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19 23:44
빌브라이슨의 몇 책을 좋아합니다. 발칙한 유럽 산책과 나를 부르는 숲을 가장 즐겁게 읽었고, 발칙한 미국학이나 대단한 호주여행기도 재밌게 봤어요.
활짝은 아니지만 낄낄 웃는 데 최적화된 책인 것 같아요. 울적할 때 보기 위해 몇 문단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듀게분들께도 유용하지 않을까 해서 몇 가지 올려봅니다. 너무 재밌어서 골라 올리기가 아쉽군요!(근데 혹시 저작권 위반이면 알려주시면 감사...)
<발칙한 유럽 산책 中>
버스는 정확히 정오에 출발했다. 하지만 이 버스의 모든 것이 승객의 '불편'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점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자리는 히터 옆이어서, 위로는 찬바람이 들어와 오들오들 떨고 있는 데도 히터 옆의 왼쪽 다리는 얼마나 뜨거운지 다리털이 바지직하고 타 들어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좌석은 웬 난쟁이가 보통 크기의 사람들에게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설계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좁았다. 내 앞에 앉은 젊은 녀석은 의자를 얼마나 뒤로 젖혔는지 머리가 내 무릎에 턱 하니 닿을 정도였다. 괘씸해서 그 녀석 얼굴을 봤더니 '흠, 하느님도 유머 감각은 있단 말씀이야'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중략) 의자 옆쪽에는 손잡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걸 당기면 좀 더 편안한 자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내심 들었다. 그러나 오랜 경험으로 봤을 때 시험 삼아서라도 그걸 건드렸다간 등받이가 뒤로 털썩 주저 앉으면서, 내 뒤에 앉은 상냥한 할머니의 무릎을 으깨 버릴 것 같아 그냥 불편한 채 있기로 했다.
<나를 부르는 숲 中>
작가: "그래, 그게 문제될 건 없어. 그냥 함께 가는 거야. 그런데... 갈 준비는 되었니?"
카츠: "두말하면 잔소리지."
작가: "몸 상태는 어때?"
카츠: "좋아. 요즘 매일 걸어 다녀."
작가: "정말? 이번 산행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 텐데..."
카츠: "문제될 것 없어. 보험료를 안 내서 차가 압류되었거든."
작가: "아!"
<발칙한 미국학 中>
(당황스러운 순간들에 대한 글에서)
또 한번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무릎에 음료수를 엎질렀다. 승무원이 와서 할머니의 무릎에 묻은 음료수 자국을 닦아주고 내게 음료수를 새로 가져다 주었지만 나는 그것을 받자마자 또 다시 할머니에게 쏟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새로 가져다 준 음료수를 받으려고 팔을 뻗은 기억, 그리고 내팔이 마치 <죽지 않는 팔> 같은 1950년대 공포영화에 나오는 싸구려 소품처럼, 들고 있던 음료수를 알머니 무릎에 흩뿌리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던 기억은 있다.
할머니는 나 때문에 연거푸 물에 빠진 사람에게서 볼 수 있을 법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오'로 시작해서 '제발'로 끝나며, 그 사이에는 내가 일찍이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수녀에게서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어휘가 들어간 맹세의 말을 진지하게 내뱉었다.
(노화에 관해 이야기하며)
나에 관한 한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앉아서도 잠을 잘 수 있고, <사인펠드> 재방송을 이미 본 것인지도 모르고 몇 번씩 다시 볼 수 있으며, 세 번째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을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규칙을 열거하며)
식탁보만한 크기로 확대 복사하거나 같은 서류를 100장 넘게 복사한 뒤 복사기를 초기화시키지 않은 사람은 복사기 담당 경찰에게 체포되어 토너를 한 컵 들이켜야 한다.
2015.06.20 00:11
2015.06.20 00:14
옮겨적을 때 중략을 해버렸네요.ㅠㅠ 신랄하지만 나름의 따뜻함이 있는 빌브라이슨의 유머를 좋아하는데, 호응해주시니 감사해요(제 글도 아닌데 왜 뿌듯한 것일까요.--) 노화에 관한 건 이제 제 얘기가 되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건망증 흐규흐규
2015.06.20 00:24
2015.06.20 00:26
정말... 통화하면서 휴대폰 없어졌다고 찾는 수준이라 건망증 무섭습니다.
2015.06.20 00:50
오, 저도 책 구해서 읽어 봐야겠어요. 딱 좋아하는 유머스타일!
2015.06.20 00:54
책이 그림 없이 오롯이 글뿐이라 깝깝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재밌습니다^^
2015.06.20 01:41
하루 종일 이런저런 글을 읽어 꽤 피곤했는데도 이 글의 꽤 초반에서(더 콕 찝어 보자면 '바지직')에서 퐝 터졌네요. 빌 브라이스, 기억해 두겠어요. :) 딱 비슷한 건 아닌데 대니얼 클로즈의 만화책 <윌슨>이 떠오르네요.
2015.06.20 03:26
저도 바지직부터 빵 터졌었어요! 만화도 좋아하는데 추천 감사합니다.
2015.06.20 02:40
흠. 수녀에게선 결코 들어본 바 없는 '맹세의 말'은 swear를 번역한 게 아닌가 싶은데... 저자는 욕설이란 뜻으로 쓴 게 아닐까 싶습니다.
2015.06.20 03:32
개인적으론 수녀인 할머니가 내게 욕했다는 걸 저런 문장으로 돌려 표현해서 더 재밌게 느껴졌는데, 실제론 욕했다고 표현한 거고 번역의 실수로 돌려말한 것일 수도 있단 말씀이시죠?
혹시나 해서 구글에서 원문이 있나 찾아보니 다음 문장에 해당되는 듯해요.
"The lady looked at me with the stupefied expression you would expect to receive from someone whom you have repeatedly drenched, and uttered an exceptionally earnest oath that started with "Oh" and finished with "sake" and in between had some words that I have never heard uttered in public before, certainly not by a nun."
2015.06.20 06:00
아.. 저도 빌브라이슨 너무 좋아해요. 유럽편이었나요, 엘리베이터에서 일본인 관광객과의 에피소드 잊을 수 없는데..
물론 미국인의 시각으로 본. 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유럽 문화의 차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긴 하죠..
2015.06.20 15:30
2015.06.20 19:16
2015.06.20 09:09
저도 나를 부르는 숲 정말 좋아합니다. 이름은 잘 기억안나는데, 여정중에 만났던 몰상식여성 생각나세요 ? 계속 코를 풀면서 여러가지로 아는척을 해서 두사람을 정말 괴롭게했던.. 나중에 카츠가 했던 처절한 복수가 생각납니다.
2015.06.20 10:52
2015.06.2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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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재밌을 것 같아요. O.O 이런 재미난 책이 있는 줄 미처 몰랐네요.
버스 안 얘기에서 (중략) 부분이 몹시 궁금해요. 왜 중략하셨어요. ㅠㅠ
노화에 관한 부분은 제 경우도 그렇고 연세 많으신 부모님과 함께 살면 매일 매일이 코미디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