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1 15:26
'학원 가기 싫은 날' 관련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이 시 때문에 듀게도 모처럼 활성화된 것 같고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네요.
1. 시인가?
당연히 시라고 생각합니다. 시의 정의를 내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행과 연의 구분이 있고 운율을 맞추어 쓰면 시라고 할 수 있고, 산문시처럼 운문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더라도 내용 표현에 있어서 시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시라고 볼 수 있죠. 시적인 표현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비유와 상징이겠고요.
'학원 가기 싫은 날'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고 내용 표현에 있어서도 시적인 방식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비유를 사용했기 때문이죠. 학원 가기 싫은 마음의 정도를 엄마를 잔혹하게 죽여서 먹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죠. 지은이가 싸이코패스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비유'로 보지 않는 것이고, 정말로 이 애가 학원 가기 싫어서 엄마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다면 그 시를 엄마에게 보여주었을 리가 없죠.
2. 예술인가?
그렇다면 이 시를 예술로 보아야 하는가? 일단 이것은 '모든 시를 예술로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연결되는데, 시는 예술의 하위 장르이므로 당연히 이 시도 예술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가 예술성이 뛰어난가, 미학적으로 뛰어난가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죠. 예술이라고 인정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 혹은 재능이 뛰어나므로 예술로 인정해 줘야 한다, 이것은 그냥 개인적인 취향과 판단의 문제일 뿐입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쓰여진 시들 중 함량 미달로 보이는 시들도 다 예술입니다(...) 내 눈엔 쓰레기여도 남이 보기엔 보물일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학원 가기 싫은 날'이 미학적인 면에서 뛰어난 시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회 고발'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뛰어난 시라고 생각합니다. '학원 가는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에 대해 그야말로 이 사회에 경종을 울렸죠. 그런 면에서 예술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3. 예술이면 문제가 없는가?
이건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공익을 현저하게 침해할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제한할 것인가? 누가 그 기준을 정할 것인가? 이것은 어려운 문제죠. 소위 '사회 통념'에 비추어 문제가 되는 것을 규제해야 하는데 사회 통념이라는 것 자체가 불분명한 개념이니까요. 어쨌든 이런 '사회 통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법'이므로 원칙적으로 법에 따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법적인 규정으로 살펴보면, 메피스토 님이 이 시와 비교하신 <노이즈>는 아동을 소재로 한 음란물이므로 (만화가 아청법에 해당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불법적입니다.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이 봐도 문제가 되는 내용인 거죠. '학원 가기 싫은 날'은 불법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존속 살해라는 끔찍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존속 살해를 다룬 매체물은 불법이 아니죠. 다만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요건에는 해당합니다(청소년보호법 시행령에서는 존속 살인을 개별 심의 기준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동시집'으로 출간된 것은 에러였고, 심의를 요청했다면 유해물 판정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인을 대상으로 출간했다면 이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겠죠.
4. 문학에는 왜 등급제가 없는가?
문학에 등급제를 도입하자는 뜻은 아니고요,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졌습니다. 등급제가 영화, 게임 등에는 있는데 문학에는 왜 없는 것일까 하고요.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영상 관련 매체에 대해서만 등급제가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텍스트로 접하는 것은 영상으로 접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덜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까요?
5. 이 아이는 정말 괜찮은 건가?
이 의문은 처음부터 들었습니다. 이순영 어린이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상태가 아닌가 하는 거죠. 시적 화자와 작가의 분리 문제에 대해 여러 분이 지적하셨는데, 사실 그건 모르는 문제입니다. 분리되지 않았다고 볼 근거도 없지만, 완벽한 분리가 되었다고 볼 근거도 없습니다. 아이가 정말 '시인'으로서 예술 창작 행위를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엄마에 대한 분노를 시를 쓰는 방식으로 표출한 것일 수도 있죠. 전자라면 괜찮겠지만, 후자라면 상담과 치료가 필요해 보입니다. 10살 아이일 경우에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이 시를 읽고 '잘 썼다'고 칭찬해준 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시를 쓰지 말라고 했다는데, 제가 엄마였다면 당장 학원을 그만 보내고 좋아하는 시나 실컷 쓰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2015.05.11 15:29
2015.05.11 15:35
아, 안 다녀도 좋다고 했군요. 다행이네요.
2015.05.11 15:51
2015.05.11 16:29
부모에 대해서는 뭐 전혀 정보가 없어서..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2015.05.11 15:58
내용에 대체로 동감하지만 5번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정신병이나 사이코패스는 아니겠지만 정신과 치료는 받아봐라는 말씀이신가요?
표현의 강도외에 인터넷 댓글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알 수 없는 것을 가정해서 정신분석을 하진 맙시다.
시와 예술에 대한 예의만큼 작가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를 가져야 하진 않을까요?
2015.05.11 16:02
저는 가족상담이나 아동심리상담치료 같은 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상태가 심각한 것으로 밝혀지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수도 있겠죠(정신과 치료를 너무 안 좋게 보시는 듯?). 그리고 전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제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2015.05.11 16:11
아이에게 충치가 있으면 치과치료를 하고 심리치료가 필요하면 심리치료나 상담을 하겠지요. 아이의 부모가.
문제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수 없으면 말을 안하는게 맞습니다.
누군가의 글을 보고 정신과 치료 받아보란 얘길 하는게 한국에선 매너의 영역 안이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2015.05.11 16:16
아이에게 충치가 있는지 없는지 알기 위해 치과 검진을 받듯이, 아이에게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부모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거죠.
제가 저 아이나 아이 부모에게 직접 '정신과 치료 받아보세요'라고 한 거면 '매너'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ㅎㅎ) 전 그냥 듀게에 제 생각을 적은 것뿐입니다...;
2015.05.11 16:24
부모도 모른다면 일면식 없는 우리는 더 알리가 없겠지요.
사이코 패스라고 욕하는 댓글들도 각자 자신의 생각을 적은 것뿐이겠지요.
저라면 그냥 입닥치고 있겠다고 제 생각을 적겠네요.
2015.05.11 16:35
기사에 달린 댓글은 당사자가 볼 확률이 높죠. 그 어머니도 애한테 댓글들을 보여줬다고 했고요.
그러면 이 글도 검색해서 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겠지요(...) 만약 아이나 아이 가족이 이 글을 보게 되고 불쾌하시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015.05.11 15:59
이 글에 대체적으로 공감합니다.
대체적으로 라는 표현을 굳이 쓴건 4,5번 같은 의문을 가져본적은 없기 때문에...
덕분에 이 글을 통해서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영상은 직접적인 장면을 고대로 보여주는 방식이기때문에 독자가 한번 걸러낼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 때문이아닐지.
2015.05.11 16:30
아무래도 그런가 봐요. 이 시가 문제가 된 거에 삽화의 역할도 컸던 것 같고. 삽화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을 수도;
2015.05.11 16:18
4번은 확실히 궁금하네요.
출판사가 자체적으로 15세나 19세 딱지를 붙이는 경우는 많은데 비해, 영등위와 비슷한 위치라고 보이는 간행물윤리위원회는 등급을 나누기 보다는 유해간행물을 선정하는 선까지만 활동하는 것 같고 말이죠.
(청소년 유해/유해간행물을 지정하니 비유해간행물을 포함해 3등급으로 나누는 거라고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2015.05.11 16:28
청소년보호법이 나라마다 다른데, 영상물의 경우 독일은 우리나라와 같이 연령등급제와 유해물 판정을 둘 다 사용하고 있고, 프랑스는 등급제는 없고 유해물 판정만, 반대로 영국, 캐나다, 호주는 등급제만 있다는군요. 우리나라는 매체별로 어떤 건 등급제, 어떤 건 유해물, 등급제일 경우에 연령 기준도 제각각이고 심의기관도 다르고 좀 통일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2015.05.11 16:19
그 시 구절들이 그렇게나 논란을 일으킬 만한 건지 아직도 아리송해요.
그 시가 언론에 나올 당시 삽화가 같이 나왔었죠. 어쩌면 사람들은 시의 구절구절을 느끼기보다는 삽화를 보고 더 충격을 받은게 아닐까 싶다는.
저는 그 시는 시도 맞고 예술도 맞고 아이의 명민함도 보이고 나쁘지 않게 보여요.
그런데 시의 은유적 표현을 직접적이고 충격적으로 묘사한 삽화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죠.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오백원짜리 아이들용 미스터리 미니북에서나 볼 듯한 그림같았어요. 전 삽화가 미스였다고 봅니다
5번 질문은... 시는 일상적인 언어로 상식적인 표현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아이가 괜찮은 건지까지 타인들이 걱정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않나 싶네요.
2015.05.11 16:25
저도 삽화 때문에 사람들이 더 충격을 받았다는 데 동의해요. 시각적인 효과가 역시 강렬한 걸까요.
5번은 저도 오지랖인 것 같긴 합니다만,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서 치료를 하는 경우가 있듯이 시를 통해서도 아이의 외상이나 스트레스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물론 저도 전문가가 아니니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순 없고요.
2015.05.11 16:54
2015.05.11 17:56
2015.05.11 18:49
2015.05.12 09:20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죠. 저도 다른 시랑 인터뷰를 좀 더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2015.05.11 17:51
[개인적으로는 '학원 가기 싫은 날'이 미학적인 면에서 뛰어난 시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회고발'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뛰어난 시라고 생각합니다.] ←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전 지금의 초딩들은 우리와 다른 인류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불특정다수에게‘ 말 걸고 ‘글이란 형태로‘ 자기 생각,감정 발설하면서 자라온. 사회고발의 장은 초딩들의 커뮤니티, 포털댓글들에 널려있을 수도. 이 소녀는 단지 시 쓰는 능력, 책 내주는 엄마를 가진 덕에 어떤 도발성을 선점한 건지도. 이 시가 특별해지려면 이 소녀가 시를 (진부하지 않게) 좀더 잘 썼어야. 컴퓨터시대 이전의 초딩이 이런 시를 썼다면 발화한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를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니까요.
2015.05.12 09:23
지금 초딩들이면 누구나 이런 정도의 시는 쓸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다 쳐도 다른 아이들은 쓰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썼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요. 어떤 예술작품에 대해서 '저런 건 나도 하겠다'라고 누구나 생각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 일을 처음 시도하는 사람이 예술가인 거죠.
2015.05.11 17:53
2015.05.12 09:25
이번 일을 겪으면서 아이랑 가족이 많이 힘들 텐데 그래도 강한 것 같아 보여 다행이에요. 댓글을 보여줬는데도 아이가 '그래도 난 내 시가 좋아'라고 했다죠? 저도 모쪼록 아이가 계속 시를 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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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엄마도 학원을 안다녀도 좋다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아이는 괜찮은 것 같은데 그 엄마는 안괜찮은 것 같다에 한 표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