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영화 Zodiac(2007)을 봤어요.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2000년~2010년 사이에 개봉된 영화들을

많이 못 봤는데 그 후에 나름 찾아보고 있지만 여전히 못 보고 있는 게 많죠. 이 영화도 그 중 하나였어요. 

제가 연쇄살인범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지나친 공포감이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스펜스 스릴러

보는 걸 좀 힘들어 하는 사람이다 보니 제목은 들어봤지만 미뤄두던 영화였는데 어제 우연히 이 영화의 주연이

제이크 질렌할과 마크 러팔로라는 걸 알게 되어 바로 찾아봤죠. ^^


등장인물도 많고 얘기도 복잡하고 한글자막이 없어 영어자막으로 보다 보니 사람 이름도 막 헷갈리면서

내용을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하는 지경인데 그래도 재밌더라고요. 

두 시간 반이 좀 넘는 긴 영화라 중간에 잠시 멈추고 싶은 순간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어요. 

무서운 순간이 별로 없어서 제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냥 집중하면서 쭉~ 보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김기덕 감독 인터뷰에서 프랑스에 있을 때 <양들의 침묵>과 <퐁네프의 다리>를 재밌게 봤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로 상영되었을 텐데 재미있었느냐고 기자가 질문했던 것 같은데 김기덕 감독 대답이

잘 만든 영화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재밌다는 거였죠. 

당시엔 이 인터뷰를 보면서 역시 영화는 말보다는 보여주는 이미지가 중요하지 뭐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갔어요. 

그후 가끔 김기덕 감독의 말을 테스트해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자막 없이 영화를 보기도 했고요. 

(이 테스트를 통과하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제 <조디악>을 보다가 갑자기 이 인터뷰 생각이 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퐁네프의 다리>는 파리 시내 모습도 좀 보여주고 멋진 야경도 보여주고 했던 것 같은데  

<양들의 침묵>은 멋진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도 아니고, 그래도 뭔가 좀 알아들어야 재밌을 것 같은 영화잖아요? 

저는 첩보 영화가 관객이 이해하기 힘든 전문용어를 써가며 복잡한 대화로 진행되거나 화면을 현란하게 만들어서

'관객인 당신이 못 알아들을 테니 나는 더 멋있는 영화'라는 인상을 주는 듯하면, '그래, 나는 복잡하고 정신 없는 

이야기는 못 알아들어서 흥미가 없으니 이만 꺼야겠어' 하고 그만보는 인내심 부족한 관객이거든요. ^^ 

그런데 <조디악>을 보면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집중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특별히 영화의 촬영이 멋있게 된 것 같지도 않고 화면발로 제 마음을 사로잡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데이빗 린치 감독의 몇몇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걸 느낀 적이 있었어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시선을 뗄 수 없는, 영화에 빨려들어가는 느낌 같은 거요.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는 좀 더 관능적이라고 할까, 

시각적으로 좀 더 자극적인 화면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조디악>은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어쨌든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서스펜스 스릴러를 부담스러워 하고 스토리도 제대로 못 따라가는 

저를 끝까지 집중해서 보게 만들었으니까요. ^^ 그래서 좋은 영화에 대해 제가 갖고 있던 희미한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죠. 내용이 이해가 잘 안 돼도 보고만 있어도 그냥 재밌고 끝까지 관심을 유지하며 보게 만드는 

영화가 저에게는 좋은 영화인 것 같아요. ^^ 


내용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필수 요소인지 선택 요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글이든 영화든 어려운 건 싫어하는데...  단지 언어의 문제로 이해가 안 되든, 영화가 선택한 이야기 자체가 어렵고

모호해서 이해가 안 되든, 어려움을 전제로 깔아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그 어려움을 견디면서 이해해 보려고 

애쓰도록 만드는 영화가 더 좋은 영화인 것 같기도 해요.    


듀게분들은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자기만의 기준을 갖고 계신가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이런 조건을 만족하면 나에겐 좋은 영화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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