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쇠락을 그린 영화

2016.06.05 15:06

underground 조회 수:2852

엊그제 유튜브에서 조세프 본 스턴버그 Josef von Sternberg 감독의 무성영화를 몇 편 봤는데 


최후의 명령(The Last Command, 1928)이 참 인상 깊었어요.  https://youtu.be/V6YrAGVHE9A 


이 영화는 헐리우드에서 러시아 혁명에 관한 영화를 찍으려는 감독이 출연할 배우를 찾는 와중에 


자기가 러시아 황제의 사촌이자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었다고 소개해 놓은 노인의 지원서를 발견하고 


이 노인에게 장군 역을 맡겨 영화의 몇 장면을 찍는 이야기예요. 


하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이 노인의 과거사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죠.  


혁명으로 인해 사회적 지위를 잃고 사랑하는 여인도 잃고 몰락하게 된 이야기. 


주인공 노인 역을 맡은 에밀 야닝스가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더군요. 그럴만한 연기였어요. 


얼굴 표정만으로 이렇게 깊은 인상을 주는 배우는 별로 본 적이 없어요. 이 배우는 몸 자체가 연기인 것 같아요.


같은 감독의 영화 The Blue Angel(1930)에서도 술집 가수인 마를리네 디트리히에게 빠져 몰락하는 노인 역을 맡아서 


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는데 <최후의 명령>에서도 그와 비슷한, 어쩌면 더 강한 인상을 준 것 같기도 해요. 


이 영화를 본 후 에밀 야닝스가 나온 영화들을 찾아보다가 무르나우 감독의 The Last Laugh(1924)도 찾아봤죠. 


https://youtu.be/8WRnD4DZxE0  (대사가 없는 게 정말 맘에 들어요. 몸짓과 표정으로만 보여주는 진정한 무성영화) 


무르나우 감독의 이 영화는 장면 장면들을 굉장히 멋있게 찍었고 초반의 이야기는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호텔의 멋쟁이 도어맨으로 자부심을 갖고 일하던 노인이 비 오는 날 지쳐서 잠깐 쉬는데 이 모습이 마침 호텔 매니저의  


눈에 띄는 바람에 이 노인은 화장실에서 손님의 시중을 드는 업무로 떨어지게 되죠. (세면대 옆에서 수건을 들고 대기하는)


그런데 이 영화는 진행될수록 주인공의 감정이 계속 과잉되는 느낌이고 제 취향보다는 꽤 센티멘탈하게 제시되어서


오히려 별로 마음이 아프지 않았어요. 뭐랄까 영화 자체가 이미 노인의 처지를 몹시 가슴 아파하고 있으니 


보고 있던 저는 뭘 저렇게까지 슬퍼하나, 화장실 시중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절망하는 노인의 시각에 


감독이 저렇게 전폭적으로 동의해도 되는가 하는 약간 의아한 마음으로 보게 되더군요. ^^


(그래도 에밀 야닝스는 정말 멋있어요. 으쓱으쓱 구레나룻을 다듬는 모습도, 도어맨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도. 


뚱뚱한 할아버지를 보며 멋있다고 느낄 줄 정말 몰랐죠.) 


어쨌든 <최후의 명령>을 보고 몰락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느꼈던 비극적인 감정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어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도 찾아봤어요. 모르고 묻어놨었는데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일본식으로 각색한 영화더군요. 


재미있게 잘 보았고 리어 왕에 해당하는 역을 연기한 배우의 표정이나 연기도 에밀 야닝스 못지 않게 상당히 인상적이긴 했는데 


이 영화에서 노인의 몰락은 좀 인과응보적인 측면이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비극적인 느낌을 받지는 못했어요. 


노년의 몰락 혹은 쇠락은 젊은 날의 고뇌나 절망과는 다르게 인생의 끝이 보이는 시점,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한 시점에서의


비참함을 보여줘서 그런지 저를 더 슬프고 숙연하게 만들어요. 


이상하죠. 비참한 상태에 빠진, 결국 그런 상태에서 죽게 될 노인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름답게 느껴지고 그런 영화에 매혹된다는 게... 


이제까지 노인의 몰락/쇠락을 보여준 영화 중에 어떤 게 인상적이었나 생각해 보니 <선셋 대로>가 생각나더군요. 


이 영화를 본 후에도 이상하게 비극적인 느낌에 휩싸여 있었죠.  


<그랜 토리노>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는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노인 캐릭터를 


너무 쿨하고 멋있게 만들어 놔서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했지만 영화 자체에서 비극적인 느낌을 받진 못했어요.  


최근에 본 <유스>에서의 마이클 케인도 매력적인 할아버지이긴 했지만 그다지 몰락한 캐릭터는 아니라서 그런지 


쓸쓸하긴 했지만 비극적인 느낌은 아니었고요. 


생각해 보면 이성적이고 지적인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에서 그렇게 비극적인 감흥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몸은 노쇠했지만 이상한 정열을 갖고 있는 캐릭터,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고 스스로를 어찌할 수 없었던 캐릭터에서 


뭔가 비극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순식간에 세상이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비극적인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가끔 세상은 이상하게 공평한 것 같아요. 자신의 정열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몰락해 가는 이상한 인간들을 볼 때에만, 


아무 잘못 없이 순식간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볼 때에만 느껴지는 이상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있는 걸 보면요. 



노년의 쇠락 혹은 몰락을 보여주는 영화를 알고 계신가요??  


비극적인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지금 살고 있는 삶이 그렇게 나쁘진 않은 것 같기도 하니 같이 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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