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날이 푹해져 온 세상에 커플들이 버섯처럼 만발하게 피어나면

늙고 외로운 중년은 딱히 찍을 거리도 없으면서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 매고는 합니다.

노년의 정붙이기란 개로 시작하여 화초를 지나 결국 수석으로 수렴하기 마련이라 했던가요?

그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선행학습이라도 하듯, 한때 열병처럼 앓았던 장비병도 다 지나가고

이제는 크롭 바디에 40mm 하나 물려서 고독의 소실점을 향해 표표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며칠 전 독립을 선언한 사촌 누이 격려 차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단백질 공급을 제1의 국시로 하여 남의 살을 뜯는 자리란 새로운 출발을 축하함에 부족치 않았으나

뭔가 기념이 될만한 선물을 고민하다 물었습니다. "카메라 하나 사줄까?"

저희 세대의 젊은 날에는 오직 세 가지만 있다면 천하를 다 가진 듯 기쁠거라 두근거렸으니까요.

플레이스테이션, 바이오 노트북, 그리고 니콘 필름 카메라


그러나, 누이는 그게 뭐야? 하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며 충격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요즘 누가 카메라로 사진 찍어?"

충격이었습니다. 뭐라고? 카메라로 사진을 안 찍어? 

지난 누구네 결혼식 때 처자들이 짐벌이 달린 셀카봉으로 동영상을 찍는 걸 봤을 때 보다 더.

이미 폰카의 성능이 컴팩트 디카의 성능을 뛰어넘은 지 오래라 납득이 아니 가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요즘 누가 카메라로 사진 찍어?" 라는 말에 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진으로 밥 먹는 친구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이미 미국의 패션 계에선 4K로 돌아가는 카메라를 좌좌좍 설치해 놓고 동영상을 돌린 채

모델들이 디렉터의 지시에 따라 연기를 하면, 오퍼레이터 격의 편집자와 디렉터가 

마치 캡쳐를 하듯이 사진을 뽑아내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형 인쇄 용으로는 아직 부족하지만, 8K가 보편화 되면 문제가 달라지겠지요.


취미 영역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이제 사진은 점점 저처럼 수염 난 중년들의 그야말로 취미가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비루해진 육신을 이끌고 카메라 하나 벗삼아 베낭에 초코파이 챙겨 넣은 채 

필름 사진가들이, 디지털은 사진이 아니라고 분개하며 앞서 걸어갔던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지요.


+


들은 이야긴데, 요즘 고가의 렌즈를 가장 많이 구입하는 이들은 수연 난 장비병 환자들이 아닌

아이돌 팬들이라고 합니다.

천 만원을 호가하는 대포들을 그냥 막 지르신다고..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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