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바낭] 엄마의 맛

2012.07.06 10:32

fysas 조회 수:3370

아래 간장국수 글을 보니까 문득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들 생각이 나더군요.

 

아랫글에 댓글로 달았지만 저희 엄마는 당신 음식에 자부심이 굉장히 큰 분이셨어요.

그 자부심이 이해할만한 것이, 실제로 요리를 진짜 잘하셨고 또 엄청나게 손이 빠르셨어요.

체구도 작은 분이 일가친척들 한 서른 명 정도 다 모이는 잔치상을 혼자서 차려내곤 하셨으니까요.

그것도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단 몇 시간 동안 뚝딱뚝딱..

누가 도와준다고 나서도 번거롭고 걸리적거리니까 나중에 와서 상이나 차리라고 하셨었죠.

그런 덕분에 아부지가 셋째 아들임에도 조부모님 생신 잔치는 항상 저희 집에서 치뤘었죠.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셨지만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아하셨던 덕에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음식들을 많이 접했고 낯선 음식에도 거부감 대신 호기심을 보이는 성향으로 자라났습니다.

물론 어린애가 소화하기 힘든 음식(맵거나 쓰거나 식감이 강하거나 등등)도 안 먹으면 자존심 상해하며

왜 안 먹냐! 먹을 때까지 이것만 줄테다! 하고 고집을 부리시는 통에ㅠㅠㅠ 제가 편식은 안 하는 아이로

자라났지만 나름대로의 한(..)이 있었다는 부작용도 분명히 있긴 합니다. ^^;

 

 

암튼 제가 중학교 때부터 돌아가시 전까지는 쭉 식당을 하셨었는데, 처음에는 닭갈비집을 하셨어요.

당시 90년대 중반, 지금이야 길거리에 가장 흔한 식당 중 하나가 닭갈비집이지만 그때는 안 그랬죠.

저희 가족이 살던 대전 시내에, 저희가 아는 닭갈비집은 딱 하나 밖에 없었어요.

시내 중심가에, 제법 고급인 고깃집들 사이에 비슷한 가격을 자랑하는 집이었죠.

엄마는 식당을 차리기로 결정하시고는 뜬금없이 닭갈비집을 해야겠다! 하시더니 저를 데리고

그 시내에 하나 밖에 없는 그곳에 가서 딱 2인분을 먹고, 밥을 볶아먹고 나왔어요.

그리고 집에 와서 다음 날, 전날 먹은 닭갈비와 똑같지만 더 맛있는 닭갈비를 만들어내셨죠.

그리고 동네 시장의 작은 가게를 차리셨는데 진짜 말그대로, 대박이 났어요.

엄마가 주방 보시고 서빙하는 아주머니 한 분 두고 하는 그 좁은 가게에서 수시로 일손이 부족해서

제가 불려가서 갈비 볶아주고 밥 볶아주고 그랬었으니까요. 덕분에 제 밥 볶는 실력이 많이 늘었죠.

결국 2년 만에 권리금 두배 넘게 받고 가게를 넘겼어요.

 

그리고 많이 큰 가게로 옮겨서, 전 엄마가 당연히 또 닭갈비집을 하실 줄 알았는데 업종을 바꾸시더군요.

이번엔 또 뜬금없이, 민물매운탕 가게였어요. 그 무렵에 슬슬 닭갈비집이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했거든요.

민물고기를 직접 잡지 못해서 가게에 고기 잡는 사람을 따로 둬야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가게도 진짜 잘됐었어요. 매운탕과 더불어 역시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항아리수제비 인기가 짱이었죠.

다만 택시기사들을 주 고객층으로 하는 가게라 24시간 영업을 해야했고, 아무리 사람을 써가면서 가게를

운영한다고 해도 낮밤이 바뀐 생활 때문에 건강을 많이 해치셨죠.

결국 그 가게를 한지 4년만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고, 그리고 2년 후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지금은 요리하기를 좋아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저는 요리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엄마는 청소며 빨래며 온갖 집안일을 다 저한테 시키시면서도 주방만은 손대선 안되는 영역이었죠.

아무리 식당일로 바빠도 늘 식당 반찬이라도 냉장고에 채워두셨고 집에 있을 땐 항상 뭔가를 만드셨죠.

돌이켜보면 뒤늦은 사춘기로 맨날 소리 지르고 싸우던 20대 초반에, 엄마와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기억은

그때도 나름대로 요리에 흥미가 있던 제가 엄마와 함께 요리프로그램을 보면서 수다를 떨 때였어요.

엄마는 매일 저건 저렇게 하면 안된다, 저렇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더 맛있다 하고 프로그램 속의

요리사들을 까셨고(..) 그럼 전 맞아맞아 맞장구도 치고 모르는 요리는 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그리고 그 무렵에 막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혁신적인 제이미 올리버 요리프로그램을 나란히 좋아했죠.

우와, 요리프로그램에서 계량스푼을 안 써!!! ㅎ0ㅎ 우와, 양념이 유리그릇에 담겨있지 않아!!! ㅎ0ㅎ

....매일 모녀가 이러면서 나란히 사이좋게 네이키드 쉐프를 보다가, 프로그램이 끝나면또 싸우고..

 

제가 지금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제 요리를 해줄 사람이 곁에 없는 이유도 있지만,

너무 일찍 보내드린 엄마와의 추억을 되짚을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인 것도 같다는 생각을 드문드문 해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음식을 엄마가 해주셨던 맛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면서, 먹을 때마다 여기엔 뭘 넣는게

엄마만의 비법이다 하시는 것을 흘려듣던 기억을 열심히 끄집어내면서 그렇게 뭔가를 만들었을 때,

엄마가 해주시던 그 맛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맛이 나면 그게 참 그렇게 기쁘면서도 서럽더군요.

곁에 계실 때 더 잘해드릴걸, 곁에 계실 때 좀 배워둘걸........ 이런 후회, 진짜 다 소용 없어요.

 

특히나 국이나 찌개 같은 건,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가 해주시던 그 감칠맛이 안 나더라구요.

어차피 혼자 살면서 자주 안 해먹는 음식이라 어쩌다 한번씩만 하니 잘 늘지도 않고..

그래서 늘 왜 엄마 맛의 비밀은 뭘까.. 고민했었는데 어제, 우연히, 그 비밀을 알았습니다.

매일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다 모처럼 빼먹어서 근처 식당에서 순두부찌개를 먹는데 엄마 맛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아, 엄마 맛의 비밀은 미원이었구나..... 하구요. 그리고 멘붕.........orz

엄마는 맨날 요리에 조미료 안 쓰신다고 했었는데!!!! 그게 뻥이었다니!!! 하면서요.

매일 식당 음식에는 조미료를 안 쓸 수가 없지만, 집에서 만드는 음식엔 절대 안 쓰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또, 어릴 때부터 저는 밖에서 먹는 음식의 조미료에는 굉장히 민감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집에서 먹는 음식에는 유독 조미료 맛을 느끼지 못했었죠.

물론 안 넣는 음식도 있었을테지만 어렸을 때부터 꾸준했던 찌개의 맛의 비밀은 역시 조미료인 것 같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비밀은 조미료라도 엄마의 맛에는 조미료를 이기는 무언가가 있다! 였습니다.

아마 제가 미원을 넣어도 엄마가 만들어주던 그 맛에는 이르지 못할 거예요.

 

 

엄마를 보내드린지 벌써 8년이나 지나고나니, 이제 가끔은 엄마 얼굴이나 목소리가 가물가물할 때도 있어요.

그래도 엄마가 해주시던 그 음식들의 맛은 떠올릴 때마다 항상 생생해서, 그럴 때마다 더 많이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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