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글

2011.09.20 19:05

김리벌 조회 수:1052

1. 텍스트의 해석과 ()기술: 오독과 허수아비 공격들

 

시작-------------------------------------------------------------

- 첫번째 책은 영국인, 두 번째 책은 중국인에 의해서 씌여졌습니다. 이 두 책을 읽으면 난감함을 느낍니다.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자국 중심적인 서술의 흔적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 서양의 경제사학자들이 어떤 모순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 영미의 관점에서, 자기네의 경제사를 기반으로, 앞으로의 경제사를 자기네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더글라스 어윈 교수는 (미국의 교수 답게 미국의 케이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미국의 성공은 유치산업 보호 때문이 아니고, 높은 식자율이나 토지 소유권 (자본주의의 중요 요소), 안정적인 정부, 사적 소유권의 안정성, 거대한 내부시장 때문에 비효율 적인 무역 정책 (, 보호무역주의) 조차도 미국의 성공을 막지 못했다,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보호무역주의는 미국의 경제적 성공에 저해가 되어왔을 것이지, 도움이 되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높은 식자율이라든가 사적 소유권의 안정성, 안정적인 정부 등 미국의 성공요인을 열거하는 부분을 보면서 한숨이 나왔습니다.

겨자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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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의 맥락을 고려할 때, 겨자1-1을 읽고 아래 A와 같은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A

자유무역/보호무역에 대한 경제학 연구의 결론이 해당 학자의 국적에 따라 달라진다. 달라질 수 있다.

국적 때문에 심지어 모순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저널이나 경제학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국적 편향이 교열되지 않고 실린다.

자유무역을 기본 규범으로 하는 경제학의 결론은 영미의 관점일 뿐이며 (관점이며) 영미에 유리하다. (한국 등에는 불리하다.)

어윈은 미국인이고, 그의 결론이나 강조점을 평가하는데 이는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겨자님이 A와 꼭 같은 의도와 의미로 얘기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A와 같은 이해가 다 틀렸다는 것도 아닙니다.

논점을 명확하게 합시다.

적지 않은,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독자가 A와 같은 이해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아래는 겨자1-1 첫문장에 대한 저의 코멘트입니다.

저의 독해뿐 아니라, 경제학 일반 및 영미 중심의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는 듀게의 경제학 비전공 독자들의 독해를 주로 염두에 둔 내용입니다.

 

시작-------------------------------------------------------------

자국 중심적인(?) 서술이 섞여 있는 것은 주류 경제학 교과서가 될 수 없습니다.

연구자의 국적에 의해 결론이 달라지는 내용은 경제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논문은 가, , , , , , 사에 출판되지 않습니다.

경제학에서 연구자의 국적이 결론에 영향을 미친다면, 제가 의미한 주류 경제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주류 경제학, 한국 주류 경제학, 독일 주류 경제학, 중국 주류 경제학이 각각 존재하겠지요.

그러나 경제학은 그렇지 않으며, 저는 그렇지 않은 경제학에 대해 얘기하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명시했습니다.

 

주류 경제학이 저자의 국적에 의해 결론이 달라지는 어떤 활동에 비해 (항상) 더 가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각자가 각자의 목적에 맞는,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텍스트를 참고하면 됩니다.

두 가지 활동을 뒤섞지 말고 구별하여 각각의 목적에 맞게 평가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김리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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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의 의도, 의미는, 적어도 제 생각에는 오독의 여지가 없이 명확합니다.

주류 경제학, 특히 출판된 논문이나 널리 읽히는 교과서에 실리는 내용은

연구의 결론이 연구자의 국적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것들이다.”

입니다.

 

여기서

경제학자와 국적이 무관하다” (경제학자는 국적 없는 우주보편인이다?)

경제학자의 연구 모티베이션에 국적의 영향은 없다

를 읽어 낸다면, 저도 할 말 없습니다.

 

연구 모티베이션과 연구 결론이 같은 건가요?

제가 겨자님의 국적과 연구 모티베이션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겨자님의 연구 결론을 예측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결론이 해당 분야의 권위 있는 참고문헌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면,

겨자님은 저자의 국적, 모티베이션에 의해 결론이 달라지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 것이며,

그것이 매우 가치 있는 활동이라 하더라도 주류 경제학과는 매우 다른 활동일 것입니다.

 

아래는 김리벌1에 대한 겨자님의 코멘트입니다.

 

시작-------------------------------------------------------------

일곱번째, 김리벌님은 경제학자와 국적이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제가 예전에 한 경제학자의 발표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이 경제학자는 자기 연구의 모티베이션을 자기 국적에서 찾았습니다. 자기의 모국은 너무나 가난했고, 그래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open market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 연구논문을 쓰게 되고 또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마찬가지로 일본의 어떤 연구자들은 일본의 경제성장과정에서 자기가 본 것에 대해 증언을 하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현실에서 만나는 경제학자들은 자기가 본 것을 증언하는 것부터, 자기가 느낀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부터 연구를 많이 시작합니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저자 장하준박사는 한국인이고, 그래서 자기 나라가 겪은 것과 선진국들이 주장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이 되네요. 참고로 제가 위에서 이야기한 이 경제학자의 이름은 Jagdish Bhagwati 입니다. 이 바가와티 교수 조차도 금융의 자유화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기 위치를 철회하고 입장을 바꿨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군요.

겨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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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울 만큼, 저보다 훨씬 더 많이 배우신 분들이 왜들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주 보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는 않습니다.)

과학적 활동에는 (항상) 외적 권력 관계망이 개입한다.’

경제학자의 인식이나 동기에서 국적을 분리해낼 수 없다.’

저는 이런 인식론적 기본 명제를 부정하지 않으며,

여기에 항상을 넣은 전칭 명제를 주장할 수 있느냐 반증할 수 있느냐

1, 2차 문헌 철학자 누구는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느냐 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 관심은 그래서 어쩌라고?’ 입니다.

그래서 경제학자 A의 자유무역 옹호에는 국적에 의한 영향이 있으니 국적이 다른 B는 이것을 디스카운트 해야 한다는 얘기냐?’ 입니다.

제 관심은 크루그먼과 장하준의 입장이 같냐, 다르냐, 다르다면 누가 어떤 면에서 더 옳냐이고

제 입장은

이것을 따지는데 국적이 유의미한 준거가 된다면 국적 얘기를 하고, 아니면 일단 제쳐두자

이것을 따지는데 국적이 유의미한 준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의 검증된 결론 일반은 연구자의 국적에 대해 충분히 독립적인데, 자유무역이 기본규범이라는 것이다

입니다.

제가 이와 같은 원론적인 국적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겨자1-1을 읽어보시면 대체로 공감하실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저는 주류 경제학에 대해 의혹을 갖고 있는 비전공자들이 겨자1-1을 읽었을 때 A처럼 생각했을 것이라고 가정,추정했습니다. 저는 제 추정이 상당히 정확하다고 믿지만, 다른 분은 달리 생각하실 수 있겠죠. 저는 그 점에 대해서 까지는 다투고 싶지 않습니다. 정확한 시비가 가려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하지만, 그에 대해서 다투고 싶다면, 김리벌1에 대한 반론은 겨자1-1 A를 의도하지 않았다, 겨자1-1을 읽고 A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독이다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국적과 연구 모티베이션 간의 관계가 있는 경제학자 몇 명을 알고 있다가 아니라요. 겨자님은 자신이 뭐라고 썼는지, 자신이 쓴 글이 어떻게 읽히는지, 상대방이 (자신의 글을 어떻게 읽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듣보잡이라 같잖게 보이고, (비싼) 자신이 훨씬 더 잘 안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거개가 이러했고, 겨자님도 별로 다를 바 없는 것 같으니 제가 더 이상 얘기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가치가 있다/없다는 겨자님 표현을 그대로 빌려온 것인데, 그대로 돌려주겠다, 무례하다, 건방지다고 발끈하시는 걸 보니 제 의도가 적중한 것 같네요.)

김리벌1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 보시면 바로 겨자2와 같은 오독을 예상하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상당히 주의 깊게 기술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더 쓰게 된다면 다른 텍스트도 마찬가지임을, 몇몇 분이 얼마나 답없는 오독, 그것도 예상 범위 안에 있어서 방지하려 했던 오독을 반복했는지도 밝히죠. 해석들이 너무 허접해서 상대하지 않으려 했건만..

 

 

2. 텍스트의 시비(1)

 

겨자1-1 → 김리벌1 → 겨자2

1에서는 겨자2가 김리벌1을 오독하였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만약 김리벌1이 겨자1-1의 오독이었고 그 오독을 바로잡기 원한다면 겨자2가 다른 내용이었어야 함을 지적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리벌1이 겨자1-1의 오독인지 여부, 겨자2가 김리벌1의 정독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다툴 생각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김리벌1에서 경제학자의 연구 모티베이션에 국적의 영향은 없다’, 순진한 과학주의 등을 읽어내는 전지적 시점에 대해서는 저도 할말이 없습니다.” 저는 그런 위대한 분들과는 대화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정확하게 해석된 김리벌1의 시비 진위에 대해 다투고 싶다면 반론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드리죠.

 

2.1. 겨자2에 대한 코멘트

 

그 전에 겨자2에 혹했을 경제학 비전공 독자를 위해 그에 대한 제 입장을 간단히 밝히겠습니다.

겨자2는 따로 떼놓고 읽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오류도 없고, 세련된 이야기죠. 직접 경험으로 권위를 더했고, 다수, 특히 서구북미 밖의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습니다. 저라면 따로 떼놓고 읽어도 그래서 어쩌라고?” 했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겨자2는 따로 떼놓고 읽을 글이 아니죠. 저와의 논쟁의 맥락 안에서, 김리벌1에 대한 반론으로 읽어야 하고, 그럴 경우 1에서 밝혔듯 그냥 남의 다리 긁기입니다.

 

B국 출신 학자b1 B국의 경제현상, 경제사에 대해 다른 나라 학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수 있습니다.

국적을 포함한 개인적 특질들에서 기인한 그/녀의 차별적인 경험, 문제의식(모티베이션)이 새로운 문제와 추론을 가능하게 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기여들이 축적된 것이 주류 경제사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여는 혹독한 검증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b1이 본 것이 b2, b3, b4가 본 것과 충분히 조응하여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적, 성별, 연령, 정치적 지향이 다른 c1, d1, e1 b1 과 같은 시공간에 있었다면,

그들도 b1과 같은 것을 목격했을 것이라는 점이 널리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립된 사실 또는 목격이 특정한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논증의 타당성이 널리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를 테면 이런 얘기입니다.

 

1) 나도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녀의 증언은 사실이 아니다.

2) X에 대한 그/녀의 증언은 사실이(라고 믿)지만, X가 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그/녀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3) 알리바이를 주장하는 용의자가 있는데, 사건 당시 그/녀의 소재를 목격하지도 않았고, /녀의 주장을 믿지도 않지만, /녀의 주장이 참이라면 그/녀는 범인이 아니다.

4) /녀의 증언을 믿고, X가 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그/녀의 주장에도 동의한다.

5) 4)이지만 그/녀의 주장이 다른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Y%만큼만 동의한다.

 

b1자기가 본 것에 대한 증언은 자료(데이터), 이론(모델), 모델링의 방법론, 자료에 대한 검증, 검증의 방법론, 비교사 등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합니다.

장하준의 증언-주장에 대한 저의 입장, 그리고 한국 및 서구북미의 주류 경제학자들의 입장은 1), 2), 3), 4), 5) 가 섞여 있습니다.

이 점, 즉 섞여있다는 사실은 크루그먼, 바그와티, 스티글리츠의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차이점은 1), 2), 3), 4), 5) 의 비율이죠.

 

저는 이상의 기본 사실을 바탕으로 몇 가지 주장을 제기하였으며, 그 중 일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였고, 일부에 대해서는 아직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개별 학자들이 개별 연구 결과에 대해 취하는 1), 2), 3), 4), 5) 의 비율에는 차이가 있고, 명백하게 편향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권위 있는 학자들의 중론(75% 동의 테스트)은 안정적이라는 것이 제 주류 정의의 핵심입니다. 그 안정적인 결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 안정적이라는 사실, 장하준은 75%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특질들뿐 아니라 저자와 평가자의 국적에 대해서도 독립적이라는 것이 김리벌1이 말하는 바입니다. 김리벌1에 대한 반론은 제가 말한 적도 없는 전칭 명제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 비율의 차이를 국적이라는 변수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2.2. 김리벌1 반론의 요건

 

2가지 질문이 도움될 것 같습니다.

 

다음 학자들의 자유무역/보호무역 정책 관련 연구 결론, 모티베이션 말고 결론을 그들의 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더글라스 어윈, 바그와티,

로드릭, 로드리게즈, Chang-Tai Hsieh, 찰스 존스, 맨큐 등 (로드리게즈-로드릭 2000 에 대한 논평자들)

폴 크루그먼, Alwyn Young, Yuan Tsao, Jong-Il Kim and Lawrence Lau (크루그먼이 동아시아 경제 성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인용한 학자들)

거셴크론 부터 스티글리츠 까지 구소련 및 동구권과 1~2세대 간격으로 연결되는 많은 학자들

 

- 이론 논문인 Young(1991)의 모형, 방정식들에 그의 국적은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가? 실증 논문인 Young(1992), Young(1993), Young(1994) 에는? 현재 논쟁의 맥락에서 전자와 후자는 상반된 입장에 힘을 실어준다고 할 수 있다. 1991~1992 사이에 Young의 학문적 정체성이나 방법론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나는 가장 유력한 저널 7개에 출판된 경제학 논문들 중 아직 읽어보지 않은 논문들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을 때, 저자의 국적을 얼마나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가?

전체를 샘플로 하면 미국의 비율이 꽤 높을 테니, 15개 국적을 선정해서 국적당 논문 수를 통일하기로 하죠.

분야마다 차이가 좀 있는데, 전통적으로 계량경제학, 게임이론, 성장론 등에서 국적 이질성이 좀 클 것 같네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질성이 증대되는 경향은 뚜렷한 것 같고요. 권위 있는 학자의 비범한 논문인데, 영어 문장은 너무 쉽고 평범해서 비영어권 출신이라는 게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죠. 이런 문제를 통제하기 위해, 본인이 지정한 한 사람이 논문의 결론을 위주로 각 논문의 초록을 다시 쓰고 그 원고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법 등도 고려할 수 있겠네요. 선택지 15개 국적은 미리 알려주는 친절을 가정하겠습니다. 자신 있으신가요?

 

 

3. 서양-국적드립의 한계와 위험

 

겨자님이 위의 ① ② 에 만족스럽게 답변하여 김리벌1에 대한 부정, 반증이 성공했다고 가정하고

그것이 함의하는 바에 대해서 알려 드리죠.

자유무역주의자들인 영미 학자들의 결론을 그들의 국적에 의한 것으로 디스카운트해야 한다면,

자유무역주의자가 아닌 장하준의 결론도 그의 국적에 의한 것으로 디스카운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남는 것인가요?

 

(예상 반론: “나는 그런 의미의 상대주의 주장하지 않았다. 왜 순진한 과학객관주의와 극단적 상대주의의 흑백논리로 몰고 가느냐?”)

 

더글라스 어윈 교수는 (미국의 교수 답게 미국의 케이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미국의 성공은 유치산업 보호 때문이 아니고미국의 성공요인을 열거하는 부분을 보면서 한숨이 나왔습니다.” 겨자1-1

 

미국인이 답합니다.

장하준 교수는 한국의 교수답게 한국의 케이스를 강조하며 한국의 성공은 유치산업 보호 때문이고한국의 성공요인을 열거하는 부분을 보면서 한숨이 나왔습니다.”

 

제대로 된 주류 경제학자 중에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한 명이라도 데려와 보세요.

만약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저는 그/녀를 비웃을 테고, 겨자님은 그/녀와 절친하시면 되겠네요.

어윈의 장하준 서평을 보세요. 자료, 방법론, 논리, 다른 자료를 얘기하지

장하준은 개도국(동아시아) 출신이라 개도국 관점에서 보고 따라서 선진국(서양) 경제사 설명에 실패하였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

사실 이 논의는 장하준 경제학의 보편성 내지 범용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영미 출신 어윈이 영미 중심의 관점에 의해 결론을 잘못 내릴 수 있는 위험과

동아시아 출신 장하준이 한국 중심의 관점에 의해 결론을 잘못 내릴 수 있는 위험이

동등하지는 않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일대일 대칭 비교는 그것대로 한계, 위험이 있습니다.

 

“4) /녀의 증언을 믿고, X가 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그/녀의 주장에도 동의한다.

5) 4)이지만 그/녀의 주장이 다른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Y% 만큼 동의한다.”

 

우리는 흑백 논리를 피하고, 국적의 영향을 인정하면서, 다른 국적에 의해 영향 받은 다른 결론 중 어느 것이 좀 더 범용한지를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주류 경제학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주류 경제학이라서 옳다는 게 아니라 주류 경제학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의도적 오독자들을 위해서 매번 이 단서를 붙일 수도 없고 거 참...)

중국 경제의 등장, 미국의 twin deficits 규모, 소득불균등 심화, EU나름의 통화재정부담 등 여러 요인을 고려할 때, 냉전 시기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의 고속 성장 모형은 라틴 아메리카 및 다른 후발 공업국에 대해 적용성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주류 학자들의 연구와 논쟁을 참고하였으되, 제가 정리한 결론이므로 이런 관점에서 이와 똑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레퍼런스를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결론을 내린 제 나름의 근거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는데,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생략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장하준식 동아시아형 전략은, 매우 희박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특정 국가의 성장에 유리한 결과를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국제 경제 질서의 기본 규범이 될 수는 없습니다.

*/

 

요컨대, 주류 경제학의 기본 명제들이 서양의 관점에 의한 것이라는 증명, 따라서 그 보편성이 제한적이라는 함의만으로는 장하준 구하기가 완결되지 않습니다. (모님들은 당연히 장하준 구하기가 목적이 아니었다고 하실 테고, 그 점은 저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장하준을 구하려면, 국적-비중립적인, 국적 편향적인 두 입장, 주류 경제학자들의 결론과 장하준의 결론 중 그래도 어느 것이 어떤 면에서 얼마나 더 설득력이 있는지 따져봐야 하고 장하준이 더 낫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저는 장하준에 의해 오도된 경제학적 진실을 구하기 위해 제 입장에서 위의 과정을 밟으려고 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국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의 첫걸음이었던 어윈의 서평에 국적 얘기가 없다는 것은 위에서 얘기했고, 심지어 그 전에 소개한 송원근-강성원의 글에도 국적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겨자1은 처음부터 국적 디스카운트론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서론은 친절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독자들을 일종의 음모론으로 안내합니다. 본론의 내용들을 평가할 수 있는 준거는 더 흐릿해집니다. 그리고 일련의 미국의 무역 조치들, 소위 현실에 관한 얘기서양 경제학자들이 꾸며온 음모에 대한 의혹, 심증을 완결합니다. 경제학자들이 바로 그 조치들을 일관되게 반대해왔다는 사실은 은폐(?)됩니다.

이런 서론, 서술은 스스로 자신의 주장의 가치를 깎아 먹(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의도한 의미 이상으로 이해된 경우도 많았을 것 같네요. 그에 대한 책임이 한 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국적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자1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더 주의 깊게, 제한적으로, 이를 테면 김리벌1과 같이 서술되어야 하며, 그 이상을 얘기하려면 훨씬 더 주의 깊게, 많은 근거를 바탕으로 오해의 가능성을 피하면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특히 장하준 논쟁에서는요.

자주 느끼지만 제가 갖고 있는 예의/무례의 기준은 한국에서 널리 통용되는 기준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듀게는 한국의 평균 기준에 비해서는 제 기준에 가까운 편이고요. 어쨌든 제 기준에 따르면, Hill의 교과서를 전거로 겨자1과 같은 방식으로 서양의 경제사학자들의 모순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이 무모하고 무례한 글입니다. 일단 특정이 없습니다. 서양의 I, K, S 또는 한국의 김, , 장의 무엇이 모순이라는 얘기와 매우 다른 얘기입니다. 듀게의 독자들은 서양의 경제사학자들이 누구인지, 단 한 명도 특정할 수 없는 이들이 절대 다수입니다. 그리고 인신공격입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서양 학자들은 서양 중심주의라니 참 편리한 비판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겨자님은 실명을 걸고, 서양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읽을 글을 겨자1처럼 쓸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쓴 글들을 장하준을 포함한 누구한테든 읽힐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쓴() 얘기는 장하준 등을 특정한 글들, 장하준을 포함한 경제학계에 실명으로 널리 읽힌 글들의 발췌 수준입니다. 장하준이 직접 반론한 경우도 있는데, 그 반론도 소개할 예정이었고요.

또 예상되는 오독 처리해야겠네요. 게시판에 글을 쓸 때 논문 수준으로 쓰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됩니다. 읽고 반론할 사람도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고요. 저는 독자들을 위해 주의사항을 덧붙였을 뿐입니다. “이거 실명 걸고 전문가 집단에 회람시키기에는 엄청 무리수가 많은 글이니 감안해서 읽으세요.” 이 경우뿐만 아니라, 논쟁적인 사안에 접근할 때는 항상 쌍방의 얘기를 다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저는 제가 동의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일부러 반대쪽 논문을 찾아서 읽어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요. 장하준의 얘기는 한국어로 접근하기 쉽죠. 베스트셀러도 여러 권 되고, 기사나 인터뷰도 많고, 듀게에도 읽어보신 분들이 꽤 되겠죠. 그리고 사실 그런 얘기, 신자유주의 나쁘다는 얘기는 장하준 말고도 여러 사람이 흔히 하는 얘기죠. 상도 많이 받은 이름난 경제학자라고 하니까 더 솔깃할 뿐. 하지만 서양의 경제사학자들의 얘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장하준 비판하는 사람 많지만, 더글라스 어윈의 비판은 그런 비판들과 상당히 다르고, 경제학 비전공자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죠.

 

 

4. 텍스트의 시비(2)

 

장하준이 하는 얘기 중에 새로운 얘기가 있나요? 장하준이 새로운 데이터를 발굴했나요? 1차 자료?

서양의 경제사를 깊게 본다고요?

죄송하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하준은 늘 있어왔던 이상한 얘기를 한 번 이상 검토된 자료들을 다 끌어 모아서 다시 한 번 대차게 하는 것이지 새로운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검토된 자료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의의가 있습니다만, 그 끌어 모은 것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주장을 하니까 여전히 이상한 얘기일 수밖에요.

 

어윈의 장하준 서평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폴 베어록 (Paul Bairoch) 류의 사고방식은, 관세가 높고 성장이 강했으면 그 관세와 성장 사이에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다는 식이다.”

장하준이 인용하는 자료나 결론 같은 것들 다 한번씩 언급되었던 것들입니다. 제일 대표적인 사람이 폴 베어록 (Paul Bairoch)이고요. 그 사람들 전부 다 서양 사람들입니다. 장하준의 참고 문헌 보세요.

프리드리히 리스트 서양 사람이고요, 겨자님이 유치산업보호론의 시조로 얘기한 알렉산더 해밀턴 미국 초대 재무부 장관이었고요. 그 이후로 장하준 식의 얘기를 해 오던 사람은 늘 있었고, 그 사람들 거의 대부분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폴 크루그먼이 "경제학자들은 세계 무역에 대해 자주 글을 쓰고 발언하는 지식인들이 가장 기본적인 아이디어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전적으로 무지하며, 그들의 독자들도 그렇다"라고 로버트 라이시 [자유 무역을 넘어: Beyond Free Trade] 등 특정해서 깠던 사람들 다 서구북미 사람들이고, 다 한 자리씩 했고 (포드, 카터 정부 참여, 클린턴 정부 노동부 장관), 다 베스트셀러 저자입니다.

미국 내에서도 자유무역주의자과 보호무역무역주의가 논쟁하였고, 경제학자들은 자유무역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하였으며, 정치인들은 이익집단 정치나 포퓰리스트 정치로 보호무역 조치들을 도입했습니다.

영국에서도 그랬고, 독일에서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삭제된 어떤 글에 제가 달았던 댓글을 재활용하겠습니다.

 

시작-------------------------------------------------------------

장하준의 뮈르달상 수상은 [사다리 걷어차기]에 대한 평가로 받은 것이고 삼성이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수상 후에 쓴 책입니다.

[사다리 걷어차기]에 대한 수여라고 해도 신통찮게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삼성 사례 발굴에 대한 상이라면 그것은 정말 그 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겠죠;;

 

장하준이 사례를 발굴하고 인용한 게 대단하다는 말씀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lice_Amsden

 

MIT 교수로 있는 앨리스 암스덴 교수에 관한 위키피디아 페이지입니다.

저작들에 보면 맨 아래에

 

Asia'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Awarded "Best Book in Political Economy," 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1992.

 

라고 되어 있습니다. 1989년에 출판되어 이미 1992년에 상까지 받은 책입니다.

([사다리 걷어차기] 10년 후인 2002년에 출간되었고요.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더 나중이겠죠.)

 

암스덴 교수 시기에 암스덴 교수 말고도 일련의 학자들이 한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4개국의 놀라운 성과에 대해 여러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유행이었죠. 재벌에 대한 연구들을 포함해서요. 장하준이 영어로 책을 쓰면서 재벌을 Chaebol 이라고 쓸 텐데, 그 때 이후로 이미 용어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니 [사다리 걷어차기]의 참고문헌에 앨리스 암스덴이 4번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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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한국의 경제 성장에 대한 내용 중에서도 장하준이 처음 하는 얘기는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겨자님은 이 논쟁에서 국적, 새로운 모티베이션, 통찰력이 보이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국적과 무관하게 늘 있어왔던 반복을 봅니다.

 

 

5.

 

제가 겨자1을 읽고 들었던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겨자님의 댓글들을 읽고 들었던 느낌들이 또 있습니다. 겨자2를 읽고 나니 일부는 다소 해소되고,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저는 겨자1을 읽고 어떤 전형 중 한 사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듀게에서 본 다른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한국의 지식인들은, 다시 말하자면 경제학자들은 무능합니다. … 그들은 서구의 모형들을 달달 외워서 그걸 진리라 간주하고 그것을 한국에 실현하려고 할 뿐입니다. 아 정말 한심합니다.”

http://djuna.cine21.com/xe/2638242

 

똑같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같지 않죠. 매우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런 얘기들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겨자2를 읽고 나니 겨자님이 이 유형의 평균에 비해 경제학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의 장하준-어윈 읽기와 겨자님의 읽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네요.

 

겨자1의 서양 드립과 겨자2일곱번째를 묶어서 얘기했습니다.

여기까지 쓰고 겨자2를 다시 한 번 읽어보니 일곱번째 외에도 국적에 대한 호소, 영미 주류학자들에 대한 오독, 인신공격이 보이네요.

겨자님이 겨자1에서 툭툭 던진 문구들 중 하나에 대해서, 겨자님의 오독 하나에 대해서 제가 갖고 있는 생각 중 일부를 밝히는 데도 이렇게 긴 글이 필요한데, 다른 무리수들과 오독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더 지난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도 또 다른 오독으로 이어지고, 난삽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저도 비슷한 잘못을 할 수 있고 그렇겠죠.

저도 가급적이면 짧게 끊어서 던지고 싶은데, 자세하고 주의깊게 써도 이 따위로 오독하는 태클들을 계속 당하다 보니.. 거 참 제대로 말렸어요.. 

만약에 한 번이라도 더 쓰게 된다면, 겨자1 sample selection bias와 겨자2 아홉번째를 묶어서 저의 장하준-어윈 읽기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 글은 겨자님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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