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20 22:46
튀긴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는 건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주말엔 뭘 해먹을까? 란 질문에 당신이 골라요란 답을 듣고 (사실 우리 둘다 이번 주에 엄청 힘들어서 뭘 생각해 내는게 일이다) 처음에는 그냥 지난 번에 잘 먹은 고추잡채를 할까 하다가 갑자기 돈까스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이렇게 돈까스가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아프거나 힘들면 먹고 싶은 음식이다.
어렸을 때 오른 손 네번째 손가락에 사마귀가 생겼다. 약을 바르면 낫는 가 싶다가 다시 더 커지고 다시 더 커지고. 보기도 나쁘고 나중에는 손톱도 이상하게 나왔다. 청량리에 성모병원 피부과를 갔더니 냉동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말그대로 냉동시켜서 죽이고 그걸 제거하는 치료였다. 생살에 수백개의 뾰쪽한 얼음 화살들이 콕콕콕. 어찌나 아팠는 지 소리내어 울었다. 이 치료를 일주일에 한번 꽤 오랫동안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치료가 끝나면 엄마는 청량리 미도파 백화점 (맞나?) 지하에서 돈까스를 사주셨다. 외식이란 걸 별로 하지 않았고 경양식이란건 더더욱이 특이했던 그때, 돈까스로 엄마는 나를 위로하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데 거의 마지막 치료는 어찌나 아팠는 지 울구불구 난리를 쳤고, 나의 한손을 잡고 계시던 엄마는 아마도 어떻게든 울음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내 등을 치셨다. 치료만 해도 아픈데 엄마한테 아파서 운다고 맞았으니 얼마나 억울했던지. 서운하고 억울해서 더 울었던 기억이 난다. 치료 마치고 아무말 안하던 나와, 때리셔서 마음 아프셨던 엄마는 아무말 안하고 그냥 지하에 내려가서 그날도 돈까스를 먹었다.
아마 내 또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먹은 경양식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돈까스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보면 참 이상한 음식이다. 일본음식인데 왜 한때는 서양음식의 대표가 되었는지. 거기다가 그때는 밥을 드실래요 빵을 드실래요 ? 라는 지금 생각하면 괴기한 질문도 자연스러웠다. (대학때 만난 영국 친구가 왜 한국사람들은 서양의 밥이 빵이라고 생각하지? 감자라고 감자. 이태리는 파스타). 밥을 주문하고 마치 촌스런 사람처럼 대했던 때. 그 때를 생각하면 스프레이 뿌려 앞머리를 올리지 않으면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 사진을 보고 웃는 것 처럼, 그런 웃음이 난다.
돈까스 용으로 고기를 썰어주는 게 아니니, 수퍼마켓 고기 파는 곳에서 제일 맞는 부위를 가져와 칼집을 내고, 양파즙과 허브 소금 후추 생강가루로 양념을 해 재워둔다. 돈까스는 사실 튀기는 음식 중 제일 쉽다. 큰 덩어리를 한번만 튀기면 되니까. 전분의 뽀드득 거림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전분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좋다. 기름에 넣을 려는 순간, 벨이 울린다. 그는 말하지 않고 파이를 구워왔다. 돈까스를 입에 넣는 순간, 맛있는 걸 먹으면 늘 그렇듯이 그의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랗게 된다. 밥한톨 안남기고 다 먹은 그와 차를 마시면서 지난 한 주, 각각 다른 이유로 힘들었던 그 한 주를 서로에게 이야기 한다. 다음 목요일에 타이완에 2주가 넘는 출장으로 돌아가는 그는 생각이 많아서 얼굴이 무겁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서로에게 이해한다고 말한 우리는 마치 상대방이 앉아있는 것을 지탱해 주려는 듯 서로에게 기대어 앉아 있는다. 그러다 서로를 바라보고 웃는다. 살짝 힘주어 손도 잡아본다.
그가 가고 나서, 아이를 재우고, 혼자 TV를 보고 있다가 남겨놓은 차가워진 돈까스 자투리 한조각을 마져 먹었다. 차가워도 맛있구나.
2015.09.20 22:49
2015.09.20 23:53
그건 칼리토님이 그냥 이유없이 제 글을 따듯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9.20 23:41
호오, 파이굽는 남자
2015.09.20 23:54
피아노도 연주해주는 남자이기도 ,, 하하
2015.09.21 00:21
2015.09.21 01:09
한동안 어른 밥은 안해먹었는데. 저의 유일한 취미입니다. 밥과 케익굽기
2015.09.21 00:49
돈까스 서양음식 맞아요. 오스트리아 슈니첼이 원조고, 그걸 일본이 자기식으로 받아들인거죠. 혹자는 일본식 돈까스가 일본인들이 "서양식" 요리라고 생각하는걸 스스로 발명한거라고도 하는데, 슈니첼 드셔보면 아 이제 원조구나 하게 될 겁니다ㅎ
2015.09.21 01:16
네 슈니첼이랑 비슷한 건 알아요. 이걸 원조라고 본다해도, 번역된 일본음식이라고 생각해요. 슈니첼이랑은 많이 다르니까요. 전 오히려 슈니첼을 먹고 나서 돈까스는 정말 일본음식이구나 싶었거든요.
2015.09.21 08:10
2015.09.21 16:21
오래 지나서 봐도 편한 사람, 참 좋죠. 감사합니다.
2015.09.21 09:40
같이 드셔서 더 맛있던 거라고 쓰려다보니 마지막에 걸리는 '차가워도 맛있었다'
그럼 진짜로 요리를 잘 하신 겁니다 ㅎ.
월요일 출발이 기분 좋네요.
감사합니다.
2015.09.21 16:21
요리를 잘해서인지, 아니면 그때 정말 배가 고팠던 건지 ㅎㅎㅎㅎ
2015.09.21 12:12
돈까스 별로 안좋아하는데 일본식 돈까스 먹고 싶어지네요. 포크커틀렛은 다른 음식인것 같아요.
2015.09.21 16:27
가끔 아주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지만 먹고 싶을 때가 있죠. 저한테 돈까스는 그런 음식이에요. 특히 아플때 따뜻한 돈까스가 먹고 싶어요. 이건 순전히 위에 쓴 습관 탓
2015.09.21 13:24
2015.09.21 16:28
왜 지난 번에 한국에 갔을 때 안사먹었을 까? 한참 생각했어요. 다른게 더 맛있는 게 많아서 ㅎㅎㅎ
2015.09.21 23:06
돈까스 제게도 피곤하고 지칠 때 먹는 음식인데... 뭔가 반갑네요. 이 글 읽으니 돈까스 먹고 싶어요. 집에서 튀긴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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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 자투리 한조각을 마져 먹었다.. 차가워도 맛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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