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3 22:18
구입한 지 십년 된 컴퓨터를 버리기로 했어요. 무언가를 모으는 취미는 없는데, 일단 품에 들이면 끌어 안고 사는 성미 때문에 여즉 데리고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켰을 때가 언제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벌써 삼 년 전이에요. 무려 싱글 코어에 램은 512램. 이제 우리 그만, 서로 보내 줄 때가 된 거죠. 저는 애니미즘을 믿어요. 책, 전화기, 하다 못 해 손톱깍기도 듣는 귀가 있다고 생각해요. 멀쩡한 전화기도 "에이 고물!" 하고 하대하면 고장이 나고, 잘 잘리던 손톱깍기도 함부로 굴리면 이빨이 나가더라고요. 괴이하지만 버리기 전에는 작별 인사도 해요. 잘 가시게, 그동안 수고하셨네.
이 컴퓨터는 십만원이 넘는 물건 중, 제가 벌어서 구입한 최초의 것이에요. 각고의 노력 끝에 모은 대양 70만원을 오만방자한 업자가 침을 뭍혀가며 세는데, 그만 울컥 화까지 나더라니까요? 후에 등록금 때문에 그 곱절의 곱절은 되는 돈도 넘겨 주어야 했지만, 그때만큼 섭섭하고 허탈한 적은 없었어요. 확실히 물성이 가진 아우라는 무시무시해요. 아무튼, 대양 70만원과 맞 바꿔 소중히 들고 온 이 친구로 3D 게임도 처음 해봤고, 영화도, MP3 구입도 했어요. 아! 야동도 처음 봤어요. 제가 일신의 쾌락을 위해 저질렀던 행각들은 이 친구가 다 알고 있는 셈이죠.
하드에 뭐라도 들었을까 싶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전원을 눌렀어요. 안 켜지더라고요. 삼십 분을 씨름한 끝에 부팅에 성공. 오오! 윈도우 XP 로고가 보이고 부팅 지렁이가 기어갑니다. 그리고 곧 저를 반기는 블루 스크린. 정말 오랜만에 중얼거렸어요. "게이츠 이 자식이" 부단한 노력 끝에 어쨌든 부팅에 성공.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포도밭이 펼쳐집니다. 너 반갑다, 한글 2004. 너도 있었지, 윈엠프. 지지리 궁상을 떨며 열어 본 하드 드라이브에는 의외로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어요. 여기저기서 다운 받은 이미지들, MP3 파일들, 폴더 가득한 과제용 리포드들, 익스플로어에 북마크 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웹페이지들. 그리고 그녀의 사진들까지. 나는 다 잊고 살았는데, 잊으려고 고개 돌리고 살았는데, 너는 다 가지고 있었구나... 뭉클한 마음에 가볍게 콩 하고 두들겨 주었죠. 녀석, 블루 스크린으로 대답하더군요.
영화 파일들도 제법 많이 들어 있었어요. 당연하다는 듯 불법으로 다운 받은 영화들. 시월애, 베를린 천사의 시, 블랙 호크 다운... 그리고 러브 어페어. 설마 영화 한 편이 끝나기 전에 다운 되지는 않겠지? 안 그래 영감? 또 퍼렇게 질린 얼굴로 대답할까 무서워서 이번에는 말만 걸고 러브 어페어를 플레이 했어요. (지금도 늙지는 않았지만) 지금 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저는 아네트 베닝만 보고 즐거워 했죠. 그녀의 미소, 우아한 몸짓과 표정. 그런데 이번엔 캐서린 햅번의 연기가 눈에 들어 오더라고요. 전원의 가정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늙은 캐서린 햅번,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네트와 워랜 비티. 불현듯 괘종시계 종이 울리자 햅번이 말 해요 five o'clock? you must go. ... (may I?) thank you. thank you ..... well, off you go.
올 늦 겨울에, 이별 했어요. 저 컴퓨터 만큼이나 오래 만나 온 아가씨랑.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 해 놓고, 단 하루도 그녀의 생각을 놓은 일이 없었어요. 지나는 버스에 그녀가 앉아 있고, 거리에는 온통 그녀를 닮은 사람들이 가득했죠. 물컵을 봐도, 달님을 봐도 그녀가 있었어요. 이를 닦다 문득 바라 본 거울 속 제 눈동자 속에도 그녀가 비춰요. 그런데 헤어지자고 말 한 건 저에요. 저는 가난하고, 비겁하고, 그리고 단 하나의 진실. 언제부턴가 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아요.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어요. 만일 그녀가 지금 저에게 걸어와, "다시 만나자" 라고 말 한다면 저는 거절할 거에요. 너랑 헤어지고 나는 정말로 많이 편했다고, 소화도 잘 되고, 잠도 잘 자고, 잘 지낸다고. 그렇게 말 할 거에요. 그럴 일 없겠지만.
이 곳은 그녀가 절대 들여다 보지 않을 공간이에요. 그녀는 듀게 같은 커뮤니티를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등업한지도 얼마 안 되었고, 영화나 문화 글이 많은 이 곳에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써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이번에도 이렇게 비겁하네요. 비겁한 저는 그녀가 믿는 신에게 기도 드려요. 정말로 좋은, 기왕이면 돈도 많은 남자 만나서 잘 지내게 해 달라고. 밥 먹을 때 가격 생각 안 하고, 가방 선물 같은 거도 받으면서 예쁨 받으며 살게 해 달라고. 서른 넘도록 놓아주지 않은 그 죄값 치르겠다고.
며칠 미적미적 하다가 방금 컴퓨터에서 하드 드라이브를 떼어 냈어요. 잘 버려야죠. 우리는 모두, 어쩌면 이별 하려고 만나는 것 같아요.
+
징징대는 글은 이게 마지막이 될 거에요. 너무 눈살 찌푸리지 마세요.
저 진짜 많이 소심해요.
2015.10.13 22:51
2015.10.14 11:32
2015.10.14 20:07
다시 돌아간다해도 그자리에서 다시 만나는군요 찬성입니다.
얼른 보고 담배 피며 부르는줄.
2015.10.13 23:24
2015.10.14 11:36
구글 포토 서비스도 생겼지만, 작년부터 중요한 사진은 인화해 놓기 시작했어요. 엘범으로 만들어 놓고 손으로 넘기며 보면 그게 또 그렇게 찡 하더라고요.
2015.10.13 23:37
저희 어머니는 로봇청소기한테 '돌돌이'라는 이름도 붙여주고 대화도 하세요. "돌돌아, 그리 가지 말구 일루 와."
<중경삼림>에서 양조위는 비누와도 대화하지 않았던가요?? 애니미즘은 죽지 않았습니다. ^^
2015.10.14 11:50
돌돌이에게 완벽에 가까운 AI가 탑재 된다면, 녀석에게 침대 밑은 던젼일 거에요. 개를 찾아 소총에 마운트 된 전등을 손으로 가려가며 건물 안으로 들어 간 네빌 박사처럼
2015.10.14 07:45
글이 참 좋네요. 듀게에는 참 필력 좋으신 분들이 많아서 좋아요.
2015.10.14 11:51
아래에 청승맞은 얘기는 뺄 걸 그랬어요. 앞으론 지저분하게 웃겨 드릴게요
2015.10.14 09:07
'사랑한다' 하나로 이해되는 것들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미안하다'... 여러가지로 표현되고 그게 또 그대로 맘에 와닿는 게 예술의 묘미인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것도 예술의 한 장르이죠. 예술가만 예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2015.10.14 11:51
여기서 예술은 "예, 술을 마십니다." 의 약자.... (죄송합니다.)
2015.10.14 09:23
점점 가지기보다 떠나보내는데에 방점을 찍고 살아야지 싶습니다만..
주변의 것?들은 늘어만 갑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2015.10.14 11:56
한 살, 또 한 살. 나이 들면서 집에 들인 것들 중에는 가지고 싶어서 산 것들 보다는, 있어야 겠기에 산 것들이 더 많아요.
먼 친척 분 중에 가진 거라곤 승합차 한 대뿐인 분이 계셨어요. "나한테는 이게 대한민국" 이라며 차를 두들기셨고,
어른들은 그 분을 욕하기 바빴죠. 그런데 그 대한민국 안에도 프라이팬, 버너에 심지어 짝퉁 고흐 그림까지 있었죠.
어려운 일이에요. 그쵸?
2015.10.14 19:02
<마션> 영화를 보면서, 만든 이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후반부에는 질질 짜면서 봤는데
그게 뭐 화성 탈출의 감격이나 동료들의 우호와 협조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니라,
어떤 한 장면 때문이었어요. 마지막에 타고 나갈 물체(?)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지붕 떼고, 장비 빼고, (은유가 아니라 정말) 뻥 뚫린 채로 우주 공간에 자기를 날려 확 날아 오르는데,
'생존'을 위한 것은 정말 딱 요만큼이구나.. 근데 난 왜 이렇게 주렁주렁 .. 물질과 허영을 주렁주렁 ..
뭘 위해서, 뭘 두려워 하며 이렇게 ... 하는 느낌 때문에 마구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
2015.10.14 23:24
물건도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결국 나도 누군가의 곁에 갔다 떠나가게되죠. 그런 만남과 떠남의 연속이 사는건가 생각되기도 해요. 소중하게 갖고있던 물건이 고장이나면 새로 사야한다는 물질적 계산보다 정들고 익숙한 그 무엇이 없어졌다는 아쉬움 허전함도 크죠. 근데 또 야속한 이마음은 결국 또 흐려지고 그 자리의 무언가와 새로운 정을 쌓아가게되구요.
로치님도 행복하시길 바라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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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어 사람도 같이 살았던 모든 것들 다 떠나보내면 애뜻함도 옅어져 그냥 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