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 사직 어린이 도서관

2015.06.24 12:22

겨자 조회 수:1965

1. 오래간만에 로알드 달의 책을 들춰보게 되었습니다.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는 첫 장부터 로알드 달답게 냉혹합니다. 


제임스는 네 살이 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제임스의 엄마 아빠가 런던에 갔다가 성난 코뿔소에게 먹히고 말았죠. 그렇지만 이 부모님들의 인생은 제임스에 비하면 별로 나쁜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임스의 인생은 앞으로 꼬이는 것만 남았지만 제임스의 부모님은 순식간에 죽었으니까요. (첫장의 요약. 문장 그대로의 번역은 아닙니다)


어렸을 때는 왜 로알드 달을 보면서 잔인하다 생각을 전혀 못했을까요? 초등학생이던 저는 그냥 이제부터 제임스의 모험이 시작되나보다 했지, 부모 없는 아이의 슬픈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찰리의 초콜렛 공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콜렛 공장의 규모와 부유함을 음미하느라, 찰리네 가정의 가난함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죠. 이제는 부모가 되니, 고아가 된 제임스나 가난한 찰리의 아픔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로알드 달을 달리 읽게 됩니다. 


2. 제가 처음 로알드 달의 책을 읽게 된 것은 서울시립 어린이 도서관 (사직도서관)에서였습니다. 저의 부모님 세대는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고 이해했을 지언정, 로알드 달과 같은 해외 어린이 도서에는 정통하지 못하셨죠. 부모님들 주머니로는 도저히 자식들의 책읽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구요. 그러나 제 어머니가 사직도서관을 알려주셨고, 제가 국민학교 삼학년 무렵부터 저는 사직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오학년 때에는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버스를 타고 사직도서관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사직도서관에 가까이 왔다는 신호는 사직터널이었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나의 도서관이 나온다, 라고 생각하며 버스 안에서 긴장을 놓지 않았죠. 그때는 핸드폰도 없던 시대였는데, 어째서 그렇게 다닐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호호 아줌마" "말괄량이 삐삐"가 만화영화/티비 드라마가 아니라 원작이 있다는 걸 알았고, 정말이지 세상이 넓다는 것을 어린 머리로 배웠습니다. 사직도서관에는 쥐포 파는 곳이 있었고, 동상이 있었고, 또 비둘기가 많았죠. 쥐포는 (제 기억이 옳다면) 오십원이었습니다. 책을 여러권 빌려가지고 돌아오는 길, 쥐포를 입안에서 불려가며 조금씩 갉아먹는 그 순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직도서관 화단에는 매년 사루비아 꽃이 빨갛게 피었는데, 긴 꽃 끝에 조금 꿀이 들어 있어서 뽑아먹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3. 해외에 나와서 여러 나라 사람들과 담소를 나눌 때에도, 로알드 달이나 줄리 앤드류스, 아이작 아시모프 이야기를 하면 친구가 되기도 쉽고 대화나누기도 수월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도서관은 1979년에 지어진 도서관입니다. 30여년 전에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지만, 사직도서관은 저보다 부유한 나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해외의 제 또래들과 국적과 출신계급을 초월해서 공감을 나눌 수 있게 도와주었죠. 사직도서관은 숨가쁜 80년대,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지친 어린이들을 위로해주고 교육시켜준 것입니다. 현재도 연간 이용자가 백만명이 넘는다고 하네요.


4. 2027년 이후 사직도서관을 없애고 사직단을 만든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하네요. 


2015년 1월 27일 문화재청이 발표한 "사직단 복원 정비계획"에 의하면 2027년 이후에는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과 서울시립종로도서관은 이곳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문화재청은 두 도서관을 사직단의 후원으로 조성해 산책로로 개방한다고 합니다. 바로 뒤에 인왕산 자락길과 수성계곡이 있는데, 한 해 각각 100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두 도서관을 헌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서울에는 두 도서관을 옮길 만한 대체부지도 없습니다!

사직단을 보존하기 위해 어린이도서관을 헌다고 합니다. 서울의 중심가에는 어린이도서관을 지을 만한 대체부지가 없으며 새로 짓는다 해도 그 역사적 의미는 퇴색되고 말 것입니다. '사직단이냐, 어린이도서관이냐’를 놓고 결코 양자택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직단도 어린이도서관과 종로도서관도 함께 보존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와 관련한 박정현 건축 평론가의 기고입니다.


최근 문화재청이 사직단을 복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을 철거하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지역 시민들의 문화공간이자 동시에 서울의 가까운 과거를 증언하는 두 도서관을 대안 없이 철거하면서까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을 되살리려 한다. 이번에도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 정기를 복원한다는 논리가 모든 논의를 원천봉쇄했다. 복원과 철거 어디든 동원되는 전가의 보도다. 사직단 복원은 우스꽝스런 또 하나의 한양 테마파크일 뿐이다. 멀쩡히 남아 있었다 한들, 현재적 의미가 전무한 사직단은 시민에 의해 전유되어 마땅한 유적이다. 공원으로 사용되는 지금의 기능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주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와 관련한 조진서씨의 포스팅입니다.


2015년 6월 5일, 문화재청은 사직도서관을 철거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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