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

2016.08.18 15:33

여은성 조회 수:1063


 1.작년 말부터 어떤 가게에 주로 다니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 가게에 자주 가게 된 건 처음엔 딱히 큰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직원들이 흔히 홀복이라고 불리는, 파이고 헐벗은 옷이 아닌 평상복에 가까운 옷을 입고 근무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 직원들을 볼 거라면 훨씬 적은 돈을 들고 봉천동이나 광명시에 가도 되는 거거든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쓸데없이 돈을 더 쓰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그게 50% 할인해주는 아이스크림 바든 트레이닝비든 미용실이든간에요.


 어쨌든 가다보니 두 번 정도 그곳의 사장이라고 하는 사람과 술을 마셨는데 얼마쯤 이야기해 본 후 나는 이 사람은 오너사장이 아닐거라고 확신하게 됐어요.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예요. 그냥 뭐랄까...이런 괜찮은 가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지지가 않았어요.


 언젠가 썼듯이 나는 남자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짓거리따윈 하지 않아요. 술을 마시러 간다면 거의 반드시 여성이 오너인 가게를 가죠. 뭐하러 남자를 위해 돈을 쓰겠어요?


 그런 이유로 누가 오너인지 확실하지 않을 땐 이곳의 진짜 소유자가 여자인가? 라고 대놓고 묻곤 하지만 거기선 굳이 묻지 않았어요.


 그냥 아마도...내가 추정하기로는 강남에서 직원들에게 얌전한 옷을 입혀서 근무하게 시키는 자가 남자일 것 같지는 않았어요. 강남의 남자 사장들은 직원들을 벗기기에 바쁘지 꽁꽁 싸매도록 두지 않거든요. 그래서 아마도 이곳의 오너는 여자일 거라고 멋대로 짐작하고 있었어요. 


 가게에서 볼 수 없는 건 아마도 나이를 많이 먹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라고도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연한 거잖아요. 사장이 젊고 예쁘다면 가게에 출근하고 직접 영업을 뛸 테니까요. 그래서 굳이 여기의 진짜 사장을 보고 싶다던가 하는 말을 하면 실례일 거 같아 언급하지 않았어요.



 2.슬슬 가게 파악이 완료되어 가던 어느날 베이비메탈의 노래를 신청했어요. 나는 언밸런스한 것과 하면 안되는 걸 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이런 곳에서 원래는 틀어선 안 될 베이비메탈의 음악을 신청해놓고 술을 마시는 게 기분이 좋았어요. '들어라! 노땅들아! 이것이 메탈리카를 능가하는 록그룹 베이비메탈이다!'라는 느낌으로요.


 그런데 노래가 중간에 멈췄어요. 노래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던 시점이어서 현저하게 기분이 나빠졌어요.


 아마도 직원이 삽질을 했나보다 싶어서 노래를 재신청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부스에 들어왔어요. 여자는 '들어가도 될까요...' '앉아도 될까요...'같은 관습적인 말 같은 건 생략하고 바로 내 앞에 앉았어요. 나를 바라보며 쭉 찢어진 것 같은 입으로 웃는 것...행동 하나하나에 리듬감과 생동이 가득한 것을 보며 이 녀석이 대장인 걸까...대장치고는 너무 어린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Q가 입을 열었어요. 


 '여기엔 너무 안 어울리는 노래라 제가 끊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씀 드리려고 왔어요.'



 3.이 가게에 처음 다니던 시기에 Q와 계단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어요. 글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하나의 단서를 토대로 추정하는 걸 좋아해요. 그게 좀 억지일 때도 있지만 내 안에서는 그럭저럭 합리성과 논리를 갖춘 추정이죠.


 그때 Q와 계단에서 마주친 순간 바로 머릿속에서 떠오른 시나리오는 자신에게 걸맞는 곳인 줄 알고 면접을 잘못 보러 온 여자아이가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상황이었어요. 3초정도 본 것 뿐이지만 생김새...자세...걸음걸이를 보고 도저히 이런곳에서 시급이나 받으며 일하지는 않을 거란 걸 알 수 있었어요.


 조금 덜 예뻤거나 아우라가 덜했다면 가게에 들어가 방금 면접 보러 온 여자애는 일하기로 한 거냐...나온다면 언제부터 나오는거냐라고 물어봤겠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을 것 같아서 묻지도 않았었던 기억이 났어요.


 사실 이젠 누굴 봐도 외모 하나만으로는 감탄하기 힘들어요. 예쁜 사람같은 건 수두룩하게 봤거든요. 그런 내게 Q의 외모에 대해 말하라면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인형이 말을 하고 움직이고 있다'라는 느낌이 드는 3명의 사람 중 하나예요. 



 4.휴.



 5.간단한 인사를 하고 Q가 물어왔어요. '애니메이션 뭐 그런 거 좋아하세요?'라고요. 아마도 베이비메탈 노래를 애니송으로 여긴거구나 싶었어요. 하긴 그들 노래가 잘 만들어진 애니송 같긴 해요.


 애니메이션을 거의 보지 않지만 나는 상대를 적당히 따라가다가 역전하는 걸 좋아해서 '네. 애니메이션 뭐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해 줬어요. 나를 바라보던 Q의 시선이 잠깐 분산되었는데 할 수 있는 만큼 빠르게 머리 안경 옷 왼쪽 손목 신발 같은 것들을 스캔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어요. 이미 여러 번 당해 본 거였죠. 


 나도 Q를 훑어봤는데 이상한 것을 보면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나는 Q의 옷차림에 대해 너무 궁금해졌어요. 이런 고가품-명품이라는 말은 쓰지 않아요-들을 왜 자신이 일하는 가게에 입고 왔는지요. 어지간히 돈과 옷이 많아도 가게에서는 보세 옷이나 그럭저럭 깔끔한 값싼 옷을 입으니까요. 아무도 자신이 가진 최고로 좋은 옷을 일하러 올 때 입고 오지는 않아요. 설령 입고 오더라도 탈의실에서 환복을 하고 홀에 나오죠.


 두 가지 경우를 상상했어요. 첫 번째 경우는 Q가 어린 사장이라서 아직 뭘 모른다는 경우. 하지만 사장 직함을 막 달았든 말든 그 정도를 모를 리는 없어요. 일을 한 세월이 있을 테니까요. 


 두 번째 경우는 Q에게 있어 저런 옷들쯤은 손쉽게 두르고 다닐 수 있는 옷인 경우.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저런 옷들을 일상복으로 입는 수준이라면 자영업을 할 필요가 없어요. 소파에 아무렇게나 얹어둔 Q의 발렌티노 코트를 가리키며 '신세계에서 한 8백만원 하는 걸 본 거 같은데...'라고 중얼거리자 Q도 중얼거렸어요. '네자릿수...예요.' 말을 해놓고 허세를 부린 것 같다고 느꼈는지 생긋 웃으며 '막 이래요.'뭐 이랬어요. 이 부분은 잘 안 들려서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그 천만원 넘는 코트의 끝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해주자 Q는 고개를 끄덕이며 코트를 똑바로 놓았어요. 그리고 이름을 물어봐 왔어요.



 6.사람들이랑 얘기할 때 호구조사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요. 이건 그 사람 마음이죠. 하지만 이름과 사는 곳까지만 물어보고 더이상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는 걸 보며 조금 전 스캔으로 이미 나에 대한 판단을 끝냈구나 싶었어요.


 Q는 5분 정도 머무르다가 이제 가봐야겠다고 하며 일어났어요. 일어선 Q의 전신을 보고 확실하게...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완벽한 조형성을 갖춘 얼굴과 몸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가는 Q의 뒷모습을 보고 한번 더 놀랐어요. 단화를 신고 있었거든요. 아직도 전투력이 100%가 아닌거였구나...라고 주억거렸어요.


 

 7.이후 한동안은 Q와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었어요. 잠깐씩 테이블에 들러서 요즘 일은 잘 되시...아참 백수셨죠? 같은 인사 정도만 나누곤 했어요. 어쨌든 가게에 다닌 지 두달 가량 되어가자 어떤곳인지 파악이 완료됐어요. 


 앞에 썼듯이 한때는 이 가게를 '이런 가게'라고 불렀지만 그렇게 여길 만한 가게는 확실히 아니었어요. 일단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가게면 고급으로 치지 않으니까 착각할 만도 했어요. 이 가게는 흔히 말하는 회원제도 아니고 텐카페 시스템도 아니어서 좀 허접하게 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부스에 앉아서 가끔 룸으로 들어가는 술들의 면면을 보니 질과 양에서 하이엔드급 가게들보다 더 심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가격표에 대입해 보면 어느 정도 버는 사람이 어느날 조금 큰 마음을 먹는다...정도로 날릴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어요. 


 Q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저 돈을 쓸거면 뭐하러 이런 곳에 와서 헛지랄이지? 경제 관념이 없는건가?'라고 여겼겠지만 이미 Q를 본 뒤여서 이해가 됐어요. 보통 술집은 오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이 어느정도 비슷하지만 이곳의 스펙트럼은 정말 넓었어요. 위쪽으로 끝없이 수렴하는 듯한 고객들이 종종 Q를 보러 오곤 했어요. 하지만 Q의 존재 때문인지 그게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8.이전에 쓴 글을 보면 알겠지만 Q를 딱히 좋게 여기지는 않았어요. 


 어느날이었어요. 돔페리뇽 6병인가를 깐 한 아저씨-직업은 의사-가 영업이 끝나고 Q에게 같이 나가자고 매달렸어요. 나는 Q가 아저씨와 같이 나가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문제는 Q가 저 아저씨를 어떻게 떼어놓는가...어떤 달콤한 말로 구슬리는가였죠. 


 Q는 직원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완력으로 아저씨를 테이블에 앉히더니 직원들에게 '오빠 많이 취하셨어. 택시 불러 드려.'하고는 아저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에 오면 고기 사줄께 오빠'라고 말하고 가버렸어요. 그렇게 가는 듯 하다가 무슨 큰 선심을 쓴다는 듯이 '오빠 위해서 내가 믹스커피 직접 탔어.'라며 아이스 믹스커피를 들고 와서 아저씨에게 건넸어요. 마치 악마를 보는 것 같았어요.


 휴.


 나였다면 그 믹스커피를 집어던졌을 거예요. 내가 돔페리뇽 6병을 깠다면요. 돔페리뇽 6병을 깠는데 '다음에 오면'이라니...이건 아니잖아요. 정말 그 순간엔 오지랖이란 걸 부리고 싶어서 아저씨에게 말걸려고 했어요. 여기서 그럴 돈으로 딴 데 가면 아저씨는 왕 취급 받을 거라고요. Q에게 목맬 필요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때...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장면을 봤어요. 아저씨가 그 믹스커피를 지그시 바라보는데 그 눈에는 엄청난 사랑과 고마움이 담겨 있는 거예요. 경악할 수밖에 없었어요. '맙소사, 지금 저딴 믹스커피 하나에 감동하는 중인 건가? 저 잘나가는 의사가?'


 물론 그 사람이 의사인 건 알지만 잘나가는지 어쩐진 몰라요. 하지만 돔페리뇽 6병을 깠다면 그가 잘나가는 의사가 아닐 리는 없을 테니까요. 솔직이 샴페인을 그렇게 퍼마셨다면 딱히 목마르지도 단 게 땡기지도 않을 텐데 그 아저씨가 믹스커피를 거의 남기지 않고 다 마시는 걸 보고 어떤 깨달음 같은 게 느껴졌어요.


 '이것이 사랑이구나.'


 라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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