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고

2016.08.09 18:12

underground 조회 수:1248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중 어느 걸 읽을까 하다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어요. 기억상실증 주인공이 과거를 찾는다는 설정은 흥미로웠고 


초반에 망명귀족 얘기가 나올 때까지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데 90페이지 정도부터는 읽기는 읽는데도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이 이름이 앞에서도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도 헷갈리고  


그런 이름들은 계속 쌓여가고... 200페이지 정도까지 읽었는데 처음부터 다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이왕 빌려왔으니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한번 읽어 보기로 했어요. 


이 소설은 1~15로 이루어져 있는데 1은 재밌었지만 점점 진행될수록 엄청나게 등장하는 사람 이름들, 거리 이름들... 


125페이지까지 읽다가 문득 이 작가는 왜 이렇게나 많은 이름들을 하염없이 나열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소설의 124~125페이지에 나오는 이름들만 해도 11개예요. 


비아리츠, 클레망소 광장, 바스크 카페, 빅토르 위고 로, 생 조제프 성당, 레퓌블리크 로, 독퇴르 퀴르젠 가, 


빌라 미라마르나, 빌라 렌 나탈리, 다르장 해변, 생트 마리 학교


이런 고유명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들이죠. 그 동네에 살지 않았던 독자에겐 


"OO에 도착해서 OO를 뒤로 하고 OO로 접어들었다. OO를 산책하고 OO의 간판이 붙은 건물을 지나 OO학교로 


아이들이 들어가는 걸 보고..." 같은 문장들의 연속인 거예요.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에 부딪히면 '어떤 것이 내 안에서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어려운 수학이나 물리 공식도 아니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데, 더구나 소설은 작가가 독자에게 최선을 다해 하는 말일 텐데 


왜 그 말들이 내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걸까, 내 속의 무엇이 이 작가와 교감하는 것을 막고 있는가, 뭐 이런 생각이죠. 


제가 발견한 첫 번째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람 이름, 거리 이름, 건물 이름 등 이름들이 너무 많고, 또 그런 이름들이 특히 


공간을 묘사하는 데 많이 사용된다는 점이었어요. 생각해 보면 기억에는 대부분 고유명사가 들어가는 것 같아요. 


내 친구 OO,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OO, 어릴 때 살던 OO아파트, OO초등학교, 깍두기가 맛있었던 OO설렁탕집, 


아침마다 약수를 뜨러 다녔던 OO공원, 후배 OO랑 OO영화를 봤던 OO극장, 시집 OO을 읽었던 OO서점... 


제가 기억하는 고유명사가 얼마나 될까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그렇게 많이 생각나진 않더군요. 


나이가 들면 제일 먼저 잊혀지는 게 고유명사라고 하죠. 


단 하나를 가리키는 명사이기 때문에 두뇌 속에서 활성화되는 횟수가 보통명사보다 훨씬 적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제일 먼저 잊혀지는 게 고유명사라면, 나이가 들수록 제일 기억하기 힘든 것도 고유명사겠죠. 


고유명사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특정한 사람, 특정한 사물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특정한 사람, 특정한 사물에 대한 기억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 같아서 좀 쓸쓸해요. 


어쩌면 제가 고유명사를 잘 외우지 못하는 건 제가 그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물 하나 하나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어떤 필요/의무 때문에 외워야 할 사람들의 이름은 수십 명이어도 지금도 잘 외우거든요. (그 필요/의무가 사라지면 


순식간에 잊어버리지만...) 고유명사가 들어가는 문장들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는 제 모습을 보며 제가 기억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거기다 저는 언제부턴가 제가 살고 있는 공간에 참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하늘이나 강이나 호수, 달이나 나무 같은 자연의 모습은 좋아하지만 제가 사는 도시의 거리들, 가게나 건물들의 모습에는 


전혀라고 해도 될 만큼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기억도 잘 못하고요. 


소설 속에서도 집이나 거리의 모습 같은 공간을 묘사하는 부분이 나오면 흥미가 뚝 떨어져요. ^^


모디아노의 소설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 이름과 공간에 대한 묘사가 끊임없이 나오니 제가 견뎌낼 재간이 없는 거죠. ^^ 


하지만 제 경우에도 아주 어릴 적에 살던 곳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놀라워요.  


조그만 잔디밭에 징검다리 돌이 하나씩 박혀 있고 굉장히 높은 철봉이 있었던 앞마당, 둥근 튜브로 된 풀장에 물을 담아 놓고 놀던 옥상, 


시멘트 냄새가 나던 놀이터, 집 앞으로 내려다 보이던 중학교 운동장, 야구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함성이 들리던 경기장, 


학교 가는 길에 있었던 내과의원, 온갖 종류의 도너스를 팔던 가게, 야구 글러브가 매달려 있던 서점...  


어릴 때 살던 공간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한데 중학교 3학년 때 아파트가 밀집된 곳에 살게 된 후부터는 공간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제가 만약 좀 더 다양한 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에 살았다면, 그래서 공간에 대한 관심과 추억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면 


모디아노의 소설을 조금은 더 재미있게 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모디아노의 소설에 집중하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소설에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두 소설 모두 1인칭 주인공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얘기하는 부분이 거의 없어요.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고 그에게 애착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게 제가 이 소설을 읽기 힘들었던 또 다른 이유 같아요. 


저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소설을 읽거든요. 그런데 모디아노 소설의 주인공은 끊임없이 어떤 공간과 그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감정은 별로 싣지도 않고 묘사하고 있으니 저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죠. 


(물론 그런 묘사가 어느 정도 미세하게 주인공의 심리를 알려주기도 하겠지만 제가 좀 둔한 사람이다 보니 대놓고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못 알아들어요. ^^) 


제가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그 감정들을 파고드는 소설보다 타인의 모습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모디아노의 소설을 조금은 더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이것들은 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들이고 그 외 제가 깨닫지 못하는 다른 이유들도 있겠죠. 


모디아노의 소설은 기존의 스토리 중심 소설이 아닌 것 같으니 그런 낯선 방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도 있겠고... 


어쨌든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도대체 왜 내가 이 책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이유를 찾아보자는 동기 부여를 하며  


끝까지 다 읽긴 했지만 1~15로 숫자가 붙여진 부분 중 1과 14를 제외하고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별로 집중해서 읽지 못했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겠죠. 


이해하기 힘든 소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왜 이 소설을, 왜 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경험인 것 같아요. 그 소설,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으니까요.  


혹시 모디아노의 소설을 재밌게 읽은 분이 계시면 어떤 점이 좋았는지 얘기해 주시면 덕분에 저도 덩달아 좋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


이렇게 모디아노의 소설을 간신히 마무리하고 이번 주에는 Kaffesaurus 님이 엊그제 듀게에 소개해 주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아메리카나 1, 2>를 읽을까 해요. 세계문학 탐험이니 아프리카 작가가 쓴 소설도 끼워줘야죠. ^^ 


혹시 세계 문학 중 권하고 싶은 소설이 있으시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EIDF가 시작되기 전인 다음 주까지는 몇 권 더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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