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연인들을 위하여

2019.04.06 10:23

어디로갈까 조회 수:905

이틀 전의 숙취가 다 해소되지 않아서 거의 굶고 있다가 근처 빌딩의 조개탕집에 갔습니다. 식당은 한 사람의 손님도 없이 텅 비어 있었어요. 주변 노동자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식당이고, 오후 네시 경이라 점심/저녁 손님이 없을 시간이었으니까요.

밥을 주문해서 떠넣어 보려던 참인데, 문을 열고 젊은 남녀가 들어왔습니다. 다음 시즌을 위해 공개된 아이돌 뮤비 티저를 보는 듯 어딘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커플이었어요. 아마 옷차림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여자는 꽃들이 만개한 샬랄라 여름용 원피스 차림이었고, 남자는 닭벼슬 머리에다 삼색 잉어가 프린트된 반짝이 점퍼를 입고 있었습니다. 밥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어떤 격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무데나 밀고 들어온 듯한 기색을 언뜻 느꼈죠.

식당이 워낙 조용했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제 귓속을 파고 들었습니다. 어조나 단어들이 심상치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할 것들을 점검하느라 사실 그들에게 보낼 신경의 여유는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우는 듯한 좀 앙칼진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게 아니겠어요.
"아직 모자라!"
음식의 양이 모자란 건가 싶었는데, 뒤이은 말의 연결이 이상했습니다.
"애원해 봐!"

슬쩍 그쪽 테이블을 쳐다봤더니, 그 식탁엔 아직 주문 전이라 음식이 없었고, 남자는 아무 대꾸 없이 심드렁한 표정이었습니다. 문득 남자가 제 시선을 느끼곤 신경이 쓰인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어, 내가 쳐다보고 말았군요~' 미안해 하며, 다시 조개탕을 휘적거렸습니다.
"나를 봐." 
다시 여자가 말했어요. 여자의 말투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는데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고요. 뭐랄까... 오만한 듯, 상처 입은 듯, 명령하는 듯, 애원하는 듯, 유혹하는 듯, 하여튼 그토록 복잡하고 미묘한 많은 느낌들이 '나를 봐'라는 짧은 한 문장에 모두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게 저는 신기했습니다.

"난 니가 몰라보게 변했어."
역시 여자의 말이었어요. 관계의 내력이 꽤 긴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여자는 어떻게 변해온 걸까? 아직 냉기가 떠도는 지하 식당에서, 여름달력 같은 차림으로 역시 뮤비 티저 속 같은 남자에게 '나를 보라'고 명령하고 애원하기 이전에 저 여자는 어떠했을까? 이런 제 생각의 흐름을 누군가 봤다면, 관심 끄라며 등짝을 한대 쳤을 테죠.

그 후 여자의 몇 마디 말은 놓치고 말았지만, 그녀가 던진 몇 마디가 기억납니다.
" 가엾다던 여자가 지금 니 앞에 있어!"
그 가엾은 여자란 아마 자신을 가르키는 대명사였을 텐데, 그녀의 말에는 분명히 연극적인 과장이 묻어 있었어요. 자신과 남자의 상황을 아이러니하게 객관화하려는 시도였겠지만, 그녀의 유희적인 비아냥거림에는 분명히 쌍팔년도 신파가 섞여 있었던 겁니다.
그때서야 저는 여자와 남자의 사연이 진정으로 궁금해졌어요. 하지만 더 이상 엿듣거나 바라볼 구실은 없었죠. 식사도 거의 끝났고, 사무실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후. 업무를 마감하고 그 빌딩에 있는 단골 카페에 들렀는데, 뜻밖에도 식당에서 본 그 커플이 그곳에 앉아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들을 다시 보게된 저는 머릿속에 있던 궁금증을 풀 겸, 바로 옆 테이블로 가 앉았습니다. 음악도 없는 곳이라 선명하게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어요.

"그동안 하루도 못잤더니 죽겠어."
(음.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발생한 게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닌 건가? 사나흘쯤?)
그런데 여자의 다음 말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3년 전 네가 날 버렸던 이유란 게 말이야~"
(3년 전? 그럼, 3년 동안이나 잠을 못 잤다고? 며칠만 못 자도 두통에 시달리는 나와는 근본이 다른 초인류의 여성이구나... 에취!)

"네가 날 버린 이유가,..."
(그래, 뭐였을까? 저 반짝이 사내가 샬랄라 원피스 여자를 버린 이유?)

"남의 시선을 의식한 외모 때문이었다는 게 더 역겨웠어."
(아! 반짝이 사내가 외모를 이유로 여자를 차버렸던 거구나. 내 눈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데, 겉모습이 어때서? 여자가 지닌 경박한 분위기 때문에? 경박해 보이기는 당신도 만만찮은데? 번쩍거리는 금시계를 차고 반짝이 점퍼를 입고 스키니 바지로 몸매를 자랑하는 당신도 품위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음)

"다시 그때처럼 말할 수 있어? 나와 있는 게 부끄럽다고."
여전히 여자만 말을 했는데, 순간 처음으로 남자가 반응을 보이더군요. 머리에 얹었던 커다란 선글라스를 내려 두 눈을 가린 후 얼굴을 가로저었습니다. 너를 부끄러워한 게 아니라는 항변이었을까요. 아니, 어쩌면 남자는 단지 모든 게 지겹고 심드렁하다는 포즈를 취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무언의 몸짓에서 그의 감정을 읽어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우스워."
허망하다는 듯 여자가 쓴웃음을 짓더니 곧 이렇게 덧붙였어요. "이번엔 내가 널 버려줄 차례야."
(흠. 이건 꽤 복잡하구나.) 여자가 남자를 버릴 수 있기 위한 조건은 우선 남자가 여자에게 매달려야 하는데, 그러나 남자는 그다지 매달릴 생각이 있어 보이진 않았어요. 물론 확실한 건 아니죠. 여자의 최후통첩에 남자는 단지 번쩍이는 금시계를 슬쩍 바라봤을 뿐입니다.

"니 모든 걸 난 다 알고 있다구.”
여자가 쐐기를 박더군요. (그렇구나. 그래서 남자가 꼼짝을 못하는 거구나.)
하지만 여자가 그렇게 말한 의도는 제압하기 보다는 유혹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갑자기 둘 사이에 끼어들어 심판이랄까, 중재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_-

남자는 그녀의 말에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낀 듯했고 여자가 말을 이었어요.
"왜 그리 놀라니? ...... 말해봐, 사랑한다고."
역시 엿듣는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미묘한 심리적인 얽힘이 있는 감정이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한 방울의 커피까지 다 마신 다음 일어서려는 
순간 여자의 결정적인 마지막 말이 들려왔어요.

"이번엔 내가 다시 널 버려줄 차례야."
조금 전의 "사랑한다고 말해봐"와 다를 게 없는 말이었죠. 
여자가 '다시'라는 부사를 사용한 건 오류인 것 같아요. 다시 버린다면, 전에도 여자가 남자를 버린 적이 있어야 하는데, 여자의 말로 미루어 보면, 그녀쪽에서 남자를 버린 적은 없는 것 같았으니까요. 혹시 남자는 부사를 정확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여자를 싫어했던 게 아닐런지. - -
과연 여자가 그를 버릴지 안 버릴지는 알 수 없는 문제였고,  게다가 남자가 그녀에게 자신을 버릴지의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갖도록 해줄런지도 확실치 않았습니다.

근데 도대체 그게 뭘까요? 버린다든가, 만다든가, 사랑한다든가, 만다든가 하는 것 말이에요. 저보다 십 년은 어려 보이는 남녀가 벌이는 신파연극 같은 장면이 제겐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너무 화려해서 저는 사고 싶은 맘이 없지만, 꽃집을 화사하게 만들어주는 이국적인 어떤 꽃을 한참 들여다본 느낌이랄까요.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제 옆에 와 서더군요. 반짝이 잉어 사내와 샬랄라 긴 머리 여자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꼭 껴안고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던 참이었어요. 순간 '그녀가 승리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웬지 즐거워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도 그런 사실을 확신하는 듯 입가에 귀여운 미소를 띄고 있었어요. 
여자가 뿌린 향수인지 근처 공기에서 기분 좋은 시원한 시프레 향기가 퍼졌습니다. 정말 여자는 그 남자에 관한 것은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순간 왜 읽은 지 이십 년도 넘는 다자이 오사무 소설의 한 문장이 떠올랐을까요. "사랑이란 아름다운 것을 꿈꾸면서 지저분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로망을 꿈꾸며 스스로 허위의 지옥을 넓혀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진지한 연인들에게 축복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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