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가기 싫은 날' 관련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이 시 때문에 듀게도 모처럼 활성화된 것 같고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네요.


1. 시인가?
당연히 시라고 생각합니다. 시의 정의를 내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행과 연의 구분이 있고 운율을 맞추어 쓰면 시라고 할 수 있고, 산문시처럼 운문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더라도 내용 표현에 있어서 시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시라고 볼 수 있죠. 시적인 표현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비유와 상징이겠고요.

'학원 가기 싫은 날'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고 내용 표현에 있어서도 시적인 방식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비유를 사용했기 때문이죠. 학원 가기 싫은 마음의 정도를 엄마를 잔혹하게 죽여서 먹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죠. 지은이가 싸이코패스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비유'로 보지 않는 것이고, 정말로 이 애가 학원 가기 싫어서 엄마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다면 그 시를 엄마에게 보여주었을 리가 없죠.


2. 예술인가?
그렇다면 이 시를 예술로 보아야 하는가? 일단 이것은 '모든 시를 예술로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연결되는데, 시는 예술의 하위 장르이므로 당연히 이 시도 예술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가 예술성이 뛰어난가, 미학적으로 뛰어난가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죠. 예술이라고 인정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 혹은 재능이 뛰어나므로 예술로 인정해 줘야 한다, 이것은 그냥 개인적인 취향과 판단의 문제일 뿐입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쓰여진 시들 중 함량 미달로 보이는 시들도 다 예술입니다(...) 내 눈엔 쓰레기여도 남이 보기엔 보물일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학원 가기 싫은 날'이 미학적인 면에서 뛰어난 시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회 고발'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뛰어난 시라고 생각합니다. '학원 가는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에 대해 그야말로 이 사회에 경종을 울렸죠. 그런 면에서 예술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3. 예술이면 문제가 없는가?
이건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공익을 현저하게 침해할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제한할 것인가? 누가 그 기준을 정할 것인가? 이것은 어려운 문제죠. 소위 '사회 통념'에 비추어 문제가 되는 것을 규제해야 하는데 사회 통념이라는 것 자체가 불분명한 개념이니까요. 어쨌든 이런 '사회 통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법'이므로 원칙적으로 법에 따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법적인 규정으로 살펴보면, 메피스토 님이 이 시와 비교하신 <노이즈>는 아동을 소재로 한 음란물이므로 (만화가 아청법에 해당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불법적입니다.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이 봐도 문제가 되는 내용인 거죠. '학원 가기 싫은 날'은 불법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존속 살해라는 끔찍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존속 살해를 다룬 매체물은 불법이 아니죠. 다만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요건에는 해당합니다(청소년보호법 시행령에서는 존속 살인을 개별 심의 기준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동시집'으로 출간된 것은 에러였고, 심의를 요청했다면 유해물 판정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인을 대상으로 출간했다면 이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겠죠.


4. 문학에는 왜 등급제가 없는가?
문학에 등급제를 도입하자는 뜻은 아니고요,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졌습니다. 등급제가 영화, 게임 등에는 있는데 문학에는 왜 없는 것일까 하고요.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영상 관련 매체에 대해서만 등급제가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텍스트로 접하는 것은 영상으로 접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덜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까요?


5. 이 아이는 정말 괜찮은 건가?
이 의문은 처음부터 들었습니다. 이순영 어린이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상태가 아닌가 하는 거죠. 시적 화자와 작가의 분리 문제에 대해 여러 분이 지적하셨는데, 사실 그건 모르는 문제입니다. 분리되지 않았다고 볼 근거도 없지만, 완벽한 분리가 되었다고 볼 근거도 없습니다. 아이가 정말 '시인'으로서 예술 창작 행위를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엄마에 대한 분노를 시를 쓰는 방식으로 표출한 것일 수도 있죠. 전자라면 괜찮겠지만, 후자라면 상담과 치료가 필요해 보입니다. 10살 아이일 경우에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이 시를 읽고 '잘 썼다'고 칭찬해준 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시를 쓰지 말라고 했다는데, 제가 엄마였다면 당장 학원을 그만 보내고 좋아하는 시나 실컷 쓰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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