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2 13:18
몇년 전, 어느 친구와 대선을 앞두고 토론 비슷한 것을 하는데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개개인의 노력으로만 그 결과가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좀더 애쓰고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느 정도 베풀고
환원시킬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가
'좌빨'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뭔질 몰라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다가
좌파를 말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좌파, 우파가 각각 어떤 생각을 대표하는지, 그 이름 속 방향과 가치관을 연결짓지 못해
(그 전까지는 우익이 진보적인 것인지 보수적인 것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헷갈리다가, 그 일 이후로 알게 되었지요.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좌빨로 불리는지도 알지 못하고,
사람으로 태어나 저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했는데 졸지에 좌빨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전까지 좌파 우파도 제대로 구별짓지 못했던 저인데 말이지요.
육체적인 노동을 제공하여 자신을 돕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아이를 낳을 때에는 가능한, 부모의 입장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걸 생각하고
부모로서 내가 자녀에게 정신적 경제적으로 뭘 해줄 수 있는지를 자녀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보고 고려해야 하고,
같은 사람과 사람으로서 아무리 경제적 댓가를 제공하고 한쪽에게 일을 맡긴다 해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 존중을 하고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아야 하고...
이와 같은, 얼마전까지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성인군자 아닌 이상 매번 그렇게 지킬 수는 없다 해도,
늘 맘에 머릿속에 기준으로 삼고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려는 마음을 한켠에 가지고 살아야 한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더군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요.
저런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를 않고, 정말 아무런 생각없이 자기 편한 대로, 말과 행동이 나오는 대로 사는 것이 제일이지,
저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답답하고 세상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부류지어 있었다거나, 몇 번 대해 보면 그런 사람인지를 알 것 같다거나,
그렇게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을 만큼,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알아볼 수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다는 점이 다른 듯합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제 3자가 유추해서 '여성이니까 노린 것 아닌가' 도 아니고, 범죄자 자신의 입으로 "여성이라서 죽였다"고 한 사건입니다.
물론 조현병이 중요한 한몫을 했다고는 하지만, 피해자가 여자라서 죽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댓글엔가 썼듯이, 남자 여자 여혐 남혐 같은 단어를 들먹이며 사건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자라 죽였답니다. 그리고 데이트 폭력, 부부간 살인 상해 등 이와 같은 일들이
너무나 자주 뉴스에 등장하는 것도 여성으로서 앞날이 두렵습니다.
사람이 죽었으니 가슴아파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그 원인부터 살펴서 해결해 나가도록
힘을 모아도,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인데,
내가 죽이지 않았고 내가 여혐하지 않았는데 왜 여자들은 저러는가...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뭐 그런 의견도 있을 수는 있다고-워낙 세상에는 다양한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요-생각은 했는데,
점점 그 의견이 세를 이루어,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살해당한 여성에 대해 마음아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원인을 찾는 '생산적인' 논의는 다 덮여 버리고,
곁가지와 같은 저런 의견이 어느새 대세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진심으로, 내가 이상한가, 내가 이런 세상에서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건가, 무섭고 아득합니다.
제가 듀게에 글을 쓸 때 때때로 이런 말을 관용구마냥 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너무 나이브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제가 너무 나이브한 것일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아무리 제각기의 입장이 있고 다양성이 있다지만
분명 옳은 것들, 그래야 하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인간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것들이요.
심지어 요 며칠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더랬습니다.
세상 살며 자기 앞가림하기 바쁜 사람들처럼, 나도 세상 일에 관심 뚝 끄고 나 편한 대로 살다가
어디서 험한 일 당해서 죽게 되면 죽는 것이고, 안 그러고 별일 없이 살아남으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거봐 세상에 그런 일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니까'
하면서 으쓱하면 장땡 아닌가.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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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 대해서 요새 생각해보는데, 저는 사건의 진상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이긴 해도 남들이 어떤 근거에 의해서 판단을 내린다고 불쾌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도 하구요.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차별적이라는 것 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상황이 많이 암울하죠. 만일 이 사건을 여성에 차별적인 지평에 두고싶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는 근거가 나온 후에 해야합니다. 지금 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고, 피해자에 대한 예의도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 정말 사건의 진상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 사회가 여성에 차별적인 것과, 사건과 관련해서 차별적인 말이 나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멕시코인이 미국에서 정신분열증 중증 환자에게 살해당했고, 이유를 멕시코인이라서라고 붙였다면 멕시코인의 반발이 일어나는건 당연한 일입니다.(멕시코라고 붙인건 미안한 일입니다만, 미국에서 멕시코인을 혐오하는 정서가 있던것 같더군요. 비유를 워낙 못하지만 좀이라도 의미가 통하는 비유를 하려구요.)
그래서 지금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게 아닙니다. 저는 종종 반응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말을 안하고 있고, 딱히 기분나쁘지도 않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선 보호받아야할 대상은 피해자, 그 다음은 피해자의 주변사람, 그 다음은 피해자의 동기와 관련된 사람들 일겁니다.
구체적 방안은 없지만 더 나은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