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16 14:45
요즘 이상하게 토요일마다 하늘이 온통 구름으로 가득하네요.
날씨가 이러하니 시를 좀 찾아서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도서관에서 <전봉건 시전집>을 빌려와 읽고 있는데 멋진 시들로 가득해요.
그 중에서 몇 편 가져와 봅니다.
꽃은
꽃이
아니다.
천상의 칼이
가장 밝고 맑은 바람의
고운 자락에서
찍어낸
살점이다.
그
살점이
뿜은
핏방울이다.
나비 한 마리
나는 알고 있다.
저 바람 속에서
떨리는 꽃,
떨리는 꽃잎 위에서
왜 나비 한 마리
왼몸 떨리고 있는가를.
어찌하여
타는 불꽃 그 위에서
불꽃 하나가 또 타고 있는가를.
불
한 가지 일이 남아 있습니다
내게는 두 개의 손이 있고
두 개의 손에는 열 개의 손가락이 살아 있습니다
나는 살아 있는 열 개의 손가락을 펴서 하늘로 뻗칩니다
이것이 내가 할 일입니다
그러면 손은 높이높이 아주 높이
올라가서 구름을 잡고 별을 잡고
무지개를 잡고 햇살도 잡습니다
하늘의 모든 것 햇살의 뿌리마저 잡을 때
내 손은 불이 됩니다
이것이 내가 할 일입니다
나는 불을 폅니다
나는 봅니다
짙푸르게 타오르는 내 손바닥에는
스무 살 난 사월이
스스로 살을 열어 흘린
넋이 보다 고운 피가 고여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할 일입니다
하루의 어둠이나
이틀의 어둠 혹은
일 년이나 십 년의 어둠에도
아니 그 백 배의 어둠
천 배의 어둠에도 삭지 않는 피를 잡고
오래 꺼지지 않는 불을 보는 일입니다
강물이 흐르는 너의 곁에서
이월은 오고 삼월은 오고
무너진 다리에도 사월은 오고
강물은 흐리고 그리고 그것은 나의 눈시울에
따뜻한 그것은 눈물이었다.
잃어진 것은 없었다.
불탄
나뭇가지마다 찌든 전사자의
아직도 검은 외마디 소리들을 발려내기 위하여
수액은 푸른 상승을 시작하고
155마일의 철조망이 에워싼 무인지대에서도
하늘은 푸르고 새들은 노래하고
꽃들은 한들거렸다.
잃어진 것은 없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자리에서도
잃어진 것은 없었다.
맑은 물빛 푸름 한점
아주 작은 별 한점
그렇다, 아무것도
잃어진 것은 없었다.
강물은 흐르고
무너진 다리에도
강물은 흐르고 흐르면서
개미보다 더 큰 사탕을 물고 간 개미에 대한 이야기 꽃 그늘에서 꿀벌을 위해 숨죽인 속삭임과
그러나 요란스럽게 꽃가지를 흔들면서 날개친 두 마리 새에 대한 이야기 줄지은 창문들이 마치
무슨 악보와도 같은 거리에 대한 이야기 열매 맺는 한 나무의 성장과 성숙 그 순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크나큰 고마움 가슴 벅찬 입맞춤에 대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
오직 그런 이야기만을
쉴새없이 쉴새없이 하였다.
잃어진 것은 없었다.
부러진 총검도
구멍 뚫린 철모도
반쯤 묻혀서 녹스는 들판
소리없이 부드럽게 휩쓰는 무수한 풀들의 손길
그 푸른 손길은 눈물겹다.
피얼룩 깁고 누빈 저고리 벗고
피얼룩 깁고 누빈 긴 치마 벗으면
목덜미에 가슴에 젖꼭지에도
허리에도 무릎에도 풀들 푸른 손길 휩쓸어
그 손길 가지가지 푸른 무늬
어지럽게 눈부시게 아롱지는 너.
오 너는 진정 눈물겹다.
잃어진 것은 없었다.
언제든
그렇다, 언제든
나를 눈떠 보게 하고
나를 노래하게 하고
나를 사랑하게 하고
나를 눈물짓게 하면서
나를 아름답게 하는 아무 것도
잃어진 것은 없었다.
이월은 오고 삼월은 오고
무너진 다리에도 사월은 오고
강물은 흐르고 그리고 그것은 나의 눈시울에
따뜻한 그것은 눈물이었다.
지금 아름다운 꽃들의 의미
꽃들은
지금 사랑의 깃발이다
비둘기 날개 앞세우고 트이는
다시 반드시 비둘기 날개 앞세우고 트이는
수없이 많은 내일을 위하여
그러한 내일에 비둘기 무리져 날개 치며 날개 섞는
지평을 위하여
그러한 지평의 무한 펼쳐짐을 위하여
무한 펼쳐지는 지평에
오 죽음의 비가
내리지 않기 위하여
오 죽음의 흰 눈도
내리지 않기 위하여
사랑하고 오직 사랑함으로써
장미의 이파리와도 같은 눈시울을 지닌
너와 나의 깃발이다
사랑의 깃발이다
보라
꽃들은 지금
나비의 폐허
창유리의 폐허
항아리의 폐허
꿀벌과 꿀의 폐허
장독과 김장독의 폐허에
어우러져 피는 것을
피어서 나부끼는 것을
꽃들은
지금 사랑의 깃발이다
사랑하고 오직 사랑함으로써
장미의 이파리와도 같은 눈시울을 지닌
너와 나의
그리고 또한
사랑하고 오직 사랑함으로써
장미의 이파리와도 같은 눈시울을 지닌
수없이 많은
동서남북 그 모든 너와 나의
너와 나의
너와 나의
깃발이다
작은
깃발
그러나
오 이 시대의 무지개의 폐허에 어우러져
오 이 시대의 무지개의 폐허를 뒤덮고서
피는 깃발이다
피어서 나부끼는 깃발이다
나부껴서 아름다운 깃발이다
꽃들은
지금 사랑의 깃발이다
노래의 쑥밭으로
새해에는
강 하나를 가져야겠어
이맘때엔 스케이트를 타고 썰매도 타고
백 개 천 개의 팽이를 굴려
얼어붙은 얼음장을 오만 가지 색깔
살아서 움직이는 현란한 무늬의
강물이게 해야겠어
여름엔 햇덩일 등에 메고
수영을 하고 일요일엔
낚시를 던져 붕어 메기
뱀장어도 건져올린다
그러다가 가뭄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으면
강바닥까지 들어올려
마른땅으로 타는 그 마음에
푸른 물의 폭포를 쏟아줘야겠어
새해에는
드높은 파도의 떼를 가져야겠어
봄에는 육지로 밀려가서
산마다 진달래 바다를 일렁이게 하다가
이윽고 푸른 기름방울 떨구는 풀잎 나뭇잎의 바다도
일렁이게 하고서 거기엔 온갖 짐승들을
들끓게 해야겠어
가을에도 육지로 밀려가서
왼산을 단풍으로 태우는
불놀이를 하다가 그러다가
배고파 쓸쓸하고 서러운 사람이 있으면
산뿌릴 잡고 흔들어
머루의 사태 다래의 사태
단밤의 사태를 쏟아지게 해야겠어
뿐이랴 아직도 어디선가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싸움의 고장으로 밀려가서
이번엔 천 가락 만 가락
아니야 천만 가락 노래의 폭풍으로 밀려가서
그곳을 왼통
노래의 쑥밭으로 만들어놓아야겠어
이야기
옛날 옛적에 양 치는 목동은 밤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깜깜한 하늘의
눈물 같은 별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백년 천년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는 이야기, 백년 천년 마르지 않는 물처럼 흐르면서 사는 이야기를.
나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밤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깜깜한 땅의
눈물 같은 너의 젖꼭지 그리고 너의 손과 눈 입 머리카락 숨소리도 모아서
이야기를 만든다. 백년 천년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는 이야기, 백년 천년
마르지 않는 물처럼 흐르면서 사는 이야기를.
2016.04.16 14:50
2016.04.16 15:58
세상엔 제가 모르고 있는 좋은 시가 많은 것 같아요.
전봉건 시인의 시 한 편 더~
아라베스크
빛
물
빛과 물의 거리
빛과 물의 모퉁이
구름이라고 하는
새라고 하는
그리고 당신이라고 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
오늘은 빛과 물 속을 지난다
오늘은 어느 길을 가도 너와 만난다
길은 모두 빛과 물의 길
빛과 물의 말
빛과 물인 너
어디선가 또하나의 꽃이 소리없이 열리며
빛과 물을 휘저어놓는다.
2016.04.16 21:33
2016.04.16 22:05
멋지죠?? ^^ Bigcat 님께 멋진 시 한 편 더
말3
봄은 어둠 속으로 오라
내가 불붙는 불이 되기 위해서
봄은 어둠 속으로 오라
내가 불붙는 불이 되어 너를 보기
위해서 봄은 어둠 속으로 오라
어둠 속으로 오는 너는 불
내가 불붙는 불이 되어 너를 잡기
위해서 어둠 속으로 오라 내가 불붙는
불이 되어 봄이기 이전에 불붙는 불인
너를 잡고 너를 헤쳐
불붙는 네 속에서
너와 하나로 불붙는
불이 되기 위해서
<후략>
2016.04.16 21:43
댓글도 없고 심심하니 전봉건 시인의 시 몇 편 더 ^^
돌7
밤새 비는 내리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저녁 늦게 마신 커피 탓이거나
이뿌리가 흔들리는 나이 탓이다
혹은 밤새 빗방울에 묻어서
지붕 가득히 떨어져 스미는 어둠 탓이다
그 자욱한 소리 탓이다
또 혹은 한 개의 돌 탓이다
밤새 내리는 빗물 머금어
자욱한 어둠보다 더 짙은 검정빛
한 마리 작은 새가 되는 돌 탓이다
돌33
모래
가득한
모래밭에서는
은빛 소리가
눈에 보인다.
모래 가득한
모래밭에서
다 삭은 스스로를 풀어
모래
가득한
모래밭으로
돌아가는 작은 돌 하나.
그
돌 하나
보듬은 물방울 하나
하늘의 눈짓 같은 물방울 하나
하늘의 눈물 같은 물방울 하나 보인다.
그 하나 물방울의
가는 은빛 떨림까지도
보인다.
모래
가득한
모래밭에서는
보이지 않는
피리 소리가
눈에 보인다.
돌41
사람들은 이따금 엉뚱한 얘기를 지어낸다.
하늘이 운다 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하늘이 운다니 도대체 이런 터무니없는 얘기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실은 이것은 터무니없는 얘기가 아니요
실없이 지어낸 엉뚱한 얘기가 아니다.
하늘이 우는 것은 사실로 있는 일
우리는 울음 우는 하늘을 실지로 볼 수가 있다.
그렇다 돌밭에서는 우는 하늘을 볼 수가 있다.
돌밭에서는 하늘이 낮게 내려와서
목을 꺾고 소리없이 울 때가 있다.
믿기지 않거든 비 오는 날 돌밭에 가라.
가서 돌밭에 굴러 있거나 앉아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돌들을 보라.
어쩌면 삼십억 개나 오십억 개쯤이 될지도 모르는
자세히 세어보면 삼억 개나 오억 개쯤 될는지도 모르는
적어도 삼천만 개나 오천만 개쯤은 족히 되는
그리도 많은 돌들 흠뻑 비에 젖는 것을 보라.
그리도 많은 돌들 흠뻑 적시면서 흐르는 빗물을 보라.
검은 돌을 적시고는 검은 피가 되어 흐르고 흰 돌을 적시고는 흰 피가 되어 흐르고
푸른 돌을 적시고는 푸른 피가 되어 흐르고 분홍 돌을 적시고는 분홍 피가 되어
흐르는 빗물을 보라. 잿빛 돌을 적시고는 잿빛 피가 되어 흐르는 빗물을 보라.
적어도 삼천만 개나 오천만 개쯤은 족히 되는
그리도 많은 돌들을 흠뻑 적시고서
보는 눈을 가지지 아니하고 듣는 귀도 가지지 아니하고 말하는 입도 가지지 아니하고
잡는 손도 가지지 아니한 돌들 흠뻑 적시고서 더욱이 나는 날개도 가지지 아니한 돌들
단 한 개도 빠짐없이 흠뻑 적시고서 흐르면서 섞이고 어우러진 오만 가지 빛깔의
핏물을 보라.
흘러도 현란한 비단처럼 흐르는 핏물을 보라.
어찌 그 핏물이 다만 빗물이겠느냐
어찌 그 빗물이 다만 빗물이겠느냐
어찌 그 빗물이 눈물이 아니겠느냐
어찌 그 눈물이 핏물이 아니겠느냐
믿기지 않거든 비 오는 날 돌밭에 가보라.
돌밭에서는 하늘이 낮게 내려와서
목을 꺾고 소리없이 울 때가 있다.
돌46
말 한마디 없는 돌의 슬픔은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러한 슬픔이지만
그러나 그 슬픔에 돌은 묻히지 않는다.
말 한마디 없는 슬픔의 등허리 세우고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러한 슬픔과 함께
모래톱에 쭈그리고 앉은 돌은
더러는 햇살도 받고 달빛도 받는다.
말 한마디 없는 돌의 아픔은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러한 아픔이지만
그러나 그 아픔에 돌은 묻히지 않는다.
말 한마디 없는 아픔의 등허리 세우고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러한 아픔과 함께
말 한마디 없는 돌의 어둠은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러한 어둠이지만
그러나 그 어둠에 돌은 묻히지 않는다.
말 한마디 없는 어둠의 등허리 세우고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러한 어둠과 함께
돌47
돌은
눈이 없다
그래서 돌은
어둠의 먹빛이다.
모래밭에 사는 진한 어둠의 먹빛이다.
그러나 저 먹빛에 번진
꽃 한 송이를 보라.
눈이 없는 돌은
어떻게 한 송이 꽃을 볼 수가 있었던가.
아마도 꽃씨 날리는 가을 어느 날
스스로 먹빛 살 찢어헤쳐 거기 받아
묻었다가 비 내리는 봄 하루
꽃잎 열게 한 것이었나.
비 내리는 봄 하루
저는 못 보는 꽃 한 송이
마침내 먹빛 살 조금 밀어내어 거기
촉촉이 번져나게 한 것이었나.
돌55
살은 모래로 보내고 피는 물로 보내고
그리고 넋은 하늘로 보낼 수가 있다면
아마도 나는 먼 훗날 작은 하나의 돌이 되어
다시 이 하늘 아래 모래와 물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곱디고운 꽃빛 소리 스스로 자아내는
하늘 살갗의 돌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물
나는
물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웅덩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개울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샘이나 늪 못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강이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바다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비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또 있습니다.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삼월 어느 날 사월 어느 날 혹은 오월의 어느 날
꽃잎이나 풀잎에 맺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
가장 여리고 약한 물 가장 맑은 물을 이르는
이 말과 만날 때면
내게서도 물기운이 돌다가
여위고 마른 살갗 저리고 떨리다가
오 내게서도 물방울이 방울이 번지어나옵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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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다리에도 사월은 오고...눈물이었다..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