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칼 이야기

2015.06.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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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가에서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에요.

 언젠가부터 낯선 부엌칼 하나가 등장했어요.

 어, 그런데 칼의 로고를 보자 이 칼의 정체를 알 수 있었어요.

 홈쇼핑 언니야들이 마르고 닳도록 찬양하던 '헹켈'의 칼이었죠.

 

 라면에 들어갈 청양고추를 써는 게 칼질의 거의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괜히 칼이 잘 듣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본가에서 나오면서, 어머니께 칼을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어요. 

 어머니는 쾌히 승낙하셨어요.



 그리고 이사를 마치고 얼마 뒤에, 어머니께 전화가 왔죠.

 제게 주신 그 칼이 알고보니 대단히 비싼 거였다고요.

 당연히 아시고 제게 주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 칼을 구입한 사람은 아버지였어요.

 알고 보니 여태껏 주방 살림의 반 이상을 아버지가 채우셨다고 해요.

 세상에나, 주방일이라곤 평생 해본 적 없는 아버지가 주방 살림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줄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좋아했던 칼의 정체에 의문을 갖게 되었죠.

 아버지는 여태 다른 이들에게 속아서 산 물건이 많았다는 점,

 헹켈 짝퉁이 그렇게나 판을 친다는 점...

 하지만 뒤늦게 구입한 옥소의 칼보다, 확실히 손에 감기는 느낌이 있었어요.

 옥소 칼도 아주 싸구려는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여전히 헹켈의 칼이 정품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이제 칼의 이가 조금 나갔어요.

 5000원짜리 칼갈이로는 절대 회복 불가라, 언젠간 업자 분께 맡겨서 오래 두고 써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부엌칼 같은 건 정말이지 오래오래 쓰는 게 진정한 멋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전부터 막연하게 갖고 싶었던 중식도의 로망에 이연복 셰프와 백종원 씨가 불을 지펴버렸어요.

 결국 헹켈을 저버리고 마사히로의 중식도를 무턱대고 오늘 주문해버렸다는 것이 이 장황했던 부엌칼 이야기의 끝입니다.

 하지만 새 칼이 도착하면 헹켈 것도 같이 데리고 가서 숫돌맛 좀 보여주려고요.

 

 뭐 연장을 바꾼다고 훌륭한 목수가 되지는 않겠지만, 훌륭한 목수가 아니라도 특별히 마음에 드는 연장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이... 이게 아닌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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