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가기 싫은 날에 난 엄마를 죽이고 내장을 파먹는다 뭐 이런 내용의 시가 실린 동시집이 출간돼서 파장이 일었다고 하죠.




저 시가 예술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았다 뭐 이런 비판도 있는데, 재밌는 건 그렇게 예술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았으면서도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남겼다는 점에서 이 시는 모든 문인이 한 번 쯤은 꿈꿔볼 만한, 사회에 대해 충격을 가져다준 시라는 거죠. 물론 저거야 가십거리를 양산하고 소비하기 위해서 대개의 경우 연예인의 구설수나 사생활에 대한 기사를 서로 베껴 써대는 인터넷 언론이 저 시에 대한 기사를 양산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사실 저 시가 논란이 되는 걸 보고 생각난 게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카프카가 했던 말이죠.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책은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이런 얘기였죠? 물론 저 시가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저런 표현을 쓰는 것은 과대 평가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저 시만큼 요즘 사람들에게 회자된 시가 어딨을까요? 저게 어느 정도는 황색 언론의 힘을 입었다고 하더라도요.




하나는 정성일이 썼던 글의 일부분인데.. (http://php.chol.com/~dorati/web/etc/edu200601.htm )




물론 영화는 환상을 제공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현실은 여기 있는데 영화는 저기를 그리는 것이다. 그때는 영화는 일종의 기만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릴 때, 나는 화가 난다. '거리에 나가 보십시오. 당신은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거리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여기에 앉아 콜라와 팝콘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십니까?' 


  다른 하나는 현실은 여기 있는데 영화는 그 앞, 혹은 그 뒤에서 일종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 주는 충격에 대한 일종의 흉내내기이다. 그것이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그런 영화를 두고 조안 콥젝은 일종의 자해행위라 불렀다. 물론 자해를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손가락이 잘려 피가 뚝뚝 흐르는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나 다행인 것은 자해가 자살은 아니라는 점이다. 손가락을 자른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모든 자해는 자살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그때 그것을 막아야 한다. 자해를 하고 있는데도 돌보지 않으면 그 다음은 죽는 도리밖에 없다. 말하자면 영화의 역할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영화로 끝나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 죽어 가는 흉내를 내고 있는 데도 외면하고 만다면 그 다음에는 그것의 실재와 만나야 한다.




정성일이 이어서 말하길 자신이 청소년들이 만든 단편 영화들을 심사하는 자리에 가게 되었을 때 만나는 작품들 중에서 적잖은 것들이 학교를 폭파하거나 학생들이 교사들을 공격하거나, 왕따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반쯤 죽여버린다거나 하는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도대체 얼마나 학교를 증오하기에 이런 영화들을 만든 건지 교사들이 한 번쯤 모여서 이 영화들을 감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덧붙여서 '학원 가기 싫은 날'의 잔혹성 논란이 가중된 것, 사람들이 저 시에 질색을 한 이유 중에 하나는 저 시가 그만큼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물론 저게 동시집에 수록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요즘 세상에, <악마를 보았다> 같은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어린 아이들이 보는 괴담 만화책엔 '학원 가기 싫은 날'에 실린 삽화와 비슷한 수준의 삽화가 실리는 세상에, 사람들이 저걸 걍 웃어넘기거나, 위에서 말한 영화나 만화를 소비할 때처럼 걍 포르노를 소비하듯이 소비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게 그만큼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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