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모 본인은 아마 절대 자기가 꼴찌는 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던 듯합니다.

비록 마지막으로 히트곡 낸 게 십년이 훨씬 지난 철지난 가수라지만 본인은 그걸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을 테고, 인지도 면에서 7명 중에 본인이 최고라 굳게 믿고 있었을 테지요.

그 정도 자아도취는 충분히 갖고도 남을 캐릭터입니다. 실력적인 면으로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믿고 있었겠지요.

오히려 경쟁가수들을 본인보다 한 급수 정도는 낮게 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과 한 무대에 서는 건 어찌보면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최고참이자, 유일한 국민가수 레벨(?)이니까요. 최소한 신승훈, 나훈아, 조용필급과 맞먹어야 되는데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하는 자괴감이 들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예전만 못한 본인의 가수입지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겁니다. 더이상 공중파 방송이라는 데가 본인이 맘먹는다고 제집 드나들듯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테죠.

그에게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한 기회였겠죠. '형이 왕년에 어마어마 했거든'하는 자기과시도 할 수 있겠고요.

그래서 그는 기꺼이 자신보다 한 레벨 낮은(?) 가수들과 같은 무대에 서기로 결심한 겁니다.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김건모는 과연 어떤 컨셉을 잡았을까요. 최선을 다해서 자기 실력을 보여주는 것? 아니죠. 그는 그 이상을 노렸을 겁니다.

김건모라는 가수는 꽤 영악한 사람입니다. 무릎팍같은 프로에 나가서도 자신의 내면을 까놓고 보여주지는 않죠. 오히려 동문서답식으로 강호동 애간장을 태우는 전략으로 일관하죠.

이소라, 박정현처럼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벌벌 떨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부르지만 김건모는 단 한번도 긴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철저히 힘 빼고 즐기는 태도로 나갑니다. 중간평가때는 일부러 노래 중에 틀리기도 하고요. (일부러 틀린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성의없어 보인 건 부인할 수 없죠)

"형은 니들과 다르거든"하는 심리가 기저에 깔려있었을 겁니다.

립스틱 퍼포먼스도 아마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었겠죠. 최선을 다하자니 후배들과 동급이 되는 것 같아서 x팔리고, 그렇지만 실력은 제대로 보여줘야 되겠고...

 

그런데.. 그러한 김건모가 꼴찌를 합니다. 꼴지발표를 하는 순간 김건모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한동안 석고상처럼 굳어있었습니다. 그건 진짜 충격받은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꼴찌를 예상했었다면 어떤 액션을 취할지 무의식적으로나마 준비를 했겠죠. 하지만 그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는 아무런 태도를 취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있는데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는 식으로 멘트를 하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농담도 만들어내고 그러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식으로 김건모 퇴장이라는 수순을 밟을 분위기였고, 김건모 또한 어느정도 마음을 정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피디가 재도전이라는 화두를 꺼낸겁니다. 김건모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겠죠. 그 누구라도 그 입장에서 갑자기 예스라는 대답을 꺼낼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노'라고 말하기도 뭣한 분위기였죠. 이미 무대는 초상집 저리가라인데-_- 일단 최선의 방법은 생각할 시간을 버는 거였겠죠.

그렇게 그는 대기실로 돌아옵니다.

거기서부터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과연 내가 재도전을 하는 것이 옳은 걸까, 어떡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그런데 방송분을 보면 아마 김건모는 대기실에서 자진사퇴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걸로 보입니다. "내가 재도전을 하는 건 룰을 어기는 것"이라는 발언을 할 정도면 이미 현 사태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판단이 듭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그는 자진사퇴할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무대로 돌아와서는 결심을 번복한 것일까요?

사람은 혼자 있을 때는 이성적이면서 이상적인 판단을 합니다. 하지만 그 결심이 현장에서는 쉽게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고시생이 집에서 "나는 공부 열심히 할거야"라고 다짐했다가도 다음날 학원에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바쁘죠. 지하철에서 독서하기로 다짐해놓고 막상 지하철을 타면 꾸벅꾸벅 졸기 바쁩니다. 결심이라는 건 즉석에서 바뀌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김건모의 진짜 욕망은 서바이벌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것입니다. 이미 피디가 룰을 바꾸면서까지 재도전을 부추기고 있고, 동료가수들은 눈물을 흘리며 본인을 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마음에 걸렸을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입 가수'까지 흔쾌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이건 뭐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에 밥 한숟갈 듬뿍 떠서 본인 입으로 들이대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죠.

더군다나 김건모는 이재에 밝은 사람입니다. 예전 토크쇼에서 표인봉의 증언에 의하면, 서울예대 시절 동아리에서 한 선배가 공연수익을 모아 공동으로 어딘가에 사용하려고 하니까 그 당시 까마득한 막내후배였던 김건모가 자기 몫은 따로 떼어달라고 땡깡을 부렸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답니다.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죠. 또한 가요순위 프로에서 1위 자리를 놓고 문차일드와 신경전을 벌였다는 아주 유명한 일화, 3집앨범이 빅히트치고 난 후 갑작스럽게 프로듀서 김창환을 버리고 떠났던 일(김창환은 한동안 김건모 얘기만 나오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죠), 이런 과거 행적으로 볼 때 김건모라는 인간이 어떤 이상향적이고 명예적인 것보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겠죠.

김건모를 변호하기 위한 건 아니지만 다만 그의 행동과 판단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애초에 피디가 재도전이라는 떡밥을 던지지 말았어야 했죠. 피디가 재도전을 천명한 이상 그 룰은 바뀐 것이고, 김건모는 그 룰을 벗어나지 않은채 그 안에서 결정을 한 것이 되는 겁니다. 결론은 피디만 나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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