단계를 거치죠. 뭐 어차피 이게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라서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진 않습니다만.
근데 놀랍게도 이게 생각보다 그럴싸해요.
뭐 대단한 일생의 로맨스 같은 것도 아니고, 둘 사이에 대단한 드라마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중반까지는요.) 그냥 둘이 보기가 좋습니다.
일단 캐릭터들이 좋아요. 설정 자체는 뻔한 캐릭터들이지만 일본 영화들 특유의 화려한 과장이나 허세 없이 담백하게 보여주니 쉽게 정을 붙이고 귀여워하게 되더군요.
야악간 미츠루 아다치 생각이 나는 덤덤한 애들인데. 그러면서 얘들이 하는 행동이나 선택들도 대체로 납득 가능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져서 막판에 나름 장한 행동을 하는 장면에선 정말 갸륵하구나! 라는 생각마저 언뜻 들고 그랬습니다. ㅋㅋ
그제서야 다시 영화 제목 생각이 나더라구요. 첫사랑. 정말로 이 영화는 훼이크 하나 없는 청춘남녀의 풋풋한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건데 감독의 명성 때문에 의심했지 뭐에요. ㅋㅋㅋㅋ
(청춘 로맨스!!!)
- 그리고 또 무슨 할 얘기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살벌한 범죄. 피칠갑 폭력. 거기에 순진무구 청춘남녀 로맨스에 벙~ 찌는 개그 장면들이 마구 뒤섞여 흘러가는 영화인데도 신기할 정도로 톤이 튀지 않습니다.
왜 막 '어떠냐 잔인하지!! 어떠냐 골 때리지!! 어떠냐 애절하지!!!' 이런 식으로 폭주하기 좋은 설정과 이야기인데 저언혀 그러지 않아서 신선한 느낌이 들어요.
특히나 모든 등장인물이 한 데 모여 벌이는 클라이막스의 액션씬 같은 부분은 정말 비현실적인 장면들의 연속인데도 '오바'한다는 느낌이 별로 없고 그냥 조화롭습니다.
뭐라 설명은 못 하겠고 그냥 아... 미이케 다카시 아저씨가 나이 헛 먹은 게 아니구나. 그렇게 다작을 하며 괴작과 졸작을 생산해내는 와중에도 본인 짬밥 까먹지 않고 기본기는 충분히 유지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 찍을 당시 한국 나이로 딱 60세였는데요. 아직은 사람들 기억에 좋게 남을만한 영화를 한참은 더 뽑아낼 수 있겠다 싶어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기발할 게 있었나? 싶은 영화지만 그래도 이 장면은 확실히 웃겼으니 인정해드리겠어요.)
- 대충 종합하자면 전 이렇게 봤습니다.
감독의 악명(?)과 포스터의 살벌함과 달리 대부분의 관객들이 웃고 즐길만한 성격의 대중적인 코믹 로맨스 영화입니다.
물론 좀 악취미스런 장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히 곱고 여리며 순수한 성정의 관객이 아니라면 다 감당 가능하구요.
과장된 폭력 & 액션도, 코미디도, 로맨스도 모두 평균 이상을 해주며 그 결합도 자연스러운, 꽤 괜찮은 완성도의 오락물이었어요.
뭣보다 일본 영화 특유의 격한 비장미와 과도한 갬성 폭발 없이 담백한 느낌이라 더 좋았네요.
그냥 제 쿨타임이 지나서 '그럼 이제 한 번 또 괴상한 일본제 불량 식품을 섭취해볼까' 하고 본 영화였는데, 기대보다 훨씬 만족하며 잘 봤습니다.
다만... 무슨 걸작이라든가, 되게 강렬하게 뭐가 남는 그런 영화는 아니라는 거. 걍 가벼운 오락물이에요. 그 이상은 기대 마시길. ㅋㅋ
(장르는 코믹, 로맨스입니다!! 정말이라구요!)
+ 갑자기 또 '트루 로맨스'가 보고 싶어지네요. 본문에서 그거랑 비슷하다고 주절주절 적어 놓았지만 사실 그 영화 내용, 장면들은 거의 다 까먹었거든요. 뭐 그 시절에 한 번 보고 이후로 다시 보지 않았으니 그럴만도 하죠. 그게 무려 93년 영화이지 말입니다? ㅋㅋㅋ
++ 생각해보면 주인공이 권투 선수... 라는 것부터가 좀 일본 아재 느낌이 나죠.
미츠루 아다치나 다카하시 루미코 같은 이제 환갑 넘긴 만화가들이 좋아하던 소재이기도 하구요. ㅋㅋ
대략 그 세대 일본 사람들의 젊은 시절에 권투 인기가 많았나 봅니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70~80년대까지 인기였던 기억도 있구요.
2021.05.29 10:29
2021.05.29 13:17
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로맨스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잔인하고 보기 고통스러운 장면은 없어요.
글에도 적었듯이 뭐 머리통 굴러다니고 팔뚝 잘려나가고 그러긴 하는데 그런 장면이 그리 많지도 않고, 또 나와도 다 가볍게 지나갑니다.
나중에 한 번 시도해보세요. ㅋㅋ
2021.05.29 10:45
이 감독 영화는 딱 하나 봤어요. 박찬욱 감독과 또 다른 중국 감독과 만든 옴니버스 영화였는데 셋 다 좋았던 희미한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박찬욱 감독 부분은 임원희 땜에 많이 웃기기도 했어요. 상황은 어처구니 없이 살벌했지만. 이병헌이 맡은 감독 설정이 박 감독 자신이 자주 듣던 얘기 아니었을까 생각했던 기억도 납니다. 좀 재수없죠.
'쓰리,몬스터'라는 영화인데 좀 전에 찾아보니 미이케 다카시 감독 부분에선 의붓아비로 와타베 아츠로가 나왔었네요. 예전에 관심 갖던 배우인데 이 영화의 출연분은 기억도 안 나다니. 뇌의 많은 세포가 죽었나 봅니다.ㅠㅠ
2021.05.29 13:20
쓰리, 몬스터에서 '박스' 였나 '더 박스' 였나 그랬죠. 재밌거나 막 무섭다기보단 일본적 영상미 + 불쾌하고 기괴한 분위기로 승부하던 영화로 기억합니다. 감독 이름 땜에 당연히 피칠갑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안 나와서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나요. ㅋㅋ
뇌세포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그 영화 감상만 기억나지 내용이나 특별한 장면 같은 건 하나도 기억이... ㅠㅜ
2021.05.29 11:55
밑에서 둘째 짤 한국 배우와 영화가 겹쳐 보이는 건 누가 누구를 따라한 것일까요. 그럴싸한건 대부분 일본 따라했다는 말이 나오던 시절이 있기는 했는데요 권투선수인데 뇌종양인건 다른 곳에서 두어본 본거 같은데 기억이 안나네요
2021.05.29 13:25
어느새 그냥 서로 비슷비슷해져 버린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영화 쪽으론 이제 한국이 더 잘 나가긴 하지만 그동안 (말씀대로) 일본 것들 많이 보고 배운 것도 무시 못 하니까요.
시한부 내지는 뭐 어딘가 격하게 아픈 권투 선수... 얘기는 옛날에 정말 많았던 것 같아요. 권투가 한국이나 일본에서 인기 스포츠였던 시절에요.
2021.05.29 15:35
저도 다카시 영화는 딱 한 편 봤어요. 무슨 영화제에서 본 이조였죠. 줄거리는 요약이 안되고, 비주얼이 환타스틱했던 기억. 사무라이가 팔을 절단하면 나비떼가 나왔다든가. 난삽하기 짝이 없는데 어디로 튈지 몰라 계속 보게 만드는 비주얼 무의식의 항연. 하여간, 재밌게 봤어요. 근데 호러 좋아해도 오디션이나 임프린트는 못보겠더군요. 요건 담백한 코미디라니 끌리네요.
2021.05.29 15:47
2021.05.29 17:42
2021.05.29 17:58
생각해보면 '착신아리' 같은 영화도 참 별 거 아닌 스토리 가지고 꽤 재밌게 만들어낸 영화였죠. 전반적으로 노골적으로 의도한 '링' 짝퉁 같은 이야기였지만 클라이맥스의 방송국 장면은 아직도 꽤 기억에 남아요.
사실 미이케 다카시 영화는 아주 유명한 대표작격 영화들 말곤 본 게 거의 없는데, 이참에 좀 평가 그저그렇고 부실해 보이는 영화들도 볼 수 있는 건 좀 감상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뭐, 볼 수 있는게 그렇게 많지는 않더라구요. 그나마 있는 건 대부분 일본 만화 실사판들이라... 하하하;
재미있는 글 잘 읽었어요.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폭력 묘사가 심한 걸로 알고 있어서 잘 안 보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이 영화도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안 보고 있었어요. 잔인한 장면을 보는 걸 안 좋아해서요. 특히 고어 장면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니 생각보다 안 잔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보고 싶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