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09 18:12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중 어느 걸 읽을까 하다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어요. 기억상실증 주인공이 과거를 찾는다는 설정은 흥미로웠고
초반에 망명귀족 얘기가 나올 때까지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데 90페이지 정도부터는 읽기는 읽는데도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이 이름이 앞에서도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도 헷갈리고
그런 이름들은 계속 쌓여가고... 200페이지 정도까지 읽었는데 처음부터 다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이왕 빌려왔으니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한번 읽어 보기로 했어요.
이 소설은 1~15로 이루어져 있는데 1은 재밌었지만 점점 진행될수록 엄청나게 등장하는 사람 이름들, 거리 이름들...
125페이지까지 읽다가 문득 이 작가는 왜 이렇게나 많은 이름들을 하염없이 나열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소설의 124~125페이지에 나오는 이름들만 해도 11개예요.
비아리츠, 클레망소 광장, 바스크 카페, 빅토르 위고 로, 생 조제프 성당, 레퓌블리크 로, 독퇴르 퀴르젠 가,
빌라 미라마르나, 빌라 렌 나탈리, 다르장 해변, 생트 마리 학교
이런 고유명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들이죠. 그 동네에 살지 않았던 독자에겐
"OO에 도착해서 OO를 뒤로 하고 OO로 접어들었다. OO를 산책하고 OO의 간판이 붙은 건물을 지나 OO학교로
아이들이 들어가는 걸 보고..." 같은 문장들의 연속인 거예요.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에 부딪히면 '어떤 것이 내 안에서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어려운 수학이나 물리 공식도 아니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데, 더구나 소설은 작가가 독자에게 최선을 다해 하는 말일 텐데
왜 그 말들이 내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걸까, 내 속의 무엇이 이 작가와 교감하는 것을 막고 있는가, 뭐 이런 생각이죠.
제가 발견한 첫 번째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람 이름, 거리 이름, 건물 이름 등 이름들이 너무 많고, 또 그런 이름들이 특히
공간을 묘사하는 데 많이 사용된다는 점이었어요. 생각해 보면 기억에는 대부분 고유명사가 들어가는 것 같아요.
내 친구 OO,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OO, 어릴 때 살던 OO아파트, OO초등학교, 깍두기가 맛있었던 OO설렁탕집,
아침마다 약수를 뜨러 다녔던 OO공원, 후배 OO랑 OO영화를 봤던 OO극장, 시집 OO을 읽었던 OO서점...
제가 기억하는 고유명사가 얼마나 될까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그렇게 많이 생각나진 않더군요.
나이가 들면 제일 먼저 잊혀지는 게 고유명사라고 하죠.
단 하나를 가리키는 명사이기 때문에 두뇌 속에서 활성화되는 횟수가 보통명사보다 훨씬 적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제일 먼저 잊혀지는 게 고유명사라면, 나이가 들수록 제일 기억하기 힘든 것도 고유명사겠죠.
고유명사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특정한 사람, 특정한 사물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특정한 사람, 특정한 사물에 대한 기억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 같아서 좀 쓸쓸해요.
어쩌면 제가 고유명사를 잘 외우지 못하는 건 제가 그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물 하나 하나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어떤 필요/의무 때문에 외워야 할 사람들의 이름은 수십 명이어도 지금도 잘 외우거든요. (그 필요/의무가 사라지면
순식간에 잊어버리지만...) 고유명사가 들어가는 문장들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는 제 모습을 보며 제가 기억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거기다 저는 언제부턴가 제가 살고 있는 공간에 참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하늘이나 강이나 호수, 달이나 나무 같은 자연의 모습은 좋아하지만 제가 사는 도시의 거리들, 가게나 건물들의 모습에는
전혀라고 해도 될 만큼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기억도 잘 못하고요.
소설 속에서도 집이나 거리의 모습 같은 공간을 묘사하는 부분이 나오면 흥미가 뚝 떨어져요. ^^
모디아노의 소설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 이름과 공간에 대한 묘사가 끊임없이 나오니 제가 견뎌낼 재간이 없는 거죠. ^^
하지만 제 경우에도 아주 어릴 적에 살던 곳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놀라워요.
조그만 잔디밭에 징검다리 돌이 하나씩 박혀 있고 굉장히 높은 철봉이 있었던 앞마당, 둥근 튜브로 된 풀장에 물을 담아 놓고 놀던 옥상,
시멘트 냄새가 나던 놀이터, 집 앞으로 내려다 보이던 중학교 운동장, 야구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함성이 들리던 경기장,
학교 가는 길에 있었던 내과의원, 온갖 종류의 도너스를 팔던 가게, 야구 글러브가 매달려 있던 서점...
어릴 때 살던 공간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한데 중학교 3학년 때 아파트가 밀집된 곳에 살게 된 후부터는 공간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제가 만약 좀 더 다양한 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에 살았다면, 그래서 공간에 대한 관심과 추억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면
모디아노의 소설을 조금은 더 재미있게 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모디아노의 소설에 집중하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소설에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두 소설 모두 1인칭 주인공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얘기하는 부분이 거의 없어요.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고 그에게 애착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게 제가 이 소설을 읽기 힘들었던 또 다른 이유 같아요.
저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소설을 읽거든요. 그런데 모디아노 소설의 주인공은 끊임없이 어떤 공간과 그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감정은 별로 싣지도 않고 묘사하고 있으니 저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죠.
(물론 그런 묘사가 어느 정도 미세하게 주인공의 심리를 알려주기도 하겠지만 제가 좀 둔한 사람이다 보니 대놓고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못 알아들어요. ^^)
제가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그 감정들을 파고드는 소설보다 타인의 모습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모디아노의 소설을 조금은 더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이것들은 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들이고 그 외 제가 깨닫지 못하는 다른 이유들도 있겠죠.
모디아노의 소설은 기존의 스토리 중심 소설이 아닌 것 같으니 그런 낯선 방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도 있겠고...
어쨌든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도대체 왜 내가 이 책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이유를 찾아보자는 동기 부여를 하며
끝까지 다 읽긴 했지만 1~15로 숫자가 붙여진 부분 중 1과 14를 제외하고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별로 집중해서 읽지 못했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겠죠.
이해하기 힘든 소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왜 이 소설을, 왜 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경험인 것 같아요. 그 소설,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으니까요.
혹시 모디아노의 소설을 재밌게 읽은 분이 계시면 어떤 점이 좋았는지 얘기해 주시면 덕분에 저도 덩달아 좋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
이렇게 모디아노의 소설을 간신히 마무리하고 이번 주에는 Kaffesaurus 님이 엊그제 듀게에 소개해 주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아메리카나 1, 2>를 읽을까 해요. 세계문학 탐험이니 아프리카 작가가 쓴 소설도 끼워줘야죠. ^^
혹시 세계 문학 중 권하고 싶은 소설이 있으시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EIDF가 시작되기 전인 다음 주까지는 몇 권 더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2016.08.09 18:34
2016.08.09 18:41
푸른나무 님은 파트릭 모디아노와 성격이 비슷한 분일 것 같아요. ^^
섬세하고 차분하고 다소 건조하고?? ^^
저는 좀 둔감하고 혈기왕성한 사람이라 이런 소설을 읽기가 힘든가 싶기도 하고...
요즘 올림픽 때문에 피가 더 뜨거워져서 걱정이군요. ^^
2016.08.09 19:03
하하 어떨지.. 제가 그럴까요? 저는 김이설의 소설집을 막 읽었어요. 그리고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의 마지막 몇 권들..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책도 꺼내놓긴 했는데 어째 잘 안되네요. 올림픽 시즌엔 책 읽기 어렵죠? 전 뭐 관심도 없는데도 더워서 그런거 같아요ㅎㅎ
2016.08.09 19:21
<어두운 상점들의..>와 <추억을 완성하기...>를 읽었던 때가 올여름 가장 더웠던 때였던 것 같아요.
더위 먹고 정신이 흐려져서 집중이 안 됐을지도... ^^
지난 주말에 남자 양궁, 여자 양궁 단체전을 차례로 보면서 피가 막 끓어오른 탓도 있고 ^^
이번 주말에 양궁 개인전을 보면 또 피가 끓어오를 텐데 <아메리카나>는 그렇게 차분한 소설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에요. ^^
2016.08.09 19:05
몽환적인 아름다움,,,,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슬픔까지도...그런게 있어요. 내 과거도 아닌데 마치 나의 과거를 찾는 여행처럼.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액면가로 읽으면 지루하기 그지없게 느껴질 수도 있죠. 제가 젊은 시절(????) 가장 사랑한 작가라서 그 소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도라 부르더를 위하여"는 좀 더 구체적인 소설이니까
이보다는 덜 추상적으로 느끼실거에요. "잃어버린 거리"를 가장 좋아하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지만 다시 읽으면 제 잃어버린 감성을 자극해서
너무 가슴이 아플거 같네요. 한 때는 소설광이었지만,,,,이제는 감성이라고는 1mg도 남아있지 않는 현실+냉소주의자가 되었다는게 새삼 떠오르네요.
2016.08.09 19:32
<잃어버린 거리>가 감성을 자극한다니 나중에 모디아노 소설을 읽고 싶을 때 일순위로 놓을게요.
(가슴 아프게 하는 소설 좋아해요. ^^) 저는 어떤 땐 감성이 흘러넘치는 사람 같은데 어떤 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기도 해서 어떤 소설을 재밌게 읽을지 제 자신도 잘 모르겠어요. ^^
모디아노가 각본을 쓴 루이 말 감독의 영화 라콩브 루시엥(Lacombe Lucien, 1974)은 참 재밌게 봤는데...
2016.08.09 19:15
2016.08.09 19:44
낭랑님도 <아메리카나>를 재밌게 읽으셨다니 더 기대되네요. 아프리카 작가로는 존 쿳시를 제일 좋아하는데
(라고 쓰다 생각해 보니 아는 아프리카 작가가 존 쿳시뿐 ^^) 아디치에의 소설은 또 어떨지 궁금해요.
TED 영상으로 보니 아디치에는 좀 다혈질인 것 같아서 저랑 잘 맞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는 러시아나 칠레, 아프리카같이 피가 뜨거운 나라 사람들과 교감해야 할 듯 ^^)
2016.08.09 20:49
2016.08.09 21:34
오옷, 너무 멋진 문장들이에요. ;;TOT;;
이 댓글을 보고 갑자기 생각났어요. 저도 도시를 걷는 걸 무척 좋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
마음 아픈 일이 생기면 한없이 거리를 걷곤 했죠. (방황하던 옛시절이 생각나네요. ^^)
모디아노의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제가 공간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2016.08.09 21:02
2016.08.09 21:43
만약에 님,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아요. ^^ 이 댓글을 보자마자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검색해서 예약신청을
해두었어요. 내일 저녁에 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2011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도서라니 마음이
푸근해지네요.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중국 소설은 읽어본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아름답고
슬프고 힘이 있는 소설이라나 몹시 기대됩니다. 좋은 소설 추천 감사합니다!!!
2016.08.09 21:56
하하하 굉장히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소설 읽다가 재미없으면 어떤 사유도 없이 '재미없음' 하고 던져버리는데 반성 좀 해야할듯;;;
2016.08.09 22:14
이번에 듀게분들이 추천하신 책들을 읽으며 제가 제 자신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이런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저런 소설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이라고...
읽어보니 제 취향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책이 의외로 제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갖고 있는 경우도 많았고
제 취향일 거라고 생각했던 책이 의외로 읽기 힘든 경우도 많았어요.
모디아노의 소설도 제가 기억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고 흥미롭게 읽을 만한 소설인데 읽기가 힘들다 보니
도대체 왜!! 왜!! 하면서 좀 더 생각해 봤던 것 같아요. ^^ (저도 항상 이유를 생각해 보는 건 아니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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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둘 중에는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좀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좋단 말이죠. 여름에 착실히 읽고 계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