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30 12:49
나이가 들수록 많을 것을 잃을 것이라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글을 가끔 봐요.
가지고 있던 것을 잃는 것은 두려운 일이죠. 건강, 아름다움, 지성, 일, 돈, ...
그런데 잃는 것이 꼭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일까...
부모님께서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50세가 되면 외모의 평준화, 60세가 되면 직업의 평준화,
70세가 되면 학력의 평준화, 80세가 되면 재력의 평준화, 90세가 되면 건강/수명의 평준화라고요.
각각 그 나이가 되면 젊었을 때 잘생겼던 사람도 다 비슷해지고, 멋있어 보이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도
다 백수가 되고,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도 다 머리가 둔해지고,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별로 소용이 없고,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몸 상태가 비슷해진다고요.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외모의 불평등, 학력의 불평등, 직업의 불평등, 돈의 불평등, 건강의 불평등을 하나씩
겪게 되는데 그런 불평등이 나이가 들면서 하나씩 사라져간다는 거죠.
그러니 지금 별로 가진 것이 없다고 괴로워하시는 분들은 나이가 든다는 것에 너무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혼자만 잃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잃어가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잃을 테니까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절대적 빈곤이라기보다는 상대적 빈곤이고, 같은 나이 또래에서 비교에 의해 생기는 열등감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비록 하향평준화이긴 하지만 나와 모든 면에서 비슷한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지금 친구 사귀기 어렵고 외롭다고 슬퍼하는 분도 나이가 들면 오히려 쉽게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몰라요.
나이가 많아질수록 몇 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외모와 직업과 지성이 다 비슷해지니까 선택의 폭이
더 넒어질 수도 있죠. 우리가 어렸을 때 아무하고나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다면 많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나이가 들면서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 더 큰 고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잃음으로써 과거의 행복을 완성해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영화 <Shadowlands>에서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나누던 얘기가 생각나서 찾아봤더니 이렇게 돼 있더군요.
The pain now is the part of the happiness then. That's the deal.
We can't have the happiness of yesterday without the pain of today.
현재의 상실로 인한 고통은 과거에 누렸던 행복의 대가로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현재의 상실이 과거의 경험을 행복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고, 과거를 행복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어떤 것을 잃기 전에는 갖고 있던 그것의 소중함을 쉽게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누리던 시절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지 못하죠. 그래서 현재의 상실은 그것을 갖고 있던 과거의 시간들을 아름답게 채색해요.
어쩌면 실제로 경험했던 것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운 시절로 만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기억 속에서 아름다워지는 게 무슨 소용인가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지 라고 생각할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언제나 과거에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던가요. 과거에 대한 불만과 후회들이 현재를 좀먹고 그것들이
미래로 가는 에너지까지 소진시키지 않았던가요.
어떤 것을 잃음으로써 내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던 그 시간들이 사실은 참 좋았던 시간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면,
늙어가면서 잃는 게 하나씩 생길수록 그만큼 지나온 시간들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래서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 때 이제껏 살아온 시간들이 참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었구나 하고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잃는 경험도 그렇게 부정하고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죠. 며칠 후면 져버릴 꽃들, 몇 년 후면 다 자라버릴 고운 아이들,
시간이 흐르면 멈추게 될 열렬한 마음들, 잃어버릴 것을 각오하고 바라볼 때 그 아름다움이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어요.
우리가 삶의 어느 부분에서 가졌던 것들이 그것을 잃어야만 그 시간이 아름다워지는 그런 거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면요.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예정되어 있다고 각오하고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삶은 훨씬 아름다워질 것 같아요.
오늘은 이렇게 심심하면 아무 글이나 올릴 수 있는 듀게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일이죠. ^^ 여기서 함께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언제 어떻게 떠나갈지 알 수 없어요. 그렇게 지금 이 듀게에서 누리고 있는 시간을 바라본다면 이렇게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시간들이 조금은 더 아름답고 소중해지겠죠.
저도 아직 그렇게 많은 것을 잃어보지 않았고 그렇게 많이 늙어보지 않아서 잃는다는 것에 대해 늙는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쉽게 얘기하고 아름답게 상상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늙는다는 것이, 어떤 것을 잃는다는 것이, 그렇게 꼭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2016.05.30 12:51
2016.05.30 19:23
늙어갈수록 외모, 직업, 학력 같은 외적 조건은 평준화될 수 있지만 성격/인격은 천차만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결국 나이가 들면 성격/인격으로 승부를 보게 되는 건가요... ^^
2016.05.30 13:07
다 같이 잃는데도 사람은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죠.
잃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건 욕심을 울며겨자먹기로 떼버리는 것.
져도 이겼다 하기는 곤란하지만 속 편하니까요.
2016.05.30 19:36
나이 들면서 이것 저것 잃어가겠지만, 나보다 먼저 늙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나와 함께 늙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과 함께 힘든 삶을 견디고,
다음 세대 또한 그렇게 늙어갈 것을 안다면 조금은 힘이 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
2016.05.30 14:02
2016.05.30 19:50
나이가 드니 제 마음 속에서는 이미 평준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겉으로 내세울 만한 것도
속으로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곤 해요. 아직은 뭔가 있어 보이게 포장은 하고 있지만 ^^
조금 더 나이 먹으면 백수가 되어도 눈치 보이지 않고 살기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모락모락 ^^
2016.05.30 14:31
잘 읽었습니다.
잃을 것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줄 알아야겠습니다.
2016.05.30 20:11
조금 전 공원에서 산책하고 돌아왔는데 오늘 이런 글을 쓰고 난 후라 그런지
파란 나무들을 보고 좋은 냄새를 맡고 운동도 할 수 있는 게 어쩐지 더 좋더군요.
언젠가는 큰 맘 먹고 공원 한가운데에서 에어로빅 하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몸을 흔들어
보는 게 제 작은 야망이에요. ^^ (나중에 바빠서 산책을 할 수 없게 되거나
공원이 없는 다른 동네로 이사 가거나 하기 전에)
2016.05.30 15:21
누릴 삶이 얼마남지 않은 시점에서 평준화된다는게 속상할 따름이죠.
잃음으로서 얻을수 있는것이 있는것처럼 얻음으로서 잃는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위안을 받기도 하는거고요.
2016.05.30 20:34
50세부터 평준화가 시작되어 90세까지 살면 40년인데요. 제법 길어요. ^^
가끔 세상은 제가 원했던 것을 제가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루어주는 것 같기도 해요.
누구에게나 평등한 삶을 늙음이라는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안겨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늙어서 연애하면 2세가 생기는 건 불가능해서 굳이 결혼을 할 필요도 없고 자유연애가 가능하겠죠. ^^
젊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얻는 게 지상목표였으나 세상은 제가 원하는 걸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줄지도... ^^
2016.05.30 17:16
근래에 읽은 글중에 가장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 입가에 웃음을 씨익하고 올릴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2016.05.30 20:56
제 글을 읽고 마음이 가벼워지고 한 번 웃을 수 있으셨다니 뭔가 다 이루었다는 기분이... ^^
칼리토 님은 사람들과 편하게 만나고 쉽게 어울리는 능력자이신 것 같아서 부러웠다고
이런 기회를 틈타 잠깐 말씀드려야겠어요. ^^ (노년에도 외롭지 않으실 것 같아요. ^^)
앗, 벌써 시간이 9시 반을 넘었네요. 오늘 EBS 다큐프라임에서 <민주주의> 4부 "기업과 민주주의"를
방송하는데 재미있을 거예요. 어제 봤던 2부와 3부가 특히 재밌어서 오늘 듀게에서 같이 보자고 해야지
하다가 이 글 쓰는 바람에 잊어버렸네요.
2016.05.30 17:49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평준화된다는 말은 많이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를 위로하기에 좋은 말이라 느껴지네요. 같은 나이, 비슷한 몸 상태라도 살면서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추억을 가졌느냐에 따라 각 개인의 내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2016.05.30 19:20
2016.05.30 21:18
애니하우 님이 제 생각과 똑같은 얘기를 벌써 해주셔서 드릴 말씀이... ^^ (애니하우 님 찌찌 뽕 ^^)
살면서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추억을 가졌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거라는 말씀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해요. ^^
지금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가 시작돼서 이것 좀 보고 다시 생각해서 댓글 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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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일년 내내 피어있어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아름다움은
벚꽃이 사흘이면 진다는 것을 알고 바라볼 때와 질적으로, 혹은 강도에서 좀 다른 것 같아요.
꽃집에서 파는 장미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라도 얻을 수 있는 그 아름다움과
시간이 흐르면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 사이에는
뭔가 차이가 있어요. (이렇게밖에는 설명이... ㅠㅠ)
2016.05.30 23:21
맞는 말씀이에요. 글 자체도 많은 부분 공감이 갑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였어요. 꽃이 지고 나서야 아름다웠다고 느끼기보단 피어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모든 아름다운 순간들도 마찬가지로요.
2016.05.30 19:56
2016.05.30 22:18
나이가 들수록 표정이 얼굴이 되는 것 같아요. 어릴 때 갖고 태어난 얼굴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살아온 세월 동안 지었던 표정들이 주름이 되면서 뭔가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고 할까요.
사실 돈을 많이 갖고 있으면 나이가 들어서도 외모나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부모님 세대가 아니라 우리 세대가 늙으면 양상이 좀 달라지려나요??)
2016.05.30 20:29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혹시 감정 비율이 언제나 동일하지 않을까 싶은 거요. 보통 불안을 30% 정도, 만족을 20%, 즐거움을 50% 정도로 비율이 유지가 된다면, 상황과 달리 언제든 그런 식으로 비율에 맞춰지는게 아닐까 생각을 해봤죠. 그렇다면 무언가를 불안해하는 것을 최대한 줄이는게 삶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겠죠. 제가 여기서 굳이 노년빈곤 같은 불안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도, 개인의 가치관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질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조율하실 수 있는 것인지, 제 이해를 넘어서시는 것 같아요.
2016.05.30 22:53
잔인한오후 님의 글을 읽고 제가 노년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특이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어요. ^^ 어쩌면 삶도 해석의 문제인 것 같아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가끔은 멋진 해석이 어떤 작품에 의외의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죠.
주어진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제 경험과 삶에 최선의 해석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
2016.05.31 09:42
뒤늦게 읽고 무척 공감하며 눈물까지 흘렸네요. 세월은 그냥 지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성찰을 선사하기도 하나봅니다. 하나씩 잃어가지만 그만큼 더 행복한 추억으로 남는 거 겠죠. 개인적으로 약간의 상실을 근래 경험하던 터라 울림이 컸어요. 문득 이 주제로 인사이드 아웃의 시니어 버전도 나올 수 있겠구나 싶어요
2016.05.31 11:01
듀게분들과 함께 힘내보자는 건전한 취지로 쓴 글이지만 ^^ 조심스러운 주제이기도 하고
제 자신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제안해 보는 정도라 대단한 확신도 없고
제 경험이나 생각의 깊이로는 다른 분들을 제대로 납득시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이런 글을 쓴 후엔 어딘가 조용히 숨어 있고 싶고 ^^ 그래서 대댓글도 늦게 달았는데
그래도 공감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
2016.05.31 22:11
2016.06.01 00:05
제가 로맨틱을 좀 좋아하긴 해요. ^^ 몇 십 년 더 살아보고 왕창 늙은 후에 듀게가 여전하면
이 글에 댓글 달아서 결과보고 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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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밖에 나가 앉아서 사람들 보면 늙는다는게 얼마나 천차만별이라는 걸 언제나 뼈저리게 느끼는데-오늘 볼일 때문에 백화점 가면 또 느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