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23 11:43
왜 시를 좋아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시간 대 성능비가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멋지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묻지 않더군요. ^^)
하늘이 파란 토요일 오전에
인터넷을 뒤적여 찾은 동시 몇 편 올려봅니다.
겨울
윤동주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래미
달랑달랑
얼어요.
** 다래미 - '달려있는 것' 정도의 의미인 듯
바람
정지용
바람.
바람.
바람.
늬는 내 귀가 좋으냐?
늬는 내 코가 좋으냐?
늬는 내 손이 좋으냐?
내사 왼통 빨개졌네.
내사 아므치도 않다.
호. 호. 칩어라. 구보로!
** 칩어라 - '추워라'의 사투리
** 구보 - 뛰어달려감
새싹
강현호
'새봄' 산부인과 앞
태어난 예쁜
새싹 아기 보려고
해님 이모
빗방울 고모
바람 삼촌
두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서 있네.
나무들의 약속
김명수
숲 속 나무들의 봄날 약속은
다 같이 초록 잎을 피워 내는 것
숲 속 나무들의 여름 약속은
다 같이 우쭐우쭐 키가 크는 것
숲 속 나무들의 가을 약속은
다 같이 곱게 곱게 단풍 드는 것
숲 속 나무들의 겨울 약속은
다 같이 눈보라를 견뎌 내는 것
엄마의 배웅
유희윤
고장 난 냉장고
안과 밖을 깨끗이 닦은 엄마
마른 행주질 하시곤 문짝에 뽀뽀했다
다둑다둑 등판 두드려 주며
혼자 말했다
- 어느새
15년이나 되었구나
그 동안 애썼다
정말 수고 많았다
새 냉장고 타고 온 트럭에
고장 난 냉장고 태워 보낸 엄마
한참 동안
대문 밖에 서 계셨다
세탁기
김현서
세탁기가 돌아간다
코피 묻은 내 옷도 돌아간다
친구의 얼굴도 돌아간다
화가 난 내 마음도 돌아간다
세탁기는 돌면서
꽁꽁 뭉쳐 있던 멍든 내 마음을
비틀었다가 풀어버리고
비틀었다가 풀어버린다
울컥울컥 검은 물이 쏟아진다
먹구름 속에서
해님이 나온다
눈부신 햇살 받으며 옷을 넌다
활활 털어 빨랫줄에 넌다
어느새 말끔해진 내 마음도 넌다
친구를 찾아가는 내 마음
먼저 사과하고 싶은 내 마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집게로 꼭 집어 넌다
배추벌레
김륭
배추벌레가 배춧잎을 갉아먹고 있어요
배추 뽀얀 엉덩이를 얼마나 힘들게 기어올랐는지 몰라요
수없이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는 또 얼마나 찧었는지
온몸에 멍이 들어 푸르뎅뎅한
배추벌레에게 배춧잎은 밥이 아닐지 몰라요
미장원에 파마하러 온 동네아줌마들처럼
배추밭에 줄지어 앉은 배추에게
볏짚으로 머리띠 묶어주는
우리 엄마 몰래
날개 만들어놓고 죽은 듯 숨을 고르는
배추벌레 한 마리
마침내 배춧잎 사이로 하늘이
뻥 뚫리고요 팔랑팔랑
배추흰나비 한 마리 날아오르네요
2016.01.23 11:49
2016.01.23 12:00
그렇죠?? ^^ 윤동주 시인은 동시에 놀라운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호주머니
윤동주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2016.01.23 13:03
엄마 아버지 시 둘 빼고 다 방정환 잡지 어린이가 있던 시기의 작품입니다.(30년대)
방정환은 잡지에 쓸 사람이 별로 없어 자기가 쓰고 지은이 이름을 다 다르게 해
알려진 것만 이름이 39개라고 하네요.
어린이에 실린 당선작 오빠생각은 당시 12살 소녀가 쓴건데
다음해 당선작 고향의 봄의 네살 많은 이원수 시인과 부부가 되었어요.
귀뚜라미 소리 - 방 정 환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님도 추워서 파랗습니다
울 밑에 과꽃이 네 밤만 자면
눈 오는 겨울이 찾아온다고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밤에 오동잎이 떨어집니다
구슬비 - 권 오 순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고이고이 오색실에 꿰어서
달빛 새는 창문가에 두라고
포슬포슬 구슬비는 종일
예쁜 구슬 맺히면서 솔솔솔
초록바다 - 박 경 종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초록빛 여울물에 두 발을 담그면
물결이 살랑 어루만져요.
우리 순이 손처럼 간지럼 줘요.
담요 한 장 속에 - 권 영 상
담요 한 장 속에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꿈쩍이며 뒤척이신다.
혼자 잠드는 게 미안해
나도 꼼지락 돌아눕는다.
밤이 깊어 가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내 발을 덮어주시고
다시 조용히 누우신다.
그냥 누워 있는 게 뭣해
나는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 ― 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 순간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
― 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그냥 - 문 삼 석
엄만
내가 왜 좋아?
-그냥….
넌 왜
엄마가 좋아?
-그냥….
따오기 - 한 정 동
보일듯이 보일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 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돋는 나라
잡힐듯이 잡힐듯이 잡히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 메이뇨
내 아버지 가신 나라 달돋는 나라
오빠 생각 - 최 순 애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귓들 귓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1925)
2016.01.23 13:32
어렸을 때 배웠던 동요들은 대부분 동시로 만들어졌나 봐요.
가끔영화 님께는 이 시를 드리고 싶군요. ^^
만돌이
윤동주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봇대 있는 데서
돌재기 다섯 개를 주웠습니다.
전봇대를 겨누고
돌 첫 개를 뿌렸습니다.
――딱――
두 개째 뿌렸습니다.
――아뿔싸――
세 개째 뿌렸습니다.
――딱――
네 개째 뿌렸습니다.
――아뿔싸――
다섯 개째 뿌렸습니다.
――딱――
다섯 개에 세 개......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봐도
허양 육십 점이다.
볼 거 있나 공 차러 가자.
그 이튿날 만돌이는
꼼짝 못하고 선생님한테
흰 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십 점을 맞았을까요.
2016.01.23 13:52
2016.01.23 14:06
그래서 동시가 좋아요. ^^
제가 읽은 가장 짧은 시 한 편~
할아버지
윤동주
왜떡이 씁은데도
자꾸 달다고 하오.
2016.01.23 19:05
저녁 먹고 나니 배부르고 기분 좋아서 동시 몇 편 더 ^^
소
윤석중
아무리 배가 고파도
느릿느릿 먹는 소.
비가 쏟아질 때도
느릿느릿 걷는 소.
기쁜 일이 있어도
한참 있다 웃는 소.
슬픈 일이 있어도
한참 있다 우는 소.
밥풀 묻었다
이무완
호박꽃 속 뽈뽈뽈 기어들어가
냠냠 맛있게 혼자 밥 먹고도
시침 뚝 떼고 나온
호박벌아!
입가에 밥풀 노랗게 묻었다.
엉덩이에 밥풀 덕지덕지 붙었다.
살구꽃 향기
유금옥
민지는 신체장애 3급입니다
순희는 지적장애 2급입니다
우리 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정상입니다
민지가 바지에 똥을 싸면
순희가 얼른, 화장실로 데려가
똥 덩어리를 치우고 닦아 줍니다
다른 친구들이 코를 막고
교실에서 킥킥 웃을 때
순희가 민지를 업고
가늘고 긴- 복도를 걸어올 때
유리창 밖 살구나무가
얼른, 꽃향기를 뿌려줍니다
살구나무도 신체장애 1급입니다
따뜻한 햇볕과 바람이 달려와
꽃 피우는 걸 도와주었습니다
2016.01.23 19:29
못내 아쉽고 그립습니다.
2016.01.23 19:49
가끔영화 님께 그리움에 관한 시 두 편 ^^
호수1
정지용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유리창1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2016.01.23 22:23
2016.01.23 23:15
유리창에 하얀 입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모습을
새가 날갯짓을 하고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오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니 시인들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
밤이고 하니 채찬 님께는 뭔가 고뇌를 담은 듯한 시 한 편 ^^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2016.01.25 15:33
감사합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던 사람을 마루타로 비명횡사 시키다니.. ㅜ ㅜ
정신적 괴로움에 시달리다 육체적 괴로움까지 시달리시다니...ㅜ ㅜ
저도 헬조선의 상황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괴롭습니다. 제 상황이 헬이 되면 정신의 한쪽은 조금 편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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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어린이는 나중에 크게 될 것 같아요.
잘 자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