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스포) 러덜리스(Rudderless, 2014)

2016.07.10 13:21

샌드맨 조회 수:1360

얼마전 너무도 황망하게 떠나버린 안톤 옐친의 출연작들을 검색하다가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평점도 흥행성적도 썩 좋진 않았지만, 저에겐 무척 인상적인 영화였어요. 극장에서 보고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OST에 빠져있었고, 오랜만에 다시 보는데도 무척 좋더군요. 


이 영화는 음악영화이자 성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잘 나가는 광고 카피라이터였던 샘(빌리 크러덥)은 지금은 요트에서 살며 페인트칠 일용직으로 살고 있습니다. 2년전 있었던 사건 때문이죠. 그의 아들 조쉬는 2년 전 대학 도서관 총기사고로 사망했고, 샘은 마치 그 모든 일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현실로부터 도망쳤죠. 어느날 오랜만에 부인(정확히는 사건 이후 이혼하여 전부인)이 찾아와 집을 내놓기로 했다며 샘의 서명을 요청하고, 조쉬의 유품 상자를 전해주고 떠납니다. 샘은 요트에 실을 자리가 없다는 핑계로 완강히 거부하고 조쉬의 유품을 쓰레기통에 처박으려 하지만, 어린 조쉬에게 기타를 가르쳐주며 찍었던 사진 액자를 발견하는 순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결국 배로 가져오게 됩니다. 상자 안에서 조쉬가 만들었던 음악을 발견한 샘은 인근의 라이브 바에서 그 곡을 연주하게 되고,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지만 쿠엔틴(안톤 엘친)이라는 청년이 그의 음악에 반했다며 함께 연주하자고 끈질기게 제안하고 샘은 결국 쿠엔틴의 끈질긴 제안이 귀찮아서 + 신세진 것도 있어서 + 아들의 추억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며 밴드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일단 음악입니다. 등장하는 음악들이 정말로 좋아요. 안톤 옐친의 나른한 듯한 목소리도 곡들과 무척 잘 맞고, 빌리 크러덥은 가수를 겸직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배우들의 연기도 상당히 좋습니다. 특히 빌리 크러덥은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멀끔한 모습만 익숙한 빌리 크러덥이었는데 떡진 머리에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 너저분한 셔츠와 청바지 걸친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이더군요.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른 안톤 엘친의 소심한 연기도 정말 잘 어울립니다. 


(여기부터 진짜 강스포)


스토리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무거운 주제를 패션처럼 소비하며 회피해버렸다는 비판도 충분히 나올 수 있고, 무거운 주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루었다는 칭찬도 나올 수 있죠. 


서두에 샘의 아들 조쉬가 총기사고에 연루되어 사망했다고 했는데, 그는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6명의 무고한 사람을 쏴죽이고 사망한 가해자였죠. 자신의 아들이 살인자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샘은 결국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죠. 그리고 2년만에 다시 만난 아들의 유품, 아들이 남긴 음악을 연주하며 샘은 처음으로 조금씩 아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조쉬가 살아있다면 동갑이었을 쿠엔틴과 함께 하게 되며, 샘은 정작 떠나간 아들과는 누리지 못했던 부자간의 유대감을 쌓아나가게 됩니다. 진짜 아들은 떠났지만, 그 아들이 남긴 음악을 통해 새로운 아들을 만나게 된 셈이죠. 이런 흐름 속에서 영화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기타+베이스+드럼까지 제대로 된 밴드의 구색을 갖추고 쿠엔틴의 집(정확히는 쿠엔틴이 얹혀살고 있는 집) 차고에서 첫 연습을 시작할 때 차고에 걸려있는 포스터가 아들 조쉬의 방에 걸려있던 것과 똑같은 것임을 발견한 샘이 잠시 머뭇거리는 장면이나, 처음에는 쿠엔틴을 그저 귀찮아하던 샘이 점점 쿠엔틴을 시시콜콜 챙기는 장면은 좋은 예죠. 하지만 이런 유사부자 관계는 오래 가기 어렵죠. 특히 샘이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이 사실은 죽은 조쉬의 곡이란 걸, 그리고 조쉬는 2년 전 무고한 6명을 죽인 살인자였다는 걸 숨긴 상태에서는요. 결정적인 순간 이 비밀은 폭로되고, 밴드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거짓말로 인해 샘은 두번째 아들마저 잃게 된 거죠. 


하지만 이번에 샘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비록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고 사죄하기 위해 노력하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마침내 죽은 조쉬도 포용하게 됩니다. 자신이 기억했던 착한 아들 조쉬나 그가 남긴 음악 뿐 아니라 그의 어두운 면, 그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까지도요. 이 영화는 성장영화라고 했는데, 흔한 클리셰인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성장영화가 아니라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성장영화입니다. 아들이 어른이 되며 아버지의 부재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극복할 수 없는 아들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기억의 저편에 방치해뒀던 아들을 마침내 가슴 속에 묻는 과정이죠. 


영화는 이런 샘의 변화를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첫 부분에서 모든 것을 잃은 채 요트만 있을 뿐 노숙자처럼 살면서도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고, 요트에 공간이 없다는 핑계로 조쉬의 유품을 거부하는 샘은 덩치만 큰 어린아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예 조쉬의 존재를, 그가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조차 아예 부정하려 들죠. 조쉬가 남긴 음악을 통해 조금씩 그를 이해해나가고, 조쉬의 생일날 오랜만에 그의 무덤을 찾아 묘비에 페인트로 칠해진 살인자라는 낙서를 부인과 함께 지우면서도 샘은 피해자의 부모를 만나거나 그들의 용서를 구하는 것을 극구 거부합니다. 조쉬의 음악은 받아들였지만, 그의 어두운 부분은 아직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죠. 그러나 두번째 아들이나 다름없었던 쿠엔틴마저 잃고 나서, 샘은 사건이 벌어졌던 대학 도서관에 찾아가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오열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아들 조쉬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며 조쉬의 어두운 부분을 마침내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 공연과 마찬가지로 혼자 무대에 선 샘은 스스로 자신의 아들 조쉬가 살인자였음을, 그리고 이 노래는 그의 노래임을 밝힌 뒤 조쉬가 남긴 마지막 노래, 조쉬가 완성하지 못해 자신이 완성한 노래를 부릅니다. 조쉬의 어두운 부분을 받아들이고, 그가 느꼈어야 할 죄책감과 받았어야 할 비난까지도 아버지로서 짊어지게 된 것이죠. 이 장면에서 그는 조쉬를 변호하려 하지도, 조쉬가 한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죽은 아들을 대신해 그 자리에 선 채 노래를 부를 뿐이죠. 이해 혹은 비난은 관객들에게 맡긴 채 단지 한명의 아버지로서 자신의 아들을, 단지 살인자가 아니라 아니라 아름다운 음악을 꿈꿨던 한 청년을 추모하면서요. 어쩌면 이 결말은 무책임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 결말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 생각해요. 샘은 마침내 조쉬의 어두운 부분과 그가 저지른 끔찍한 일마저 받아들였고, 이에 대해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죠. 이후의 얘기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샘이 다시 예전처럼 피해자들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마저 외면한 채 도피하진 않을 겁니다. 마지막 노래의 가사에서 '네 노래를 부를 방법을 찾아볼테니 함께 불러다오'라고 했던 것처럼 조쉬와 함꼐 앞으로 나아가겠죠. 그리고 살인자가 아닌, 음악가로서의 조쉬가 남긴 노래를 떳떳이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저질렀던 끔찍한 일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테고요. 


어쩌면 제가 빌리 크러덥이란 배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에 지나치게 호의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마지막 노래 'Sing Along'이 주는 먹먹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샘의 행동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노래의 마지막 부분 '너도 이 자리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면 좋았겠구나, 아들아'라는 가사가 울림을 준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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