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강남역 사태 발발 후 듀게에서 어떤 분이 딴 사이트의 좋은 글을 소개해 주신적이 있습니다. 그 사이트를 둘러 보다

거기서 분화된 조그마한 사이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트의 어느 유저께서 생각해 볼만한 글을 올리신 게 있습니다.


망설인 이유는 그 작성자 분께서 듀게도 눈팅하시는 듯 한데 제가 거기에 가입이 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퍼가도 되는 지 여쭈어 보지 않아서입니다.

아 물론 저도 어제부로 거기에 가입하려고 신청은 해 둔 상태입니다. 혹 이글을 보시더라도 널리 해량해 주셨으면 합니다. 해당 사이트에 민폐일지 

몰라 그냥 전체 복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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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세계에도 호적 등본이 있다면 
제 출생지칸에는 D모 작가/영화평론가의 개인 사이트 메인게시판이 적혀 있을 겁니다.
2002년경 처음으로 제로보드형 커뮤니티라는 것의 존재를 알았고 
영화와는 전혀 무관한 동기로 (월드컵 불판을 보겠다고;;) D게시판에 가입해서 쭈욱 10년 넘게 놀았죠. 

제가 다른 커뮤를 거의 안 해서 비교하기는 힘듭니다만
2000년대 말까지는 이곳이 '리버럴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좀 있었습니다. 
극우는 빼고 온건 우파부터 극좌까지 다양한 정치성향의 유저들이 
(동등하지는 않지만 최저선은 지키는 수준으로) 시민권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시민권의 인정'이란 말의 뜻은, 어떤 소수 성향의 유저가 공격을 받았을 때 
사안에 무관하게 공격자에 대해 반드시 역공이 들어오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주인장의 성향이 성향이니만치 
게이/레즈비언 유저와 페미니스트, 사회적 소수자들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강했습니다. 
'발언권이 강했다'는 말의 뜻은, 
그런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과 결부된 컨텐츠를 많이 생산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접근 프레임이 그들에게 호의적으로 짜여져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리쌍 사태 같은 문제가 터졌을 경우, 
2000년대 D게시판에서였다면 세입자와 맘상모에 좀더 관용적인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인문사회예술 계열 대학생/대학원생/강사들이 많이 들어왔고, 이과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팟모님이나 구모님을 보면 D게시판 전성기가 떠오릅니다. 
그때 거기서 활동하셨으면 대화 상대가 참 많았을 텐데.

이윽고 2010년을 전후한 반동의 시대를 맞아 
정치적으로 경직되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좌파와 온건 리버럴이 대거 게시판을 떠나고
게시물과 댓글의 질과 양은 수직낙하했으며
주인장도 트위터로 이사가면서 게시판을 버리다시피 하였습니다.
저도 폐허에서 떠돌며 새로운 이주처를 이리저리 찾던 중 
평소에 잘 가지도 않던 P모 게시판에서 벌어진 엑소더스에 얼떨결에 끼어  
예상에 없던 홍찻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D게시판에 남은 것은 혼돈의 카오스뿐... 이라고 생각했지만 부자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홍차넷과 비슷하거나 좀더 높은 조회수로 버티고 있네요. 

D게시판과 홍차넷은 성비든 컨텐츠 방향이든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것은 이곳에 (문화적) 리버럴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리버럴 개개인은 진영을 가르는 강물의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자기만의 시야를 갖게 해주는 낮은 봉우리에 서고 싶어합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면 안 됩니다. 언제든지 다른 봉우리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리버럴들은 '대상에 대해 계속해서 회의한다'고 말하지만
물론 대개의 사람들은 이 봉우리와 저 봉우리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그들의 모호한 어조와 애매한 스탠스를 의심합니다.
반면에 리버럴은 강물을 사이에 두고 던지는 투석전을 극도로 싫어하며
옳고 그름의 기준선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것에 익숙합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오래 한 사람들이 리버럴이 될 가능성이 높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리버럴은 전체주의와 진영론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대단히 희귀한 (좌파보다 희귀함) 존재이므로, 심리적으로 너무나 취약해서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홀로 버티기 힘듭니다. 
많은 리버럴들이 PC한 제도를 원합니다. 제도로써 보호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제도의 적용 과정에서 불완전한 부분을 끊임없이 채워넣어야 하는 
커뮤니티 운영진의 성향이 극도로 중요합니다.
리버럴이 제도가 아닌 키배로 살아남은 극소수의 예 중 하나가 진중권 씨겠죠.
그런 단독자적 경우를 제외하고, 리버럴이 서식할 수 있는 곳이면 
좌파도 살 수 있고 우파도 살 수 있고 여성과 소수자도 서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표생물 같은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이곳과 유사한 제로보드형 모 사이트의 경우 
어떤 유저가 남긴 댓글에 그를 비난하는 비슷한 내용의 짧은 대댓글이 
일고여덟 개씩 줄줄이 달리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그것은 리버럴의 서식에 극히 위험한 표지입니다. 

D게시판에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입니다만, 남초 사이트에서 여성으로 활동하다 보니 
여초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남성들에 관해 관심을 (그리고 동지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초를 견디지 못하는 이유와 그들이 남초를 견디지 못하는 이유가 아마 비슷하겠죠.
그런 사람들은 리버럴이 살 수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오늘 D게시판에 가보니 위에 링크한 글이 올라왔는데요.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여초 게시판에서 남성 유저가 
메갈리아 이슈와 관련, 남초 게시판 분위기의 이동 맥락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고 감상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저는 상당히 타당한 설명이라 생각하고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저런 진솔한 이야기가 많아지면 좋겠다 싶었고요.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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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해 두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듀게와 같은 형태의 게시판은 어떻게 해야 잘 운영될 수 있는가 라는 데 대한 시사점과 작금 벌어지고 있는 메갈 논쟁이

리버럴(저는 이 용어를 시각이 아닌 태도로 봅니다)한 생태계와 진영논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메갈 논쟁도 두가지 차원이 

있는 데 사상 문화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옳고 그름의 문제고 후자는 그 옳음을 어떻게 현실에서 관철시켜 나가느냐는 문제입니다. 

메갈논쟁이 본격적 정치혁명이 오기 전에 오는 문화혁명의 성격인가 아니면 이미 온 정치혁명의 홍위병 성격의 문화혁명일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전자라면

명백히 진보일 것이고 후자라면 명백히 반동일 겁니다.


ps) 밑의 Metro마인드님께서 친절하게 본인글에 번호를 붙여 주셔셔 체계적으로 제 생각을 쓰기 어렵던 차에 고맙습니다. 생각 좀 하고 댓글 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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