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dust님께 드리는 글

2016.08.03 03:51

겨자 조회 수:2921

starbust님이 쓰신 글 보고, "네"라고 답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정리된 글은 드리지 못하겠지만, 제가 주변에서 보고 겪고 생각한 일들을 말씀드리고 현실적인 말씀을 드릴께요. 

한국은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니까 딸은 북유럽 등지로 보내야겠다, 라고 단칼에 말하지 마시고

현실적으로 자식의 특성과 전공과 해외 보낼 타이밍을 고려하셔서 costs-benefits를 찬찬히 생각해보셔야하지 않나 싶어요.

물론 이건 자식을 해외로 보낼 수 있는 옵션이 있는 유복한 부모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려야겠지요.


일단 양성평등 문제에 있어서 한국보다는 미국이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 대학교 마치고 덴마크, 스웨덴으로 보냈다고 쳐요. 그러면 내 딸은 덴마크,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이 되는 겁니다. 여성이란 조건에서는 상대적으로 벗어날지 몰라도 이방인이라는 조건에 다시 걸리게 되요.

그러면 내 딸은 내가 이 사회에 속하는가? 를 질문하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내 자리를 찾을 수 있는지 (fit in) 그런 걸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특히 덴마크, 스웨덴은 예전에는 약간 아시아계를 받아들였는데 요즘은 문호를 닫고 있다고 합니다)


- 자아가 형성되는 초등, 중등, 고등학교 시절에 미국이나 유럽에 보낸다고 칩시다. 

자아가 형성되는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어디서 보냈는가에 따라서 자아 정체성이 많이 결정됩니다. 일생동안 "나는 여기가 내 문화의 거점이다"라는 생각을 주는 원류를 그때 만들어요. 

그때 읽은 책, 그때 본 티비 프로 (요즘 같으면 유튜브), 그걸 같이 공유하는 친구들이 자기를 만듭니다. (이때 그 나라에서만 통하는 책 말고, 동서양 다에서 통하는 책이나 고전을 많이 읽어놓으면 나중에 정체성이 글로벌해지기 훨씬 쉬워집니다.)

그런데 이 정체성은 인종, 피부색하고 완전히 동떨어질 수가 없어요. 딸이든 아들이든 서양식으로 초중고등학교 교육받고 나서, 본인은 한국계라고 세계 사람들이 본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는 게 쉬운 노릇이 아닙니다. 

그러면 두가지 정체성을 발란스 맞추는 작업을 해야합니다. 

다시 말해 한국 문화도 잘 알고, 자기가 교육받은 서구나라의 문화도 잘 알고, 두 문화에 다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두 문화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멀리하고, 나는 그래서 어떤 사람이다 라는 것을 선언할 수 있는 정도지요.

그러려면 양국 언어를 다 잘 해야하는데, 그게 쉬운 노릇이 아닙니다. 

이거 잘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어요. 여자들 중에서 이거 잘하는 사람 꽤 봤고, 남자들 중에서 교육 많이 받은 혼혈들이 이런 정체성 발란스를 잘 찾는 사례를 봤습니다. 

예를 들어 인도 남자인데 영국인 엄마가 있고, 영국식으로 자랐지만 인도 문화도 잘 아는 그런 사람이요. 

정체성 발란스 맞추는 비용은 자식과 부모가 같이 치르게 됩니다. 

 

- 만일 stardust님 딸이 '공부 잘하는 딸'이 된다면 한국에서도 살아남을 길은 있다고 봅니다. 바늘끝 같은 좁은 길이지만요. 댓글 다신 분들 말처럼 공무원,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으로 나가게 하고, 살림은 되도록 아웃소싱하고, 손주가 생기면 조부모가 전적으로 육아도움 줘서 30-40대 육아 단절 없게 하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공무원은 육아휴직이 있지요. 이 경우에도 석사 정도를 해외에서 해서 딸의 눈을 틔워주는 건 좋은 선택이지 싶습니다. 딸이 공부를 잘하는데 엔지니어라면...이 경우 저는 석사 루트를 통해서 미국 보내라고 말하고 싶네요. 딸이 취할 수 있는 옵션이 더 커질 거예요. 한국에서 사는 게 그렇게 나쁜 옵션이 아니예요. 자기랑 초중고대학교 같이 다닌 친구들과 친척들과 가족들과 부모님과 커뮤니티 이뤄서 산다는 게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네트워크 관리 면에서나 상당히 편한 일입니다. 다른 나라 가면 인적 네트워크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해요. 


- 만일 stardust 님 딸이 '창의력 있는 딸'이라면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창의력은 하연수씨 사건처럼 "둥글게 말하라" "싸가지 없다"라면서 사람의 모를 깎아내는 문화에선 억눌리게 되요. 아들을 둬도 그건 마찬가지가 아니냐 하실 분들 있겠지만, 딸의 경우는 이런 문화적 억압을 더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 제 생각에는 창의력이 피어나기 힘들어요. 특히 미술쪽은 더 그렇지 싶다는 게 제 생각이예요 (이 생각에 큰 근거는 없습니다. 음악의 경우는 일정 단계까지는 한국식으로 훈련시켜도 충분히 성과가 나오고 있고, 문학의 경우는 그 나라 정서나 언어, 사회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교육시키는 게 과연 크게 도움될까 싶어서입니다). 딸이 미술이나 패션에 재능있는 경우 저는 해외로 보내라고 권해주고 싶습니다. (물론 어떤 작품은 억압된 환경에서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것 말이예요. 그런데 억압적인 환경에서 꺾이지 않고, 창의력의 불씨를 잃지 말아야 작품을 피워보고 말고 하지요. 많은 경우 성장 중간에서 환경적 검열에 의해 창의성이 꺾이고 오리지널리티가 잘려나가버리거든요. 이게 제가 가장 두렵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쓰다보니까 어찌 됐든 한 번은 선진국에 보내라, 라는 말이 되어버리는데요. 딸이 매버릭이고 창의성 있으면 적극적으로, 딸이 체제순응적이고 공부를 잘한다면 석사 때, 이렇게 요약되네요. 


- 제 친구 딸이 한국에 있는데요. 어떤 분야에 창의력이 있는 편입니다. 성격도 강하고 대학을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부모가 재력이 있고 생각이 유연해서 자기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라고 합니다. 친구가 이 딸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길래 제가 "미국 보내라"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이런 재능은 한국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딸이 미국에 가기를 거부했어요. 왜냐하면 이 딸의 정체성은 도시 소녀예요. 리버럴한 부모 아래에서 자유롭게 큰, 일본문화를 흠뻑 맛보고 자란, 도시 친구들을 둔 그런 소녀입니다.  이런 소녀를 미국에 데려와서 뉴욕을 보고 LA를 보고 시카고를 보고 보스톤을 보여줘봤자 시큰둥합니다. 그동안 서울은 그런 도시들보다 더 화려해졌어요. 이 딸은 오히려 일본에서 유학하고 싶어하죠. 이런 소녀에게는 사실 일본이나 홍콩, 중국의 대도시를 보여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정체성이 서울식, 한국식, 아시안식으로 바탕잡혀 있어요. 아시아인들이 공통적으로 보는 텍스트 (그게 장자 노자가 되었든 드래곤 볼이 되었든)에 더 익숙합니다. 본인의 창의력이 한국사회에서 깎여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직 못하는 단계구요. 또한 몇몇 아시아 국가들의 부상은 하나의 글로벌 트렌드로 보기 때문에 몇몇 아시아 국가의 대도시에서 잠깐 교육시키는 건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봅니다. 


- 만일 딸을 한국에서 기른다면, 서울에서 기르실 것을 권합니다. 이 부분은 따로 떼어서 써도 될 만큼 긴 이야기인데요. 서울하고 한국 전반은 또 다릅니다. 서방국가로 보낼 경우에도 되도록 도시로 보내시고, 아시아에서 뜨는 주요 국가로 보낸다손 치더라도 도시로 보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만 몇몇 도시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 한국의 양성평등은 후진하진 않고 있고 더 나아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취업할 때만 해도 여자는 임신하면 퇴직한다는 각서 받고 입사하는 경우도 있었고, 제 윗세대의 경우는 결혼하든 안하든 스물일곱이면 퇴직한다는 것을 통보받고 취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직 따님이 어리니까 해외에 보낸다고 꼭 맘 먹지 않아도 되지 싶어요. 딸이 자라는 동안 한국사회가 그동안 많이 더 좋아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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