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관한 낙서

2015.11.13 16:42

어디로갈까 조회 수:1558

하나.
관계는 동행에 다름 아니죠. 관계를 맺어 나란히 걷는 동안에는 이런저런 우연의 일치들이 찾아와주곤 합니다.  내가 어제 보거나 느낀 '이야기'들을 오늘 '그/그녀'가 맥락도 없이 꺼내곤 하는 식이죠.  그런 순간들은 생의 비의가 한꺼풀 벗겨져 드러나는 듯한 느낌으로 짜릿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끝나갈 때는, 어제 이해했던 것들조차 막막해지고 오해 또한 너무도 쉬워집니다. 동행의 약호를 버리고 상식의 언어로 퇴각하여, 매순간 멀어지는 별과 별처럼 대화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리는 캄캄한 밤하늘의 어둠 속에 홀로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관계의 기억'이 또 하나의 새로운 별로 어둠 속에서 돋아나.... (던가 어쨌던가)

둘.
관계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둘 사이에 자주 빈 순간이 생겨나지 않던가요?  할 말이 없다기 보다는, 지금은 이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 말이에요.  그래서 상대가 마련한 침묵의 흡인력에 호응하여 - 혹은 배려하듯- 그 진공의 규격에 맞는 무표정만 지어보이는 일이 잦게 됩니다.  그런데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 만은 아니죠. 그의 침묵과 내 침묵이 날카롭게 부딪혀 낯설거나 과도하게 진지한 풍경이 열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당황하면 안 돼요.  그저 만들어진 침묵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들여다 볼 일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관계에는 관계를 매개하는 상황이나 의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매개는 자연스러워 자각되지 않지만, 매개의 매개성이 황황히 노출되는 경우도 있어요.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그것도 관계의 한 풍경이죠.  풍경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도 풍경이 갖는 매력의 한 부분이에요. 혹시 관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도, 기껏해야 불편하거나 실망하게 될 뿐이죠.  그 괴로움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침묵하고 싶으면 침묵해야죠.  오직 그 침묵만이 우리를 말에 이르게 할 것이니까요. 자유로운 호흡과 내부로부터 우러난 리듬으로, 너무 빠르지 않게, 너무 느리지도 않게 침묵해야죠. 어쩌면 우리는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기회를 맞아 또 하나의 숨쉬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셋. 
어느 날, '그/그녀'가 나에게 자신을 보아주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그/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충분히 내 안에 머물렀으며, 나 아닌 방향을 향해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조금씩 거리가 좁혀가는 중에 홀연히 '그/그녀'가 사라져버리는 날이 오기도 합니다. 그 빈 공간 너머로 미로 하나가 나타나죠.  가로등이 있어도 그 미로는 캄캄한 어둠입니다. 불빛을 받아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담장들은 아무도 기대지 않는 낡은 은유처럼 적막합니다.

어느 날, '그/그녀'는 다시 내게 자신을 보아줄 것을 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 젓습니다. 그리고 망각을 위하여 그의 손으로 내 손을 뻗어봅니다. 그러면 이제 내 눈엔 1만 km는 떨어져 보이는 그를 향해 나의 바다가 밀려갑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육지라는 좌절이고 내 안에서 출렁이는 건 평화로운 바다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흩어져야 할 것들은 길을 모르고, 밤하늘에는 또 새로운 별이 돋아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72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29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641
103922 오늘 놀러와 [7] 초콜릿퍼지 2011.03.22 3622
103921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가수가 일밤을 살리긴 할거 같네요. [7] 자본주의의돼지 2011.03.22 3228
103920 01410님 글 받아서.. 망원동 정광수의 돈까스 가게 [12] 2B 2011.03.22 4763
103919 아, 저랑 야심한 밤 폰팅하실분...써놓고 보니 스팸문자네 -.-;;;;;;;;;;;;;;;;;;;;;;;;;; [4] 2요 2011.03.22 2830
103918 사랑 고민 [2] 익명되다 2011.03.22 1791
103917 SKT 아이폰4 개통하신 분들 계십니까? 집에서 전화가 안터집니다. [4] 회전문 2011.03.22 2452
103916 달 밝은 밤 [1] 01410 2011.03.22 964
103915 정말 잘하는 중국집 아시는 분 계십니까? [11] 여은성 2011.03.22 4631
103914 와플 [8] Gillez Warhall 2011.03.22 2367
103913 서너가지 [1] 푸네스 2011.03.22 1400
103912 젤다 피츠제럴드 [3] hybris 2011.03.22 2697
103911 최근 히트 방송보면.. [3] always 2011.03.22 1142
103910 뒤늦게 헬로우 고스트, 가디언의 전설 외 잡담 가라 2011.03.22 1406
103909 인터넷 물품 배송은 얼마나 걸리면 늦는 걸까요 [7] DH 2011.03.22 1274
103908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의 컨셉이 뭔가요? [19] amenic 2011.03.22 2223
103907 [나는 가수다] 정말 그렇게 탈락을 수락했으면 괜찮았던 건가요? [22] Lisbeth 2011.03.22 3394
103906 노래 잘 부르는 일반인 동영상 하나 김건모 - 첫인상 [2] nishi 2011.03.22 1666
103905 마인드 컨트롤 어떻게 하세요? [7] always 2011.03.22 1309
103904 듀나in+연애in) 마트에 오토바이 잠깐 놓아두어도 괜찮을까요, 뭔가 미묘한 남녀관계 [22] 불별 2011.03.22 2666
103903 연애 지식이 부족해요 [13] she 2011.03.22 307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