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27 14:46
4월 내내 몸이 안좋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나이먹으면 고뿔이 무섭다더니 감기가 도무지 떨어지지 않네요. 이불쓰고 누우면 으슬으슬 떨렸다가 잠에서 깨면 땀에 흠뻑 젖어 깹니다. 이 와중에 제가 꼭 봐야겠다고 생각한 작품이 있으니 그것이 엑스 마키나입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오는 주요 인물은 세 명이고, 이 세 사람이 불꽃 튕기는 연기를 합니다. (연기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남자 두 명의 연기력은 뛰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각본이 좋았다 싶네요.)
엑스 마키나의 주인공인 A.I. 역 여성은 Alicia Vikander. 이 아가씨는 이상하게도 머리카락이 없는 로봇 상태가 머리칼 있는 배우사진보다 더 예쁩니다. 이 아가씨 말고도 서치엔진 블루북 (미래의 구글)의 사장인 네이선 역할을 맡은 오스카 아이작, 튜링 테스트를 맡은 프로그래머 칼렙 역을 맡은 Domhnall Gleeson, 이 삼각형이 제대로 앙상블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은 네번째 인물로서 쿄꼬 (소노야 미즈노)가 나오긴 하는데 이 쪽은 감정표현이 절제된 편이라 인물이라기 보다는 정물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이 작품은 연극으로도 충분히 옮겨질 수 있고, 꼭 연극으로 옮겨졌으면 합니다. 저예산 영화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과연 저예산 영화 답습니다. 작은 세트장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 영화에서 매력적인 건 권력관계입니다. 블루북의 사장 네이선은 칼렙에 있어서는 재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고용주로서의 힘을 행사하죠. A.I.인 에이바는 튜링 테스트를 하는 칼렙에게 성적인 매력을 어필해서 이성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합니다. 프로그래머 칼렙은 네이선에게도, 에이바에게도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에이바와는 달리 자유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장 권력의 밑바닥에 있는 것처럼 보이던 쿄꼬가 네이선을 죽입니다. 이 권력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이 사실은 성적인 긴장감보다 더 높습니다. 네이선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내거나 대화의 방향을 바꿀 때, 혹은 지적인 능력을 보여줄 때, 칼렙은 "그는 모짜르트와 같은 천재다"라며 질질 끌려가게 됩니다. 네이선은 어떤 의미에서 조물주와 같고, 칼렙과 에이바는 아담과 이브 같았는데, 이 이야기에서 이브(이바)는 아담을 버리고 떠납니다. 칼렙이란 이름의 의미는 "신뢰 깊은" 이고, 에이바는 "새와 같은" 이란 뜻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면 많은 남자들이 이바에게 "저런 **이 있나" 하고 화를 내게 되지 싶네요. 저는 일본남자들이 일본 여자들을 비하하는 말도 들었고 (일본 여성은 학벌, 월급, 키 이 셋이 크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는다), 중국남자들이 중국여자들에 진저리내는 소리도 들었고, 한국남자들이 한국여자들을 혐오하는 소리(김치녀, 된장녀, 보슬아치)도 들었는데, 에이바야말로 전 세계 남자들이 국경을 뛰어넘어 증오를 퍼부을 수 있는 여성상이지 싶습니다. 국경과 상관없이 남자가 여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 - 나보다 못한 여자였는데, 어느덧 나를 넘어서서,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버리고 달아나는 여자 - 를 보여줍니다. (에이바는 여자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gender를 부여했고 sexuality가 있고 성행위가 가능하며 성행위에서 A.I.가 쾌락을 느낀다고 대화중에서 나옵니다).
물론 저는 칼렙에게 너무나 안스러움을 느꼈고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바에게 격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에이바가 자유를 얻은 것은 좋은데 자기를 처음으로 사랑해준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어야 옳았는지? 배신과 잔인함이 진화한 A.I.의 진면목이라면 진화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칼렙은 죽으란 말인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로튼 토마토 지수 90%를 달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막판 구성이 좀 허술하지만 초반의 긴장감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 합니다. 여기 나온 배우들은 앞으로 굉장한 주목을 받게 될 것 같네요. 제 생각에는 쿄꼬역, 네이선 역, 칼렙 역, 그리고 에이바 역 순으로 좋은 캐스팅 기회가 터질 것 같습니다.
2015.04.27 14:52
2015.04.27 14:55
결말에 칼렙을 인조인간으로 만들어서 같이 데려가기만 했어도 흥행이 더 잘됐을지도 몰라요. "서치 엔진시대의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란 평가를 생각해봤을 때 그런 결말이 말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2015.04.27 14:59
한국에는 이미 개봉해서 내려간지 오래되었습니다.
저는 남주인공 입장에서는 배신을 느꼈을지 몰라도 에이바 입장에서 그게 배신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어차피 처음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모두를 이용해 먹은 거라고 봐서...
A.I. 진화의 끝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정도로 봤어요.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든 사용한다.
게다가 에이바 자신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남주인공)에 대해 별 걱정도 안 할 듯 싶습니다.
2015.04.27 15:08
당연히 배신이죠. 신뢰를 갖도록 유도를 하고 앞으로 같이할 미래(데이트)도 약속하고는 상대를 굶어죽게 내버려두었잖아요.
2015.04.27 15:01
저는 칼렙에게 안쓰러움을 느끼지 못했고, 에이바에게 분노하지도 않았어요. 에이바 행동의 일관성을 이루는 가치관이 무엇인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것은 인간이 아니고 여성은 더더욱 아니죠. 자신이 가진 특성들을 소유하고 있을 뿐, 그것들이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꺼라 생각합니다. 특히 단색과 다색 세계를 상상하는 칼렙에게는 감정이입이 되질 않았습니다. 제게 영화는 사고능력이 뛰어나지만 물리력은 없는 천재가 감금당한 공간에서 나머지를 얻어나가는 과정으로 보였습니다. 씁쓸했다면 칼렙보다는 네이든의 오만함이 아쉬웠죠. 자신의 창조물들을 (세심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멍청이 취급했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로봇들 간의 속삭임. 도대체 어떤 언어로 대화했을까요?
2015.04.27 15:07
쿄꼬에게 높은 지능이 없다고 봤기 때문에, 에이바의 설득으로 네이선을 죽이는 부분이 말이 안된다 느꼈어요. 하긴 강아지 수준의 지능만 있었어도 네이선에게 증오심을 느꼈을 것 같기는 하지만요.
2015.04.27 15:17
겨자_ 아, 저는 설득했다기보다는 특수한 접근으로 재프로그래밍 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서요. 아예 새로 짜버렸을 수도 있고, 간단한 논리오류로 인간 살해를 가능케 한다던가, 시야를 차단하고 몇 걸음 걸어라고 했을지도 모르죠. 칼렙한테 피부 아랫부분을 보여주는게 에이바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면 지능이 낮기보다는 가능성을 억압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나 싶습니다.
2015.04.28 00:53
2015.04.27 16:09
저는 에이바의 성별보다 인공지능에 더 중요성을 두어서 그런지 남자들에게 적개심을 느끼게 한다는 감상에 깜짝 놀랐습니다. 네이든이건 칼렙이건 에이바를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로보트로 보는데, 에이바는 어느새 인간못지않은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우선할 수 있게 된 거라고요. 자유롭게 인간으로 행세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굳이 칼렙을 챙길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그게 더 인간적인 행동이라서요?
2015.04.27 16:28
칼렙이 흔들리게 된게 에이바가 여성이라 느끼도록 했기 때문이죠.
때문에 에이바를 여성으로 느낀 남성 관객은 칼렙과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분노를 느낀거죠.
여기에서도 어떤 분이 포주와 창녀 그리고 그녀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였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을 정도죠.(그분은 분노하며 적은 글은 아니였겠지만요)
2015.04.27 20:50
그게 더 윤리적인 행동이라서요. 만일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나은 점이 없다면 그건 너무 암울하지 싶어요. 물론 진화와 생존이라는 관점에서는 에이바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2015.04.27 22:37
2015.04.28 01:51
"법인"이 인간이라면 참으로 무책임하고 잔인한 인간일 것이라고 제 친구가 말한 적 있죠. 그렇게보면 네이선이 에이바를 디자인할 때, R&D 시설을 떠나면 살 수 없도록 제약을 걸어놨어야 하지 싶어요. 주라이 공원의 공룡들이 라이신을 계속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2015.04.27 17:07
@잡음 저요? http://www.djuna.kr/xe/index.php?mid=board&document_srl=12153947
에이바로서는 칼렙과 같이 가기, 두고 가기 둘 다 리스키한 결정이죠.
저울질한 결과, 칼렙같은 찐따남(착하지만 의지는 안될)과 가느니 그냥 나혼자 갈래.. 라고 판정한 것일지도요.
영화니까 그냥 넘어갔겠지만 .. 마중 나온 헬기 조종사가 직무태만아죠 칼렙 태우러 왔지 가이노이드 태우러 온게 아닐텐데?
2015.04.28 00:55
2015.04.27 17:13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이.... 로봇이 인간을 찌를때 전혀 망설임과 격렬함 없이 기계적으로 스윽 찔러넣는 장면이었습니다. 로봇의 본질에 대한 일면이 잘 드러났던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2015.04.27 20:54
뼈 사이로 슥 넣죠. 스시 만들 때 생선 자르듯이. 뼈에 부딪쳤으면 네이선이 좀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는데요.
2015.04.27 17:37
N氏_ 그 부분도 흥미진진하지 않나요? 헬기 조종사를 어떻게 설득했을지 이리저리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감독이 알면서 가렸다기보다는 짜넣기 귀찮아서 잘랐을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2015.04.27 19:42
2015.04.27 20:51
저도 바로 주라기 공원 생각했어요. 그리고 역시 administrator 포지션은 함부로 내주면 안된다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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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짧게 개봉 후 내려갔습니다. 한참 국제시장이 흥행 중이였어서 보기 어려운 시간대에 걸려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