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담...(아지트에 관한)

2015.05.20 06:35

여은성 조회 수:920


  1.요즘은 술을 마시고 돌아가기 전에 몇십분...또는 한시간 정도 사람 없는 밤거리에 가만히 서 있곤 해요.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나 신호위반하며 내달리는 자동차들이 도로를 긁는 소리 등 밤거리의 고동이 느껴져서 좋은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반성하는 시간이예요. 거대한 도시의 초고가가치 자산들을 보며 자신의 하찮음에 대해 분노하는 시간을 가지는거죠. 이러고도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으면? 집에 가서 KBS 신년기획 위기의 남유럽을 가다를 정주행해요. 그러면 정신이 아주 번쩍 들죠.


 

 2.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정신차려야 했던 대학 시절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살 수 있었어요. 근자감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온몸에 흘러넘쳤죠.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하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교수에게 먼저 인사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일 같은 거요.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 클럽에서 떨어져나온 저 같은 사람들이 한 과방에 한명씩은 있었는데 학부 전체를 뒤져보니 그래도 제법 세력이라고 할 만한 머릿수를 만들 수 있었어요. 물론 학교 과방이나 복도를 점거하고 점령군 놀이를 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냥저냥 학교에서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어요. '내일 과제 걱정은 내일 모레 하는 거야'같은 말을 외치며 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렸죠. 눈은 다락같이 높아서 커피를 마실 땐 소라야마 하지메나 시드 미드, 르네 그뤼오 같은 거장들에 대해서만 얘기했어요.


 흠.


 어쨌든 뭔가...다른 사람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제 경우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평화에 취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전쟁처럼 살아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곳까지 오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다른 사람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2학년 1학기 때부터 늘 공포감을 느꼈어요. 이 사람들이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순간은 올 거고, 미래를 걱정하는 것을 시작하면 나랑은 절대 다시는 놀아주지 않을 거란 거에 대해 말이죠. 결국은 모두가 뿔뿔이 흩어질 거란 게 무서웠어요.


 그러던 어느날에 아지트를 만드는 것에 대한 얘기가 나왔어요. 어떤 적당한 곳에 꽤 넓은 사무실 같은 걸 빌려서 게임기도 가져다 놓고 아주 큰 모니터, TV도 가져다 놓고 먹을 걸로 가득 찬 냉장고도 가져다 놓고 해서 다들 오고 싶을 때 와서 게임하고 싶은 사람은 게임을 하고 작업을 하거나 만화를 그리거나 할 사람은 책상에서 그림을 그리고 하는 그런 아지트요. 졸업한 뒤에 그런 걸 만들어서 굴려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다들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쳤어요.


 지금이라면야 저런 얘기가 나오는 순간 '어디고 월세는 얼마? 돈은 얼마씩 갹출?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건 뭐가 있지?'뭐 이런 계산기부터 두들기기 시작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계산 같은 거 없이 마음만 먹으면 그런 것쯤 뚝딱 만들 수 있을거라고 모두가 별 생각 없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떄 '아 이 멤버가 졸업 후에도 헤어질 일은 없겠구나...'하고 안심했어요.


 뭐 그리고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서 졸업생이 됐어요. 졸업전시회 하고 몇 가지 감동적일 만한 말도 듣기 했는데...결국 미술 같은 건 안하기로 했어요. 그때쯤엔 좋게 말하면 정신을 차렸다고 해야 할지...내가 어딜 가든 이세상 대부분의 장소에선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걸 명확히 인지하게 됐어요. 그때쯤엔 나자신에 대해, 그리고 이세상에 대해 꽤나 잘알게 됐어요. 나는 인기있는 타입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학교는 돈을 내고 다니는 곳이니까 그런 게 문제가 안됐겠지만 사회는 별것도 아닌 녀석이 뻣뻣하게 굴어 봐야 비웃음과 조롱만이 돌아오는 곳이라는 거죠. 별것도 아닌 녀석이 집단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자신의 모습대로 사는 게 아닌 좋은 사람, 만만한 사람을 연기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져 주는 거란 것도 잘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져 줄때 웃는 얼굴로 져줘야 하지, 삐진 얼굴로 져주면 그들은 그 삐진얼굴을 기억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태어난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녀석들은 매일 지각을 하거나 아무리 까불어대도 귀여움을 받지만 별것도 아닌 녀석은 타이밍 안 좋은 '아니오'나 '싫어요'라는 말만 해도 나댄다는 말을 듣죠. 물론 이건 불합리하지만 어쩌겠어요. 그저 그런 놈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은 노벨상이나 예술가따위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하게 만들 만한, 내 앞에선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만들 만한 무언가를 손에 쥐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게 됐어요.




 3.졸업하고 나니 그들과 더이상 연락하지 않게 됐어요. 졸업하고 사회를 경험하니 그들의 날카로운 면이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아서요. 아니면 슬슬 내가 '이제 나는 저놈들의 날카로움을 참아주기엔 너무 대단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서-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지만-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고요. 둘 다일지도 모르죠. 그래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무던한 사람을 하나 알아서 종종 그에게 그들의 안부를 물어보곤 했어요. 그가 가끔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러냐?'고 했지만 그들이 먼저  연락해오기 전에는 그들과 직접 얘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가끔 그들 중 하나가 뭘 하거나 또는 게임 대회에 나오거나 하면 인터넷으로 지켜보곤 했어요. 


 

 4.흠



 5.그리고 여러가지 일이 있고  약간의 여유를 가지게 되고 뭐 그랬어요. 그러던 와중에 그 아지트 계획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 아지트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뭘 넣을지 어떻게 꾸밀지 어디에 만들지 즐겁게 고민해 봤어요.


 그런데 아마 그 아지트를 만들어놓고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려도 안 돌아올 거 같아요. 그들은 아마 그 여름날 아지트에 대해 말한 걸 까먹고 있을 것 같아요. 그건 글리에서 윌의 예전 선배녀가 꿈꿨던, 다시는 오지 않을 롤러장의 부흥 같은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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