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에겐 오래 된 김훈 글 모음 책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이 있습니다. 오늘 책 년표를 보니 1쇄 펴낸 날이 1989년 7월 5일이고 4쇄 펴낸 날이 1996년 11월 25일 입니다. 아마 이 책을 1996년 경 구입했지 싶습니다.아 듀나님의 책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 란 희귀본도 있습니다 ㅎㅎ 그런데 이 책엔 유독 제 마음을 끄는 두 꼭지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세월호 참사가 1주일 쯤 지났을 때 문득 그 한 꼭지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소리의 고향이라는 기행문 장에서의 작은 꼭지 하나인데 인터넷엔 없어서 키보드로 다 칠 수 밖에 없어요. 아마 다시 이 글을 어딘가에 인용하게 된다면..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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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짐굿

 

지난해 2월 14일 새벽 캄차카 남쪽 3백키로미터 해상에서 침몰한 한진해운 소속 컨테이너 반 한진 인천호(1만 7천 6백톤,선원 21명 사망)의 3등 항해사 안철호 씨(당시 26세)의 원통한 넋을 건져서 씻겨 주는 씻김굿이 그의 고향인 전남 진도의 남쪽 포구 마을 의신면 초서리의 갯가에서 열렸다. 젊어서 죽은 안씨는 이 마을 어부 안경동 씨(1918-1968)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 5살 때 아버지와 사별했다. 그의 맏형인 안동산 씨(49)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고기를 잡아 어린 동생들을 길렀다. 남자들 중 대졸자 한 명 나오는 것이 그의 집안의 비원이었다  맏형은 고기를 팔고 멍게를 길러서 모은 돈으로 둘째 동생 철호씨를 목포 해양 전문대학에 보내 외항선원을 만들었다.


 안철호 씨는 졸업한 후 첫 항해길에서 죽었다.그가 죽던 밤의 북태평양은 파도가 높이 10미터, 기온은 영하 25도였다. 파도위를 표류하던 그의 시선을 일본 어선이 건져서 부산시립병원 영안실로 보냈다. 맏형이 달려가 보니,죽은 동생의 얼굴은 겁에 질린 채 얼어 붙어 있었다.


안철호 씨의 넋 건짐 굿과 씻김굿은 진도의 큰 당골들인 김대례(인간문화재)와 이완순 씨(인간문화재)가 집전하였고 시나위 악사 김규봉 씨(인간문화재 후보)가 무악을 반주하였다.-----중략------당골 이완순 씨는 캄차카바다쪽을 향하여 지전을 흔들며, 느리고 길게 이어지는 계면의 무가로 안철호 씨의 넋을 불렀다. 이완순 당골은 긴 염불가락으로 용왕에게 이 굿이 벌어지게 된 경위를 고하였다. 그리고 그의 넋이 이제 캄캄한 바다 밑을 헤메고 있는 가엾은 사정을 아뢰었고 그것은 죽은 자나 살아 남은 자에게 모두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것을 호소했고 , 그의 넋을 되돌려 달라고 빌었다. 무가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바다 위를 떴다. 시나위 악사 김규봉 씨는 피리와 징으로, 그리고 당골 김대혜 씨는 장구로 무악을 반주했다.

 

3등 항해사 안철호 씨의 젖은 넋은 4일 하오 12시 39분에 캄차카 바다 밑으로부터 그의 고향인 진도 남쪽 갯가로 돌아왔다. 안철호 씨의 넋은 바다물에 띄워 놓은 그의 밥사발 속으로 들어 와 질베틀을 타고 신대 끝으로 올라갔다가, 그 신대를 쥐고 있던 그의 누나 안동심 씨에게 씌어졌다.누나의 몸속으로 들어간 안철호씨의 넋은 말이 되어지지 않는 말들이 들끓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갯가에 쓰러져 딩굴었다. 악사들이 징을 가볍게 두드려 그의 넋을 위로했다.

 

"말해라 말해. 네 하고픈 얘기 다 해라. 네말 들어 주려고 우리가 널 부르지 않았느냐. 자 다 말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젖은 옷 갈아 입고 씻김하고 좋은 데로 가거라" 라고 달래며, 당골들은 안철호 씨의 넋이 쓰인 안동심 씨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안철호 씨의 넋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곡했다.

 

"말 못해, 난 말 못해 산 놈들 하고는 난 말 못해. 말이 통해야 말을 하지. 아이고 이 우라질 산 몸들아" 안철호 씨의 넋은 갯가의 잡초를 쥐어 뜯었다. " 야 이놈아 네가 아무리 원통절통한 넋이지만, 늙은 내 어머니도 계신 앞에서 이리도 패악질을 하면 쓰겠느냐. 그러지 말고, 우리가 다 들어 줄테니 차근차근 말해라" 당골들이 다시 그의 넋을 쓰다듬어 주었다.

 

돌아 온 안철호 씨의 넋이, 통곡과 넋두리와 비명 속에서 말한 것은 돈에 대한 증오였다. 그는 돈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생명 위에 자행되었던 폭력들을 낱낱이 말했다. " 어머니 나는 돈 땀시 죽었소. 돈으로 대체 무얼 하자는 것이오. 돈으로 날 살려 주소. 어머니" 하고 아들의 넋이 따지고 들자 팔십 노모는 땅바닥에 쓰려져 울었다. 안철호 씨의 넋은 또 캄차카 바다 밑의 어둠과 답답함과 외로움을 말했다. "아이고 답답해라. 그 물속엔 아무도 없지라우-"라고 넋은 오랫동안 울었다. 그리고 또 그의 넋은, 캄차카 바다에서 배가 깨져 버렸을 때 그가 캄캄한 바닷물에 뛰어든 다음부터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의 그 무서움을 말했다.

 

"안다 알아. 우리가 어찌 네 한을 모르겠느냐. 그러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가서 마른 옷으로 갈아 입자. 하루 잘 쉬고 씻김받고 너도 좋은 데 가야 할 것 아니냐" 당골들이 3등 항해사 안철호 씨의 넋을 부축해서 집안으로 들어가 그의 한을 씻어 내는 씻김 굿을 벌였다. 그날,진도 남쪽의 작은 포구마을에서의 구슬픈 무가와 시나위 가락이 하루종일 바다 위에 떠돌았다. 씻김을 받은 안철호 씨의 넋은 5일 새벽에 누나의 몸에서 나와 '좋은 곳'으로 돌아 갔고, 누나는 다시 중년의 가정 주부인 안동심 씨로 돌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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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는 1987년 2월 14일 발생했고 2월 21일 부로 전원 사망 혹은 실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해, 6월 항쟁이 터졌습니다. 진도 팽목 항과 그가 살던 곳은 한 30km쯤 됩니다. 안철호 씨는 저와 아마 나이가 같거나 한살 많을 겁니다. 저는 이 글에서 그의 죽음을 90년 대 중반 알았습니다. . 그리고 잊었는 줄 알았는 데 이렇게 다시 내 기억에 떠 올랐습니다.

 

2. 정혜신 세월 호 트라우마 외상 '후'가 아닌 아직도 외상 '중'.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6380.html  제 요약이나 강조가 과하면 지적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울며 이야기 나누고 겨우 정리한 정혜신과의 인터뷰 “무책임한 정부·부도덕한 언론의 칼질 멈추게 해야”

 

 내 자식의 죽음에 대해 범인에게 설명 듣는 상황

 

알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공감이 되고 공감이 되면 해결책이 스스로 걸어 나온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이 전대미문의 트라우마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 그녀는 거의 필사적으로 그런 사실들을 전하고 싶어 했다. 관련 지식과 현장 경험을 가진 전문가로서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어서다. 그녀의 흐느낌 같은 조언을 다시 들었다.

 

‘트럭 기사’ 아빠, 장례 끝나자마자 일 나갔다가 ‘사고’ 

 

이건 지금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에게 확률이 매우 높은 죽음의 형태예요. 상담 부스에 앉아서 피를 쏟는 사람에게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 묻는 게 치유는 아닌 거죠.

-지금 상황에서는 심리 치유 전문가들이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겠어요.

=상담이 아닌 다른 치유적 접근이 더 필요해요. 이미 깨져버린 일상을 더 이상 깨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일이 시급합니다.

 

생존자들에게는 빠른 심리적 개입을 

 

트라우마의 본질은 죽음을 목전에서 경험한 사람에게 화인(火印)처럼 새겨지는 ‘죽음 각인’입니다. 죽음에 대한 생생한 실감은 인간의 어떤 경험보다 강렬해서 그 기억은 일생 동안 집요하게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치유되지 않으면 그 기억에서 도망치려고 사투를 벌이거나 죽은 이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일생이 다 소모될 수 있어요

 

지금 피해 가족들의 분노는 너무나 정당해요. 상담사들은 그 분노에 대해 공감을 넘어서 정서적 참전이 필요합니다. 이건 정치 투쟁이 아니라 치유자의 중요한 역할이에요.

 

=잊혀지는 것에 대한 공포요. 그게 가장 무섭죠. 그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만큼요. 죽음에 대한 공포란 본질적으로 내가 먼지같이 사라지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관계에서의 완전한 단절이지요. 남겨진 부모들에겐 아이의 물리적 실체가 사라진 것도 죽음이지만 진짜로 완전한 죽음은 내 아이가 잊혀지는 거예요. 내 아이의 삶이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이 사라지는 거요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최고의 치유자들

 

생존자들이 앞으로 짊어져야 할 천형 같은 삶을 지금 시점에선 알 수 없으니까요. PTSD가 집단적으로 발생할 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상 나타나는 현상은 피해자들끼리 주고받는 분열과 상처, 피해자 사이에서 상대적인 가해자를 찾는 심리 현상이에요. 외부의 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때는 그래도 힘을 낼 수 있지만 피해자 상호 간에 분열과 상처가 생기면 그땐 치명적이죠. 그런데 반대로 어느 누구보다 결정적인 치유적 도움을 피해자끼리 줄 수도 있어요. 그걸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합니다. 아이 장례를 치른 부모들이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러 진도에 내려갔잖아요. 이분들이 상처 입은 치유자의 전형입니다. 최고의 치유자들이에요.

 

참사 책임자들 처벌 끝까지 집요하게

 

죽음의 동네처럼 된 그곳에 치유센터가 자리를 잡아야죠. 피해 가족들이 아무 때나 모일 수 있고, 밤에 잠이 안 오면 찾아갈 수도 있고, 살아남은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고 함께 지낼 수 있는 치유적인 사랑방 공간 같은 형태로요. 사람들이 힘을 모아 그 마을 전체를 노란 리본으로 뒤덮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늘 환할 수 있고 그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심리적 구조를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안산을 치유적인 도시로 만든다 할 만큼 사회 치유적인 설계가 이뤄져야 납덩이처럼 가라앉은 공동체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개인의 치유도 가능합니다. 이런 일에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으면 지금 같은 무력감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고요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과 구조를 샅샅이 밝혀내는 일에 나서는 것입니다. 해경, 청와대, 안전행정부, 국회의원, 협회,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 언론사와 언론인들, 일베 등 이 참사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준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해야 합니다. 나치를 척결하듯 집요하게 끝까지요. 꼭 광장에 나가지 않아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진행해야 합니다.

 

유가족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 자식이 억울하게 죽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완전히 달라졌다면 ‘고맙다. 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네 동생이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산다’ 이런 맘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만 아이를 편안하게 놓아줄 수 있어요. 마음의 이치이고 치유의 근본 법칙입니다. 정치적 주장이 아니에요.

 

학익진의 대형으로 갇힌 그들  

 

치유자는 근본적으로 무당과 비슷하다는 그녀의 지론이 새삼 와닿았다. 나치 척결하듯 독소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그녀의 치유적 해법이 근본적이라는 데 우리 둘이는 김 한 장 차이도 없이 합치했다. 필사적으로 얘기하고 싶었겠구나, 진심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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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아오면서 스스로 경험한 '사회적 살인'에 대한 정혜신 선생의 진단은 놀랍도록 정확합니다. 오늘 자원봉사자 중 한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치유 근처도 못갔다는 걸 저는 압니다. 왜냐하면 저도 깊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이빙에서 이젠 건넜다고 착각했던 '깊고 검은 물'에 대한 공포와 매혹이 그거였어요. 어떻게 보면 저도 필사적으로 그 답을 찾고 있습니다. 사실 4/16 전날, 많은 분들은 못느끼셨을 지 모르지만 듀게에서 알게 된 어떤 분의 친구가 다이빙으로 자의반 타의반 돌아가셨다는 글을 읽었어요.

 

3. 그리고...나머지 이야기

 

아마 이 이야기는 듀게에선 쓰지 않을 겁니다. 혹 쓰게 된다면 비로소 그 답을 찾았다는 뜻일거고 그걸 나누고 싶어서이겠지요 얼마나 걸릴진 잘 모르겠어요

 

비가 옵니다. 냉장고에 쟁여둔 맥주 2캔 마시고 잠을 청할까 합니다. 그나마 요즘엔 꿈은 안꾸네요.

 

비소리에 기대어 이 험한 글 보시더라도 좀 편안한 밤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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