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의 시 몇 편

2016.01.25 01:40

underground 조회 수:1256

사실 윤동주 시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서시'나 '별 헤는 밤'의 몇 구절들은 접할 때마다 좀 오글거렸고요. ^^


그런데 최근 이 분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시들을 찾아서 읽다보니 


의외로 제 마음을 움직이는 시들이 있더군요. 


노래를 듣거나 시를 읽다 보면 그 가수가, 그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냥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 분의 시를 읽는 동안, 많이 슬퍼하고 외로워하는 20대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어요. 


이제까지 윤동주 시인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오래 전에 이 분의 시집을 한 번쯤은 읽은 것도 같은데 말이죠. 


시를 만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운이 닿아야 하는 일인가 싶기도 하네요.     


이상 시인만 좋아하고 이제까지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 (얼굴도 잘 생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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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상 시인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윤동주 시인의 조용한 매력을 몰라봤어요. ^^) 


읽었던 시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 몇 편 올려봅니다.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흐르는 거리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 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싣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상자를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이여! 그리고 김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 보세.」 몇 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 밤을 새워 기다리면 금휘장에 금단추를 삐었고 거인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림(來臨),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위로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뒷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쳐다 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거미줄을 헝클어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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