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을 다녀와서 뭉클~

2015.11.18 15:21

어디로갈까 조회 수:1912

마실 만한 게 없어서 오랜만에 근처 편의점에 다녀왔습니다. 현실감을 없애는 밝은 백색 조명 아래 놓여 있는, 아무런 과거도 사연도 역사도 없어 보이는 청결한 포장의 물품들을 천천히 구경했는데, 그러다 오~ 낯익은 포도주 한 병을 발견했지요.  유럽에 머물 때 더러 선물받아봤던 Pio Cesare Barolo였어요.  현지에서 80 유로쯤 하는 제법 비싼 와인이 동네 편의점 진열대까지 진출해 있더군요.

어느 해 겨울, 저는 밀라노 두오모 광장의 꽃집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밤이었고 느닷없이 잠깐 눈발이 흩날리던 중이었는데, 한 남자가 노란 가로등 켜진 광장을 빠르게 달려오더니 바톤터치라도 하듯 제 손에다 포도주 한 병을 쥐어주고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저편으로 사라져갔어요. 순식간의 일이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한동안 인지가 안 되었죠. 주변부의 사람들이 그 해프닝의 의미를 묻는 듯 저를 쳐다보고 있었고,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불빛들은 무심히 제각각의 공간을 펼쳐갔고, 제 손 안에는 '붉은 어둠' 피오 체사레 바롤로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첫사무를 보고 꾹꾹 한걸음씩 힘주어 밟으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어인 이유에선지 저는 바둑소년 히카루를 떠올렸습니다. 천 년 전의 바둑 고수, 본인방의 명인 sai의 혼이 그에게 깃들고, 히카루는 정진하며 조금씩 바둑을 배워가지만 어느 날 사이는 히카루를 떠나버렸죠. 홀로된 히카루는 바둑을 끊고 폐인처럼 지내다가 문득 자신이 두는 바둑의 기법 안에 '사이'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그 이야기 말이에요. 이별이 창조라고 한용운이 노래했는데, 뭐 그런 셈인 거죠. 만남과 사랑의 형식이 시작되고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것. 

아무튼 피오 체사레 바롤로를 마시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입니다. 마침 적당한 배경으로 빗님이 또 내리시네요. 마음 깊이 담아 두었던 '기쁜 삶'이 잠깨기를 기도해봅니다. 날마다 조금씩 '온전한 나'가 되기를. 평화와 의미가 우리를 지켜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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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롤로를 자주 마시던 무렵, 끄적였던 메모 하나 찾아 덧붙입니다.)

냉장고를 열면 텅 빈 공간에서 오렌지색 불빛만 은은하게 퍼져나온다. 아랫칸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약속을 한다. "미안. 내일은 꼭 장을 봐올게."
포도주의 이름은 Pio Cesare Barolo. 이 진중한 남자는 나와 자주 만나면서도 따뜻한 미소 이상의 친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예외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마워. 난 너무 오래 묵어서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변하고 나서 네가 이전의 날 알아보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던 참이야.  내가 품고 있던 의문 중 하나는 왜 사람들은 변할까? 하는 거였지. 하지만 이젠 알겠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도 곧 변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네가 오늘 나를 찾지 않았어도, 나는 더욱 캄캄하게 어두워져서 여기 남아 있었을 거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러니 오늘은 나를 마시지 않는 게 좋겠다.  어제도 넌 다른 병 속의 나를 마셨잖아. 
어느 날 네가 느리게 눈앞을 지나가는 시간을 견딜 수 없을 때, 그때 내가 생각나고 내 향기가 어땠는지 궁금해지거든, 나를 밝은 곳으로 데려가 음악을 틀어놓고 눈을 감아봐. 그리고 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보는 거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 변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거라 믿어. 자동보법으로 움직이는 시간의 의미도 알 수 있을 거야."
거기에서 보롤로의 말은 그쳤습니다. 그때쯤 그는 내 안으로 건너와 변해버렸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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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지금 제가 기록하는 것보다 보롤로의 말은 더 멋졌습니다. 편집창을 열고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그의 말을 타이핑했는데, 그만 버튼을 잘못 눌러 글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어요.

아는 길을 간다는 건, 반드시 그 길 위에 내가 있는 게 아닌 것일 수도 있죠. 아는 길 위에서 저는 다른 길을 생각합니다. 모르는 길을 갈 때에만 모든 디테일들이 낯선만큼 생생한 법이죠. 아는 길은 없는 길이고 죽은 길이에요. 심지어는 모르는 길만이 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 번 썼다가 잃어버린 글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 글을 다시 쓰는 일은 웬지 아무도 없는 해변을 유령이 되어 떠도는 기분이 들어요. 

그렇듯, 모를 때에만 무엇에 사로잡힐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쓰고 나서 잃어버린 글을 모른다는 건 그 자체가 하나의 앎이겠죠. 그러므로 사로잡혀 쓴 글을 똑같이 다시 쓸 수는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미 '모름'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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