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당시 대한민국 독립군의 여러 이야기들은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매우 훌륭한 이야깃거리입니다. 그들이 극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아도 오로지 신념 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다는 점부터,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들이 잔인하리만큼 말끔하게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 총독 암살 작전에 주도적으로 투입한 인물 중 여성이 있다는 굵직한 여러 영화적 사실까지. 이 얼마나 극적입니까. 그들의 본거지인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위치했었다는 사실과, 시대적으로 개화기여서 조선, 일본, 중국의 오랜 문물과 서양식 신문물들이 마구 뒤섞인 공간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미학적인 디테일까지, 영화 만드는 사람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죠. 그리고 최동훈의 〈암살〉엔 일제 강점기 독립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감독이 하고 싶었을, 또한 관객들이 보고 싶었을 이야기들의 거의 대부분이 담긴 영화입니다. 일제에 멸시당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모멸감, 있습니다. 그들의 만행에 대한 분노에 찬 묘사도 있고요. 이에 맞서는 독립군들의 비장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장함 가운데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의연함도 있고요.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목표에 목숨을 바치는 이들의 근원적인 불안과 허망함에 대한 묘사도 있고, 심지어 제국주의 정부 군인들의 각 잡힌 군복을 구경하는 쾌감까지 꼼꼼이 심어둔 영화입니다. 아, 물론, 불리한 상황에서 허접한 무기들을 들처메고 일당백으로 일본 군인들을 상대하는 독립군들의 ‘액션’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요. 심지어 정치적인 목소리마저도 상당히 강한 영화입니다. 사기꾼이나 도박꾼, 절도범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품을 만들어 온 범죄영화 전문 감독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인데 말이죠. 한 마디로, ‘암살’은 ‘전지현 이정재 나오는 최동훈 감독의 영화’말고 ‘독립군 나오는 영화’로 생각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기대했음직한 것들은 다 채워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제가 정말로 재밌었던, 또 즐거웠던 것은, 근현대사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 영화로서의 작품이 아닌 최동훈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그 중 역시 최고봉은 안옥윤의 웨딩드레스고요. 네, 수많은 다른 관객분들도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독립군 영화’로서의 작품도 영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정치적 공정성을 획득하기 위해 애쓰는동안 ‘최동훈’은 많이 날아간 인상이었거든요. 거의 유일하게 ‘전지현을 전지현으로 활용하는 최동훈 감독의 최동훈다운 장면’이 바로 영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그 웨딩드레스 혈투 장면인데, 그 쾌감이 정말이지 압도적이었습니다. 웨딩드레스 차림의 여인이 총부림을 하는 자체는 사실 이 영화가 최초는 아니죠. 가터벨트에 총알을 숨기는 여성 킬러의 모습은 이제 거의 클리셰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새롭고, 신선하고, 또 자극적으로 느껴집니다. 뻔한 ‘취향’을 기가막히게 연출했단 얘기죠. 이 신선함은, ‘웨딩드레스 안에 가터벨트로 총알을 숨기고 부케에 감춘 총으로 하객을 암살하는 미모의 여성 암살자’의 모습이 그냥 페티쉬의 전시가 아니었단 데서 비롯됩니다. 안옥윤의 웨딩드레스엔 눈 앞에서 쌍둥이 언니를 잔혹하게 잃은 슬픔과, 언니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서 죽은 언니를 애도하려는 옥윤의 비장한 마음가짐이 있죠. 웨딩드레스 차림 자체가 ‘위장’이라 서스펜스도 당연히 확보돼고요. 가터벨트 역시 웨딩드레스에 총을 숨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소품이었고, 전지현의 액션 연기 역시 ‘여성 액션 연기’가 아닌 그냥 ‘암살자의 액션’이더군요.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그야말로 인형에 예쁜 옷 입혀 전장에 내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아, 물론, ‘예쁜 것’도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갖죠. 하지만 그 그림이 이야기의 울림과 만날 때 생기는 감정의 파도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영화 〈킬 빌〉로 똑같이 웨딩드레스 암살자 페티쉬를 내세운 쿠엔틴 타란티노가 놓친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 심지어 〈킬 빌〉의 ‘브라이드’는 영화 속에서는 웨딩드레스 입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죠. 전 아직까지 타란티노 감독 본인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킬 빌 볼륨2의 포스터에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칼을 든 여인의 모습을 영화 안에 넣지 못한 타란티노의 아쉬움에 짙게 배어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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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이 사족이란 관객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 좋은데 뒤에 가서 늘어진다’는 반응을 잔뜩 듣고 봐서인지 그렇게 뒷부분이 지지부진하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전 오히려 염석진의 최후를 다룬 마지막이 최동훈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발언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소 과잉된 해석일 수 있지만 염석진에 비해 나이듦이 전혀 없는, 분장 없는 안옥윤(전지현)이 등장해 16년 전 임무를 수행하겠다며 총구를 겨누는 모습은 어쩌면 그 상황이 실제가 아닌 일종의 상상 또는 ‘이 세대에 대한 작가의 요청’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아버님께서 한 때 다카키 마사오로 불리었던 분이시고, 현직 대통령님은 아버지의 역사에 대해 일언반구 말도 없이 그 역사를 고스란히 내려받아 그 자리에 계시며, 야당 대표님이자 차기 대선 유력주자이신 분 역시 친일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 ‘미츠코’처럼 살아오신 그 분은 요즘 ‘요즘 젊은이들’소리하시는 분이시죠. 과로로 죽는 사람들이 태반인 나라에서 국민의 나태를 걱정하시고 말입니다. 잊지 맙시다.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영감’(오달수 役)의 마지막 그 대사(우리 잊으면 안 돼.)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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