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청소

2015.11.20 12:10

로치 조회 수:2371

국립중앙박물관 고대관에 가면 신라시대 금속 유물로 귀이기가 있습니다. 

이미 그 시대에 선조들은 쪽집개, 귀이개 일체형의 소도구를 제작해서 썼지요. 과연 황금의 도시 계림.

과천 동물원 유인원 우리에 가면 침팬지 친구가 저희들끼리 서로 귀 후벼주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사이좋은 애들끼린 서로 동무의 머리를 허벅지에 얹어 두고 손가락으로 후벼 주는데, 간혹 나무가지로 자기가 후비는 친구도.

시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시훤하고 개운한 귀에 대한 열망. 


교탁 앞이 지정석이고, 남들 수험준비 할 때 부리부리 백과사전 같은 거 탐독하고 있으면 별명을 얻습니다.

선생님들은 저를 도인이라고 불렀고, 친구들은 저를 폐인이라고 불렀지요. 절친이 셋 있었는데

한 놈은 공기로 가는 자동차 연구를, 한 놈은 허공답보를, 한 놈은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들 차를 들여다 보며 카오디오 구경을.

그때 사람들은 저희를 병신 사인방이라 불렀지만, 저희... 그래도 지금 밥은 먹고 삽니다

지금 병신이라 괄시 당하는 고딩이 있다 해도 그리 크게 좌절할 일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밥그릇 다 챙겨서 나는 법이니. 


평소에는 폐인이라고 괄시를 해도 무슨 일이 생기면 학급 아이들은 저를 찾아 왔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이죠.

나 눈이 노래. 술을 줄여. 나 자꾸 설사를 해. 굶어. 손마디에서 소리가 나. 손 꺾고 그러는 거 아니야.

편작이 살아 돌아왔도다 명성이 자자하던 어느 날, 저의 이름은 흘러흘러 교무실까지 들어가니, 수학 선생님께서 저를 호출.

귀를 문지르던 그가 저를 앉혀두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귀를 팠는데 귀에서 자꾸 바람소리가 나네?

그는 귀를 후볐다는 도구를 꺼내어 보였습니다. 이쑤시개였어요. 

이런 유인원만도 못 한 자를 봤나. 그대가 칠판에 예제만 푸는 이유가 있었구료?


아직은 덜 어그리 하던 시절, 암수 서로 정다워서 연애를 할 때는 귀찮아 하는 애인을 독려해서 해결할 일이지만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는..." 지금, 간지러운 귀를 해결하는데 믿을 것은 오로지 오른손 뿐이지요..... ? ......

모든 욕망이란 게 다 그런가 봅니다. 간질거려 죽겠는 지경에 면봉으로 겉만 살짝 닦아내는 법이 옳겠다만, 그게 그렇게 됩니까?

맥주 한 캔을 딱 땄는데 정확히 150ml에서 멈추고 미련없이 쏟아 버릴 수 있어요? 그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버럭)

급기야 다니는 이비인후과 형님께선 귀파기 금지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다 저는 ASMR 의 세계를 접합니다. 유튜브 채널들을 돌아 보다가 어느 목소리 예쁜 여자분이 묘하게도 귀를 정말로 파는 듯한,

신묘한 사운드 효과를 내는 영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찾아 보니 이 ASMR 이라는 영상이 세계 각지에서 업로드되고 있었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고 폐인은 많은 법입니다. 음지에서 숨어 암약하던 만국의 폐인들이 모여 일신의 흡족이라는 일념하에 단결,

서로 자발적으로 나서 솜씨를 공유하고, 의견을 주고 받으며 자아비판 속에 성장하는 모습, 볼셰비키도 못 한 일을 하고 있어요!

헤드폰을 끼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사부작 사부작 누군가 귀를 파주는 기분, 유희열 같은 중년이 되는 것이 목표인데,

꽃미모의 길은 멀고, 변태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좋아. 어서 빨리 파줘요. 세반고리관 깊숙이 까지....


채찍과 촛농이 난무하는 밤이 지나고 나면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하죠. 플러그가 뽑혀 나간 현실에는 사부작 거리는 목소리도,

고막을 간지르는 사운드 효과도 없어요. 이것은 마치, 게임 속 캐릭터의 전우애에 눈물 훌치다 엄마에게 등짝 맞는 것과 같은...

그러다 우연히 찾아 낸 대안이 블로어 사용입니다. 친구랑 상호 갈구다가 발견한 방법인데, 

카메라 청소도구인 블로어를 귀에 대고 훅훅 바람을 불어 넣는 거에요. 

간지럽다는 게 그래요, 귀지가 외이벽에서 떨어질랑, 말랑 치사하게 붙어서 약올릴 때 생기는 촉감이 간지러움 아니겠습니까?

바람을 훅훅 불어서 귀지를 날려 버리는 거지요. 저 처럼 한 번만 더 귀 팠다가는 절단 난다고 혼난 분 계시면 한 번 시도해 보세요.

당장 급박한 민생고는 해결 되고도 남습니다. 인생 뭐 있냐? 확 후벼 버렸다가 아파서 끙끙 앓느니, 잠깐 이상한 사람 되고 마는 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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