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참 후에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실록 영조 99권 38년 5월 22일 2번째 기사


: 사도세자가 광증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아들인 은전군을 낳아준 아내 경빈 박씨를 때려 죽인 사실이 나경언의 고변으로 인하여 드러났다. 신하들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할 사도세자를 두려워하여 이 사실을 숨겼다가 나경원의 고변으로 영조가 이를 알게되자 "사모를 쓴 자들 모두 나를 속였으니"라 말하며 화를 내고 있다.



2.

사도세자는 휘는 선이요, 자는 윤관이라. 재위11년 을묘년(1735년) 정월 21일 탄생했는데 영빈이 낳았다. 나면서 남달리 영특했고 자라면서 문리 역시 통해 거의 조선의 희망이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태갑을 배워 망할 일로 가려고 하니 슬프다. 스스로 깨닫고 마음을 잡기를 가르치고 수시로 말했으나 소인배 무리를 가까이해 장차 나라를 망칠 지경이었다. 오호라!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 시절에 이런 자를 나는 들은 바 없었다. 그 근본은 넉넉하고 좋게 태어났으나 마음을 잡지 못해 미치는 데로 흘렀다. 

새벽부터 밤까지 태갑의 뉘우침 같은 것을 바랐으나 마침내 만고에 없는 일에까지 가서 머리 센 아버지가 만고에 없는 일을 저지르도록 했구나. 오호라 애석한 것이 그 자태요. 한탄스러운 것이 이 적는 글이다. 슬프다 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 영조가 쓴 사도세자 묘지명


: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일을 슬퍼하기는 하였으나, 후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묘지명에서조차 사도세자에 대하여 "세자 시절에 이런 자를 나는 들은 바 없다"라며 그의 무도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3.

당번내관 김한채라 하는 것을 먼저 상하오셔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셔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사람의 머리 버힌 것을 보앗으니... (중략) 의관이며 연관(가마꾼)이며 액속(궁궐수행원)이며 죽은 거들도 있고 병신된 것도 이셔 하루에도 대궐서 사람을 여럿을 저내니...(중략)

- 한중록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가 앉았는데, 좌의정·우의정이 입대(入對)하였다.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승지(承旨)는 글로 쓰라. 근래에 기(氣)가 올라가는 증세가 때로 더 심함이 있어 작년 가을의 사건까지 있었는데, 이제 성상께서 하교하신 처지에 삼가 감읍(感泣)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지나간 일을 뒤따라 생각하니 지나친 허물임을 깊이 알고 스스로 통렬히 뉘우치며, 또한 간절히 슬퍼한다. 내관(內官) 김한채(金漢采) 등에게 해조(該曹)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후하게 거행하여 나의 뉘우쳐 깨달은 뜻을 보이라.”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춘방관(春坊官)이 비록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너그럽게 용서하여야 될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 실록 영조 91권 34년 3월 6일 2번째기사

 

 

: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의 일부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광증과 그로 인한 살인행각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다. 한중록에는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가문을 비호하기 위해 일부 사실과 다르게 서술된 부분도 있지만, 사도세자의 광증에 대한 묘사 만큼은 다른 기록과 대질해볼때에 어그러짐이 없다. 더욱이 한중록의 기록에 보이는 사도세자의 정신이상 증세에 대해 분석한 논문 (정하은·김창은, 「사도세자에 대한 정신의학적 고찰」,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 정신과학교실) 에서는 그 묘사에 대하여, 현대적인 정신의학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 멋대로 지어 쓰기 힘들 정도로 사실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기록에서 보이는 사건 중에서도 특히 충격적인 사건은 사도세자가 내시 김한채를 의심하다가 급기야는 이를 살해하여 머리를 잘라내 들고 다니며 내인들에게 보여주며 위협을 일삼은 일이었다. 실록에서는 이에 대한 기록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으나, 사도세자가 내시 김한채를 죽인 일을 생각하며 "뉘우치겠다"라고 하면서 그의 유족들에게 휼전을 내리도록 한 것에서 이 사건이 사실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4.

세자가 중관, 내인,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

- 대천록 상


: 이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집적 읽었던 대천록의 일부 구절이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구절을 문제삼지 않았고, 대천록의 내용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본래 천유록이었던 제목을 손수 대천록으로 고쳐주기까지 하였다. 정조는 영조에게 부탁하여 아버지의 살인행각을 다룬 승정원일기의 많은 기록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였으나, 이런 기록까지 어찌하지는 못하였다.



5.

병이 점점 깊어 바랄 것이 업사오니 소인이 참아 이 말씀을 정리에 못 하올 일이오대 성궁을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지와 종사를 평안이 하옵는 일이 올사오니 대처분을 하오소서.

- 한중록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실록 영조 99권 38년 5월 22일 2번째 기사


: 한중록에서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없애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가 사도세자의 친모인 선희궁 영빈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도세자의 광기와 범죄행각으로 인하여 혜경궁 홍씨 및 세손인 정조마저 위태로울 지경에 처하자 결국 며느리와 손자의 목숨이라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는 실록에서 집적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도승지 이이장이 이에 대하여 언급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이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기로 결심한다. 영조는 자신의 뒤를 이어 탕평정치를 통해 다져진 안정적인 왕권을 유지할만한 후계자를 원했으나 이미 정신병에 시달리던 사도세자는 이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오히려 영조는 평소에 총명하여 무척 아끼던 세손, 즉 정조를 후계자로 삼기로 마음을 완전히 고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후에 사도세자가 살아남아 조정에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는 일을 막기 위해 사도세자를 완전히 제거해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를 국법에 의거하여 처형할 경우에 후계자인 세손 또한 죄인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서 그 정통성이 훼손될 염려가 있었다. 때문에 영조는 국법에 나와있지 않은 방법으로 사도세자를 죽여서 며느리와 세손이 죄인의 식솔이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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