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기적을 부르는 효령대군

2011.12.14 19:23

LH 조회 수:3451

나라의 임금이라는 게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자리이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압박을 받는 자리라 임금은 화려하게 살지만 스트레스로 새들새들 말라가다가 일찍 죽기 일쑤이지요. 그럼에도 다들 임금이 되고 싶어하니, 참으로 이상한 매력이 있는 게 권력의 자리인가봅니다.

그런데 이런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는 데는 적장자 계승 원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말인데, 이게 아주 꼭 지켜진 건 아니지요.

유교가 나라의 근본이라는 조선시대에도 많은 형들이 동생에게 (자의 반 타의반으로) 왕의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둘째, 셋째, 넷째 형들이 그랬고, 세종에게는 양녕과 효령이 있었습니다.
성종에게는 월산대군이 있었고 선조에게도 두 명의 형이 있었으며, 광해군에게는 임해군이 있고 고종의 형이자 흥선대원군의 첫째 아들인 흥친왕 이재면이 있었죠.

 

충분히 상상이 가겠지만 동생이 왕이 된 형님들의 팔자는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반역자의 누명이 씌워질까 조심조심하는 것은 물론, 오죽 못나면 왕 자릴 동생에게 빼앗기냐, 라는 퉁박을 은연 중에 받았죠. 요즘처럼 형님 예산이라면서 돈 턱턱 받고, 일개 보좌관이 9억씩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뭐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니 팔자 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 사람이야 지 꼴리는대로 사는 사람이었고요.
어떤 형님들은 왕위를 노린다는 의심을 받지 않고자 일부러 멍청한 짓을 골라서 한다, 라는 말을 듣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때론 그게 본성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사실 못난 형- 이라고 하면 다들 세종의 첫째 형이자 알아주는 망나니 양녕대군을 떠올리겠지만.
그 둘째 형인 효령대군도 어쩌면 만만치 않았습니다. 양녕대군의 패악질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이 자리에선 효령대군의 말썽을 이야기해보지요.

 

양녕대군이야 이리저리 깽판 놨으니까 폐세자 당한 것이지만, 순서 상 둘째인 효령대군도 문제가 되었던 거지요. 뭐 선조 시대 즈음의 야사는 효령대군은 양녕대군의 잔소리에 깨달음을 얻고 출가해서 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고 결혼하고 아들 일곱 낳고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럼 왜 효령대군은 왕이 되지 못했는가. 태종은 "효령대군은 술을 못하니까."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임금으로 연회를 진행해야 하는데 술을 못 마시면 문제라는 거지요. 하여간 이놈의 나라는 위나 아래나 다들 술 푸는 것으론... 이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후로 세종시대에 나타난 효령대군의 행동으로 볼 때, 그 사람이 왕 되었으면 나름, 아니 많이 곤란했을 것 같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태종이 사람보는 눈은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세종이 왕이 된 이후. 양녕대군이 술 마시고 개 훔치고 사고치고 "자꾸 나 갈구면 너랑 안 놀아!" 따위의 편지를 셋째 동생에게 날리며 초딩스럽게 난장 피우는 동안. 효령대군은 조용히 불공을 드리며 덕을 쌓... 기는 커녕 심심찮게 사고를 칩니다.

 

세종 8년에 효령대군의 신하와 노비들이 남의 밭을 함부로 빼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도 그냥이 아니라 절에 소속된 땅을 빼앗고 곡식도 빼앗았으며 근처의 백성들의 소라던가 사람을 마구 끌어다가 농사를 짓게해서, 그 횡포가 너무 심하다보니 소요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을 두들겨패기까지 했지요.
뭐... 효령대군이야 몰랐고 밑의 사람들이 제멋대로 굴었던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져도 명색이 임금의 형님이다보니 주변 수령들도 모른 척 했던 거죠.
세종은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한 뒤 효령대군의 부하들만 처벌합니다.

 

이걸로 끝났다 했더니 2년 뒤에 또 효령대군의 신하 및 노비들이 세금을 함부로 무겁게 걷다가 걸립니다. 이것도 해당 부하들만 처벌했습니다. 21년에는 또 아주 떠돌아다니는 난민들 3~400명을 모아놓고 아주 노예처럼 혹독하게 부려먹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일들이 자주 벌어지다보니, 효령대군이 정말 몰랐을까 싶어요. 가신들이 총리실 의자도 아닌데, 돈 받는 일을 대군 몰래 단독 범행으로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어요. 물론, 이런 일에도 불구하고 양녕대군이 어그로 상당수를 끌어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효령대군은 덜 욕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진짜 일을 벌인 것은 불교행사였습니다. 명색이 유교의 국가인 조선이었지만 효령대군은 대차게 불교행사를 벌입니다. 그냥 조용히 절에 가서 불공드린 게 아니라 초대형 판타스틱 블록버스터 규모의 불교 행사를 치렀다는 데 문제였지요.
그래서 신하들이 열심히 까댔고 세종도 초기에는 그 말을 들어 불교행사를 그만두게 하기도 했습니다. ...만. 마누라 보내고 아들 둘 먼저 보내고 나고 몸도 여기저기 아픈 늘그막 세종도 불교에 기울었고, 그래서 결국 신하들의 대파업사태를 초래한 것은 유명하지요.

 

효령대군의 진정한 말썽이랄까 난장은 동생도 큰조카도 조카손주도 모두 저 세상으로 간 세조 때 벌어집니다. 잘 알려졌다 시피 세조는 불교를 좋아했지요. 그리고 아버지 세종처럼 남의 말 잘 들어주는 데 소질이 있는 임금도 아니었습니다. 하여 신하들을 찍 소리 못하게 하고 불교 드라이브를 가속하는데...

이 때 효령대군은 조카에게 이런 보고를 올립니다.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하고요.
뭔 뜬금없는 소리이겠냐 싶지만 사실입니다.

우선 세조 10년, 효령대군은 새로 짓는 원각사 - 탑골공원이라고 하는 게 더 이해가 빠르겠지요? - 에 노란 구름이 들이차고 이상한 향기가 가득 차오르고, 신성한 기운이 이곳저곳의 절에 뻗어나왔다고 보고를 올립니다. 자기 말고도 절 짓는 사람들마저 다 봤다고...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야 어따가 약을 팔아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원각사의 비문 및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및 묘사는 (뻥이) 한술 더 뜹니다.

원각사가 낙성되는 날, 세조와 정희왕후는 물론 대소신료들이 와서 축하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 여래가 둥실 나타나고, 신령한 승려들이 단상을 넘나들더니, 사리가 800개로 뿔어나고, 그 다음에 불공을 드리니 또 400개가 더 뿔어났댑니다.

...진짜루요.
물론 체세포분열인지 출아법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다음 4월 8일 탑을 세우니 벌어진 일은 더 대단했습니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사리는 세포분열을 해대고... 탑에서부터 하얀 기운이 치솟더니 이게 가닥가닥 나뉘어져서 공중에 뭉쳐 바퀴 모양을 만들어서 햇빛 색깔이 노랗게 변했답니다.
여기에 하얀 용과 학들이 구름 사이에서 노닐면서 백댄서 노릇을 했댑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감동을 받았다나요.

 

...이 글귀를 보고 뭐야 평범한 CG 합성이네, 생각하게 되는 건 역시 제가 현대인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아무튼 그래서 승려들은 물론 온갖 백성들 남녀노소가 가득 거리로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절을 하니 그 수가 억만명이었다고...(...) 이거, 아무래도 조선시대 인구에 대한 새로운 통계가 필요해집니다.
일단 뭐 사리가 늘어나고 둘째치고 그런 기적이 벌어졌다면야 대소신료들은 물론 임금도 다 봤다는 건데... 정말일까요? 정말?

 

아무튼 이 상서로운 기운은 효령대군이 처음 알려온 이후, 심심하면 튀어나와서 종실과 신하들은 바쁘게 세조에게 축하를 하곤 했습니다. 임금님 킹왕짱이어요, 부처가 힘을 더해준 것도 있지만 임금님이 무쥐 잘나서 그런 것이니 이거 기념으로 남겨요! 라고 듣는 사람이 창피해지는 아부를 늘어놓았습니다.
이런 기적 러쉬의 중심에 효령대군이 있었으니, 12년에도 또 표훈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며 보고를 올리기도 했죠.

이 쯤 되면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냥 헛웃음이 나오게 됩니다.

어쨋거나 세조는 굉장히 좋아했고 신하들은 임금님 만세! 하고 축하를 했으며, 죄인들을 풀어주고 관리들을 승진시켰으며 온갖 은상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뭐 이런 징조가 나타난 것은 그만큼 자기가 좋은 임금이고 잘 다스려서 하늘 혹은 부처님이 징조를 내려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지만.

 

...현대인은 그저 LIC를 외칠 뿐.

 

불과 수십년 전에 임금에게 개기며 파업했던 신하들은 다 어디갔냐 하시겠지만 다 죽었죠 뭐.
뭐 이해해야죠. 얼마나 마음이 찜찜하면 불교에게까지 기대야 했겠어요. 의외로 세조는 할아버지 태종처럼 신경줄이 단단하지 않았단 생각도 듭니다. 양심의 가책은 나날이 커져가고, 자식들 먼저 떠나보내고 자기도 아프고 하니 작은 큰아버지가 물어다주는 기적에 마음을 의지한 것일지도 몰라요.

...그렇다곤 해도 이쯤 되면 불교를 믿는 것 이전에 임금에게 아부하기 위한 조선판 왕권신수설이라서 말이지요.
뭐 효령대군으로서는 이렇게 해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싶었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간에 효령대군은 참 오래살았습니다. 91살까지 살았으니까요. 결국 조카증손주인 성종 때 세상을 떠납니다.
허나 재산을 굉장히 많이 끌어모았기에 죽고 난 다음 자식들이 그 재산을 노리고 대박 싸워댔다는 참으로 아름다지 못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먼 훗날인 대한민국 건국 직후, 양녕대군의 후손과 효령대군의 후손이 만나 나라를 대차게 말아먹게 되니 전자는 이승만이고 후자는 이기붕이었지요.

 

처음 효령대군의 이야기만 하려다가 원각사 이야기 때문에 글이 다른 데로 빠졌네요. 언제 탑골공원에 가실 일이 있으면 유리관 안에 잘 박제가 된 10층 석탑을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게 바로 기적을 일으킨 탑이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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