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보니까 꽤 기네요. 

도입-본론-결론까지 있군요.

별표로 각 부분을 표시했으니, 필요한 곳만 끊어 읽어도 좋습니다. 

길면 노잼확실입니다만, 저의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

과거와 완전히 격리된 예술 추구 시도는 항상 있어왔습니다. 

아방가르드 사조나 초현실주의가 그런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 했습니다. 

가령 문자 매체들은 과거에서 이어온 문자의 맥락을 벗어날 수 없지요.  

초현실주의나 현 미술의 괴한 이미지들도, 과거에서 소재를 취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문학의 중요작이나 고전들을 비평할 때 당대의 풍습이나 작가의 사생활을 쫓기도 합니다. 

가령 "이 칙칙한 문장은 1920년 8월 쯤에 썼다고 보이는데, 작가의 바람이 걸려서 결혼 생활이 망해가던 때였다." 라는 식입니다. 

좀 더 넓게 봐서 호메로스는 당대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했나, 를 알기 위해 옛 희랍 땅을 파헤쳐 고고학적 탐사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대조하는 수준이겠지만요.) 

이러한 작업 또한 비평이라면 비평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미술 또한 비슷합니다. 

잭슨 폴락의 작품을 말할 때는 오직 작품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의 작업 태도나 개인사를 끌어오지 않으면 작품으로서 성립이 안 됩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또한 뒤따랐던 격렬한 반응을 설명하는 편이 이해가 쉽습니다. 


연령이나 종족까지도 맥락에 포함됩니다. 

외국의 모 코끼리 사육원에는 코끼리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시킨다고 합니다. 

나름 모양은 잡혔는데 보면 허접합니다. 

그래도 한 오십만원? 정도 가격을 매겼고 나름 잘 팔린다더군요. 

이는 "코끼리가 그린 그림"이라는 맥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렸다고 하면 그 돈 주고 누가 살까요? 

천재 어린이 작가의 이발소 그림 같은 것들이 꽤 비싼 가격에 팔리는 현상도 짦게 첨언합니다.  


초현실주의 미술가인 '데 키리코'는 후반기 작품일수록 가격이 뚝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왜냐면 화풍이 정립된 이후로는 그림이 비슷비슷해서, 초기작에 가까울수록 가격이 높다는 겁니다.

비슷비슷한 그림이고, 아우라나 가치만 충만하다면 초기작이나 후기작이나 가격이 비슷해야 할 겁니다. 

이런 차이의 이유는 비슷한 작품을 양산했다는 맥락에서 발생합니다. 

줏어들은 이야기일 뿐, 정확하진 않습니다. 

제가 "데 키리코 그림 얼마예요?" 라고 묻고 다닐만큼 갑부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꽤 그럴 듯한 이야기라고는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예술을 대할 때는 그의 맥락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어떤 예술도 허공에 홀로 선 깃대처럼 있을 수는 없습니다. 


***

본론입니다. 


연구가들은 유명작품들을 열나게 파지만, 실은 과연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들의 유명함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나름의 내적 완성도를 갖추기 때문입니다. 

1920년에 작가가 이혼했든 말든, 보통 사람이 좋은 작품을 보고 즐기는 데에는 그 사실을 알아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좋은 작품은 오독도 꽤 그럴 듯하게 됩니다. 


오히려 맥락을 파야 이해되는 쪽은 조잡한 작품입니다. 

내적 완성도가 떨어지니 주변부를 봐야 어떤 의도였는지 파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설명충이 되어 "이런 저런 의도였어요."라고 말해주면 더 확실하죠. 

그래도 너저분한 작품은 여전히 너저분하겠지만요.  

 

메피스토님은 '학교 가기 싫은 날'과 웹툰 '노이즈'를 비교하셨습니다. 

이 비교는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메피스토님은 '노이즈'에 얽힌 맥락을 무시하는 듯이 보입니다. 

일단 메피스토님은 둘 다 조악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으니, 그렇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비평적인 태도에 입각해서 둘에 어떠한 맥락과 역사가 있는지 비교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노이즈에서 문제가 되었던 점은 만화의 묘사 수준과는 별도로 작가의 사상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피스토님이 첨부하신 링크에 의하면, 작가는 여러 발언에 의해서 명백한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강간이 꿈이다." 라는 말도 했던 모양입니다. 반성과 사과도 건성이었고요. 

링크의 작성자가 언급한 것처럼 반성과 사과를 확실해 했다면, 

"성폭력의 무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의도와는 달리 읽혀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식이었다면, 여론의 폭탄을 쳐맞긴 쳐맞았어도 훨씬 끕이 덜 했겠죠. 


그럼 '학교 가기 싫은 날'은 어떤가요? 

처음에는 출판사도 '작가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 출판을 결정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작가 부모도 시인이라는데, '작품에 문제 없다.' 라고 단언했고요.

작가의 인터뷰와의 짧은 인터뷰도 있으니 참고해도 좋습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7770808&cloc=olink|article|default

또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표현이 온건하고, (메피스토님은 인정 안 하시겠지만) 나름 시적 완성도도 있다는 의견이 꽤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둘을 비교함은 적절치 않습니다. 

되려 마광수 건이 비교하기 맞다 싶네요. 

마광수도 완성도는 어찌됐든 의도가 사악하진 않았지요. 


*** 

이미 아시리라 믿지만, 메피스토님의 예술관에는 불만이 없습니다. 

문제가 된다고도 생각 안 합니다. "잔인해서 싫어." 가 심각한 의견은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문제 삼는 부분은 예술관이나 작품의 호불호가 아닙니다. 


저는 일관되게 대중들의 격한 반응을 지적해 왔습니다.

특히 네이버 리플들은 꽤나 인상적인 리플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기사가 너무 많아져서 찾아지지 않는군요. 

그것들을 보관하지 않은 게 통탄스럽네요.  

어쨌든 이른바 "리플로 죽이려고 드는" 그런 내용들이었습니다. 

단지 설익은 비평이 오간 정도였다면 출판사가 폐기 결정을 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장도리 이순찬 화백도 만평을 냈습니다.   

http://news.khan.co.kr/kh_cartoon/khan_index.html?code=361102&artid=201505102123162


하지만 메피스토님의 주장은 이러한 폭력적 상황을 옹호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대중들의 격렬한 반응" 정도가 아닙니다. 

저는 불관용이 일상화된 대한민국의 정치적 징후라고 환기해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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