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 페미니스트 항목

2015.06.22 21:13

쿠융훽 조회 수:1074

딴 데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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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페미니스트 항목에 여권신장 및 남녀평등 옹호자 말고도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는 정의도 나오기에 여성단체에서 이의를 제기했으나 국립국어원은 7-90년대 신문에 그런 용례가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며 그냥 놔두기로 했다는데 정치적 이념적 차원을 떠나 여러모로 매우 비전문가적인 실망스러운 반응이므로 사전편찬 측면에서 접근하여 개선을 유도하면 어떨까.

주요 유럽 언어 사전을 다 뒤져봐도 페미니스트는 여권신장 및 남녀평등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의 뜻만 나올 뿐,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는 정의는 일본어 사전에서만 나온다. 물론 한국어는 일본어 영향이 크고 한국어 사전이 일본어 사전을 참조한 것도 사실이니 여기서 이 자체를 문제로 삼지는 않겠다. 과연 그런 뜻으로 많이 쓰였는지만 살펴보자.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는 용법은 70년대 신문에도 그렇게 자주 나오지는 않는다.
1969.09.27 매일경제: 주부에도 노임 달라 다섯 여인 시위 행진. 페미니스트로 칭하는 5명의 뉴욕시 여인들이...
1971.04.23 동아일보: 여성 유권자가 남자보다 6만9천여명이나 더 많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려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안 된다고...
1971.12.08 동아일보: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이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부당히 싼 급료의 일을 주로 맡고 있으며...
1972.06.30 경향신문: 예수도 역시 남자였기 때문에 성의 불평등에서 오는 그 여성의 눈물을 뼈저리게 느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빈정거리는 과격파 페미니스트들도...
위 네 보기 가운데 '대통령이 되려면 페미니스트'는 좀 아리송한데 그냥 여권신장론자로 봐도 무방하다. 즉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는 일반적으로 쓰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한국어 사전은 용례가 너무 모자라고 사용 시기도 거의 표시해 두지 않는다. 조선시대 어휘나 돼야 옛말이라고 나올 뿐, 이를테면 20세기 초중반과 지금은 뜻이 달라진 말에 관해 구체적으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사전은 어휘 기록의 구실도 하므로 그런 용례가 쓰였다는 것도 적어둬야 하지만 문제는 국어사전 용례에 출처 연도까지 나온 경우가 극히 드물기에, 다른 낱말은 다 놔두고 페미니스트의 정의 중 논란이 많은 부차적인 것만 연도를 밝히기도 구차해진다.

사실 사전적 정의는 빗대거나 비꼬는 뜻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안 그런 경우도 있다. 물론 칼로 무 자르는 듯한 기준은 없다. 언어는 매우 유연하고 유동적이므로 우리는 모든 어휘를 비유적으로 쓸 수 있다. 그 중에서 많이 통용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게 있을 뿐이다. 예컨대 '쟤는 뭉게구름이다'는 잘 알아들을 사람이 드물지만 '쟤는 컴퓨터다'는 실제 컴퓨터라는 기계가 아니라 컴퓨터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거의 누구든 알아듣는데, 사전의 컴퓨터 항목에도 대개 그런 정의는 없다.

왕과 대통령의 경우를 보자. 왕은 오래된 말이다 보니 비유적인 뜻도 사전에 나오지만 대통령은 안 그런데 실제로는 '문화/힙합 대통령' 따위처럼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princess 항목을 보면 '공주'의 원뜻과 더불어 뛰어난 여자, 응석받이, 애칭 공주님 따위의 뜻이 함께 나오는 반면 feminist에는 부차적인 뜻이 없다. 흥미롭게도 실제로 영국은 '공주'가 있으나 한국은 '공주'가 없고 (비유적이면서도 실질적인 공주 겸 왕비 겸 여왕이 있다고 볼 수는 있으나) 한국어에서도 응석받이나 애칭의 공주는 흔히 쓰이는 데도 공주 항목에는 재미없게도 원뜻만 나온다. 이처럼 국립국어원 사전은 비유적 용법 등재의 기준에 뚜렷한 일관성도 없다.

누군가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페미니스트로 일컫는다면 그건 오용 내지 이제는 잘 봐줘야 개인어일 뿐이다. 게다가 어떤 낱말에 비꼬거나 빗대는 용법이 있다고 사전에 다 써 놓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 국어사전 페미니스트 항목에 굳이 별로 잘 쓰지도 않는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는 정의를 놔둘 까닭이 없다. 혹시나 '국립국어원'이라는 항목에 '국어사전을 어설프게 만드는 사람 또는 무리'라는 뜻을 덧붙인다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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