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유일하게 제가 본 박찬욱 영화중에서 찜찜함이 남는 영화였어요.


박찬욱이 다른 영화들에서 옳건 그르건 상관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왔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라는 정해진 답안을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진짜 하고싶었던 것은 물론 사도마조히즘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저택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었을 터이고요.

영화 어딜봐도 박찬욱 특유의 미쟝센에 대한 집착과 노력이 팍팍 들어간 곳은 저택이니까요.


물론, 한 때 진보정당을 공개지지하기도 한 나름 리버럴한 지식인인 박찬욱이

나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가학으로 가득찬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 라고 할 순 없으니,

핑계로 하하하, 여혐영화인줄 아셨죠? 여러분 사실 이건 매우 정치적으로 올바른 여성주의적 영화입니다.

마초남성들의 세계를 뚫고 나가는 여성들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하하하.

이런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그 생각이 들었던 건, 박찬욱이 백작을 다루는 방식 때문이었어요.

영화 초반까지만해도 백작은 단순한 사람이죠.

그런데 영화 중반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지면서 아가씨, 하녀와 함께 백작도 복잡해지기 시작해요.

서로 속고 속인다는 점에서, 적어도 윤리적 층위에서는 중심 세 인물이 동등해져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복잡하죠.


반면에 숙부인 코우즈키는 내내 나쁜놈이라는 점에서 저 세 인물과 대비되요.

그리고 그런 코우즈키랑 대비되면서 무당과 노비사이에서 태어난 백작을 움직이는 동력이

성이 아니라 돈과 성공임도 드러나고요.

마지막 고문장면에서 드러나듯이 심지어 백작은 아가씨랑 첫날밤을 치르지도 않아요!


그런데 갑자기, 영화 후반부에 가면서 복잡한 인물들을 복잡한 관계가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어져요.

이 과정에서 거래라는 방식이긴 하지만, 탈출을 돕기도 했던 백작이 갑자기 나쁜 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놈으로 한순간에 전락해요.

물론, 이 영화에서 나쁜놈의 자리는 마초의 자리고요.


이걸 보여주는게 후반부의 아가씨와 백작 간의 호텔에서의 베드신이에요.

백작과 아가씨의 성행위 장면은 합의된 것(정확히는 아가씨가 의도한 것)이에요.

그런데 박찬욱은 갑자기 백작에게 "여자들은 사실 억지로하는 관계에서 극상의 쾌락을 느끼죠."

라는 뜬금포 대사를 치게 만들면서 마치 백작이 아가씨를 강간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요.

분명히 그 직전까지 둘 간에 유혹의 게임이 오갔는데도 불구하고요. 


덕분에 갑자기 백작이란 캐릭터가 가진 복잡성이 사라지고,

백작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가씨-하녀의 반대편에 위치한 나쁜 마초가 되어버려요.

그리고 이런 느낌에 쐐기를 박는 대사가, 백작의 유언인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 다행이다”고요.


이걸 보면서, 박찬욱이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내세우기 위한 알리바이를 성급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백작이라는 캐릭터를 얄팍하게 만들어 소비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비겁하죠.

덕분에 아가씨와 하녀의 이야기도 마지막에 좀 얄팍해지고요. 변장해서 배타고 가는걸로 끝내다니...

특히 하녀가 탈출하는 장면은 예전의 진중권이라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랬을 거에요.


이런 식으로 하고싶은게 아니라 해야될 해야했다면,

차라리, 아가씨와 하녀가 각성해서 저택으로 돌아가 일본도로 코우즈키를 비롯한 남자들을 다 쳐 죽이는 식이었으면

더 유쾌했을 거에요. 뭐, 그러면 이미 박찬욱이 아니라 타란티노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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