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의 자살은 2차 가해다

2020.07.14 05:30

Sonny 조회 수:1185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하여 혹은 피하기 위하여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은 일면 타당한 지적이 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다라고 (도피성 선택) 생각하는 이들이야 늘 그 죽음을 조롱하고 있고요.

 복잡한 것은 그냥 복잡한 것으로 인정하면 됩니다.   억지스러운 단순화는 결국 주관적 의지의 소산일 뿐이에요.

 

 고인의 극단적인 선택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서 안희정처럼 버티며 법정공방을 벌였다면 그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2차 피해가 양산되었을거에요.

 총량적인 비교를 하여 어느 것이 더욱 심각한 2차 가해를 만들어냈을지는 모를 일입니다. 쉽게 단정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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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는 광주 5.18 사건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 중반, 송강호는 그대로 광주에서 탈출해 딸에게 줄 신발 생각에 싱글벙글거리다가, 차마 자신만 도망갈 수 없어서 광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광주 시민들에게 실탄사격을 하는 군인들과, 총격에 맞아 쓰러지는 광주 시민들을 봅니다. 이 때 송강호는 울먹이며 그 안으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그는 부상자들을 총탄 속에서 구해냅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꺼이꺼이 웁니다. 영화는 이 비탄의 정서를 이어가며 송강호가 힌츠페터를 싣고 무사히 광주를 탈출하는 장면까지 그려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이 장면부터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총에 맞고 택시운전사가 이들을 구해내는 그런 것까지는 다 좋습니다. 문제는 카메라가 담고 있는 정서입니다. 송강호는 이 영화에서 내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를 내지 않습니다. 시민들에게 사격하는 군인들에게, 그 병사들에게 지시하는 상급자에게, 그 군인 전체에게 지시를 내리는 전두환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길가다가 어떤 작은 사람이 덩치 큰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맞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맞는 사람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만이 아니라,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면서 그 사람에게 항의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폭력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명제가 있기에 그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에는 반드시 누구라도 이들에게 이랬으면 안됐다는 분노가 깔립니다. 그 폭력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는 폭력의 가해자를 향한 분노가 서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야 폭력의 가해자를 중지시킬 수 있고 피해자를 지킬 수 있습니다. <택시운전사>에는 이 분노가 없습니다. "울"은 있는데, "분"은 없습니다. 이 영화는 촛불시위 이후에 나온 영화입니다. 촛불시위는 잘못된 위정자에게 국민 전체가 "분노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정의와 인권을 향한 국민적 정서에서 분노를 제거해놓았습니다. 택시운전사 송강호에게는 광주 시민을 향한 연민과 자기가족을 포함한 자기보신의 정서만이 있습니다. 그게 나쁜 건 아닙니다. 이상하다는 것이죠.


<택시운전사>의 송강호라는 캐릭터가 그렇게 분노를 할 줄 모르고 그저 겁쟁이 소시민이라서 그런 식의 용기를 발휘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세월호 사태 때 배웠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멀리서 보면, 세월호 사건은 일종의 참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책임지지 못한 박근혜 정부와 경찰들, 언론을 향해 분노했습니다. 누군가 억울하게 죽고 다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이 있으며 반드시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택시운전사>는 우리가 이미 학습한 분노, 그리고 발산해야 할 분노를 아예 지워놓았습니다. 어쩌면 영화의 여백을 관객이 채우라는 친절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분노를 하기에도 사치스러울만큼 공포스러운 전시상황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명을 하기에 "연민"과 "슬픔"이라는 감정만큼은 사치가 아니라는 듯이 깔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여러모로 부자연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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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반대편에는 불의가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 인간은 분노합니다. 그 분노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분노가 기저에 깔린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명백백하고, 그 폭력의 진위가 확실한 경우 분노는 자연스레 터져나오는 반응입니다. 이 분노가 없으면 그 어떤 침착도 합리도 통용되지 않습니다. 인간성의 훼손에 대한 인간성은, 분노라는 방식으로 가장 크게 터져나오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없는 정의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릅니다. 분노라는 것은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나의 것처럼 여기는 아픔이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지우고 응분의 벌을 내리려는 복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분노가 없으면? 그것은 완전한 남의 일이 됩니다. 물론 사회적 사건에 대한 공감을 두고 어디까지 진정성을 따져야할지 확실한 경계는 없으나 분노가 없는 해석과 이입은 결국 "우리 일"도 아니고 "남의 일"을 보고 돕는다는 시혜적 태도에 빠지게 됩니다.


박원순의 죽음과 성추행으로 돌아가봅시다. 박원순의 죽음에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성추행 피해자에 이입하여, 박원순을 가해자로 인식하고 그에게 책임을 물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박원순은 죽었습니다. 박원순의 죽음에서 박원순이란 이름과, 박원순의 드라마적 인생을 빼봅시다. 박원순은 더 이상 조사를 받고 범죄자로 몰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사람들은 제가 박원순을 데스노트의 라이토가 계획대로야... 라고 표현한 것처럼 오해하고 싶을 겁니다만, 저는 박원순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박원순이 자살을 결심했을 때 그는 자기 인생의 비통함과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과 살기좋은 서울과 대한민국의 꿈을 여러가지 버무려서 느꼈겠지만, 그는 조사를 받고 범죄자로 추락하는 그 결과가 싫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성범죄 가해자들이 자살하는 거, 그렇게 이상하고 별난 일 아닙니다. 충분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저런 명예파산에 못견뎌합니다. 그래서 자기 명예를 끝끝내 지키기 위해, 살아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자기가 스스로 죽는 게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에, 저런 선택을 합니다. 인질극 하다가 인질 찔러 죽이고 자기도 자살하는 그런 범죄자 너무나 많습니다. 자살에는 두가지 효과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가 자기를 직접 죽이는다는 역설적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고 하나는 자살을 해서 죽음보다 더 한 삶의 형벌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처벌이나 비판이 어려우니까요. 본인이 본인을 제일 불쌍한 위치에 둬서 동정으로 심판을 무마하는 것입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889077

▷ 한수진/사회자: 듣고 보니까, 정말 죄책감을 느꼈다면, 자살이 아니라 자수를 해야하는 것 아닌가. 유가족과 세상에 사죄를 하고 죗값을 받는 길을 택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이런 경우가 과거에도 있었나요?


▶ 표창원 소장/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일 년에 한 두 건 정도는 공개수배된 사람이 자살을 합니다. 지난해 2월에도 지명수배된 청주 여고생 실종사건 용의자가 자살했구요. 2013년 10월에는 300억원 대 청주 지게차 사기사건 용의자가 3개월간의 도피하다가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실패하고 경찰에 찾아오기도 했고요. 그 한 달 전인 9월에는 안동 모텔주인 살인 용의자가 공개수배 2개월 만에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구요, 이런 일이 계속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손정우가 미국 송환이 결정되자 자살했다고 합시다. 그의 죽음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며 애도해야 할 것인지. 그는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피해서 죽은 것입니다. 죽음은 생을 둘러싼 모든 부담과 억압으로부터의 도피입니다. 자살은 낭만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런 이유를 대부분으로 일어납니다. 어떤 이들은 순전히 개인적인 아픔에서 죽음을 택하짐나 그 부담과 억압이 자신의 죄, 박원순의 경우에는 성추행입니다. 박원순은 성추행의 책임을 지는 것에서 도피하려고 죽었습니다. 이 경우 과연 그의 자살은 인간적이고 연민의 대상인지, 곰곰히 생각해봅시다. 박원순은 무엇에서 도망쳤나요? 구체적으로 "성추행을 한 죄", "성추행 가해자로 고소당했을 때의 해명과 책임"에서 도망쳤습니다. 박원순은 성추행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고 사죄를 하는 것에서 도망쳤습니다. 그의 유언장을 다시 보십시오. 이쁘고 꼼꼼하게 유언장을 작성하는 정성은 보였지만 어디에도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서울시장을 10년 넘게 한 박원순 같은 정치인이 본인이 죽었을 때의 파장을 생각못할리가 없습니다. 피해자는 가해자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되고, 본인의 죄는 그대로 묻히리라는 걸 예상못할 수가 없습니다. (박원순은 변호사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걸 한 겁니다.


일면 타당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건 대체 뭘까요? 뭐가 있을까요? 복잡하다는 데 뭐가 복잡할까요? 왜 오컴의 면도날은 이럴 때만 날이 뚝 부러지는 것입니까? 저는 한샘 성폭력 고발 사건과 같은 식의 음모론을 박원순의 자살에서도 이렇게 보고 싶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없는 정황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요? 본인들의 상상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을, 왜 자꾸 가치판단과 연결지어서 주장하는 것일까요? 박원순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없게 되면, 박원순에게 화를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기에 그런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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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두고 "죽음"과 "조롱"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저나 다른 사람들이 죽음을 조롱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누가 죽는 건 안된 일이죠. 지금 사람들은 죽음이 아니라, "박원순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박원순이 과연 성추행한 적 없이 갑자기 교통사고가 났거나 혼자 자살을 했다고 쳐봅시다. 일베나 디시 말고는 딱히 조롱할 사람이 없습니다. 저도 박원순의 죽음을 추모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추행하다가 자살한 박원순"이라면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살아 생전의 박원순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것이 죽음에 대한 조롱이 됩니다.


이분법이 나쁘고, 그 쪽이 아무리 박원순을 욕한들 어쩐들 상관안하고 나는 내 추모만 할련다는 그 입장은 박원순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죽음에 대한 조롱"이라는 편향적 수사로 단전에 이분법 세계의 반대편에 놓습니다. 본인이 볼 때 어떤 나쁜 쪽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조롱. 금기에 대한 비인간적 모욕이라는 이 프레임은 메갈리아가 등장했을 때 가장 많이 나왔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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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단락은 "민주당이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맥락 아래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분노 안하고 그냥 피해자만 염려하고 걱정할 수도 있지 않느냐, 이렇게 묻는 분들도 있겠죠. 분노가 빠진 불의는 어떤 식으로 해석되느냐. 그것은 자연재해가 됩니다. 구해야 할 사람만 있고 화를 내거나 책임져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불의가 불의가 아니게 됩니다. 그 순간 성추행도 없어지고 성추행을 저지른 박원순도 없어지고 성추행이라는 무슨 사고를 당한 피해자만 있게 됩니다. 이 시선에서 피해자를 구하고 보호해야한다는 의견은 어떻게 되냐하면, 불쌍한 사람을 돕는 시혜의식으로 변질됩니다.


<택시운전사>의 한계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전두환과 전두환에 대한 분노가 사라진 광주 민주화 운동은, 광주에 대한 동정과 추켜세우기가 됩니다. 그 결과 절대 정의가 아닌 구호행위가 됩니다. 박원순 성추행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민주당이 피해자를 어떻게 해야 하고 2차 가해를 막아야 한다고 말을 해도 가장 큰 불의의 핵심인 박원순을 향해서 화를 내지 못하면, 어떤 제도적 지원이나 응원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빠진, 봉사활동처럼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박원순을 나쁘다고 말을 하고 분노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제 1숙원입니다. 힘들고 아프고 불쌍하니까 피해자를 도와야하는가? 아니오. 피해자의 울분을 해소하기 위해서 가해자를 처단해야 하는 의식을 공유해야 합니다. 계속 박원순은 망자니 민주화 열사니 어쩌니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장 피해자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발화자 자체가 박원순을 망자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 집단의식이 훨씬 더 강한 민주당에서 뭐하러 박원순을 조사하겠습니까?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53363.html

제가 계속 지적하는 것들이 또 나옵니다. 성폭력 피해 여성이 없습니다. 성폭력 가해 남성의 가해 행위가 없습니다. 성폭력 가해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희연의 글에는 박원순을 향한 분노가 없습니다. 피해 여성을 그만 공격해달라는 호소는 있지만, 피해 여성의 입장에서 피해 여성의 울분을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조희연의 글이 10문단에 몽땅 다 축약되어있다고 해도(사실은 글 전체가 박원순을 추모하는 것에 열심이지만) 이 글은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겁니다. 박원순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나오질 않고 있잖아요? 당장 화자가 분노를 안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피해여성에 대한 2차 가해를 멈추겠습니까? 당장 조희연이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라는 박원순의 생전 태도를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박원순에 대한 추모와 애도가 계속 작동하는 한 피해자 여성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박원순에게 분노하지 않는 글은 죄다 알맹이가 빠진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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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중요한 감정입니다. 분노는 인간성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원초적인 반응입니다. 분노는 논리적인 반응이기 때문에 분노를 하지 않는 글은 뒤틀린 논리로 또 다른 2차 가해를 양산하게 됩니다. 박원순에게 분노하는 사람들은 박원순의 무책임한 자살에 분노합니다. 박원순의 자살 때문에 공격받는 피해자에 연대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박원순이 그랬으면 안됐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박원순에게 분노하지 않는 글은 어떤 것을 이야기합니까? 박원순이 자살안했으면 피해자는 더 고생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서 안희정처럼 버티며 법정공방을 벌였다면 그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2차 피해가 양산되었을거에요.

총량적인 비교를 하여 어느 것이 더욱 심각한 2차 가해를 만들어냈을지는 모를 일입니다. 쉽게 단정할 수 없어요."


당위명제가 갑자기 사실명제로 탈바꿈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피해자 여성에게 무엇이 가장 최악의 경우인지 박원순이 살았을 경우와 죽었을 경우를 대조하고 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박원순이 살아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경찰에 자수한 뒤 피해자에게 배상과 사회적 복구를 위한 노력하기"를 골랐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당위명제를 두고 따질 때, 박원순은 1. 살아서 자수하고 책임지기 2. 살아서 법정공방을 펼치기 3. 죽지만 유서에 자기의 죄를 시인하고 책임지기 4. 아무 말 없이 무책임하게 자살하기 대략 네 가지의 선택지 가운데 1을 골랐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당위명제는 분노가 있어야 끌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분노하지 않으니까 갑자기 상황은 2와 4의 양자택일이 되고 박원순의 자살은 피해자를 괴롭히는 나쁜 선택이 아니라, "그나마 피해자에게는 나았을 지 모르는 선택"이라는 일말의 도덕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왜 이런 이상한 논리적 오류가 일어날까요? "고인의 극단적인 선택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입니다. 박원순은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박원순의 자살이 불러온 현 선택보다 더 최악의 상황을 호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박원순의 다른 선택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이 양자택일에서 박원순은 그나마 정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하지 못하면, 이 간단한 논리적 함정에 스스로 빠져서 2차 가해를 하게 됩니다. 이 글을 피해자가 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박원순이 살아있었으면 내가 더 2차가해를 받았을테니까 박원순의 죽음에 그나마 감사하라는 이야기인가? 로 읽힙니다. 당위를 다루는 이 사건에서, 당위 명제의 흐름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이 글이, 이런 가치판단을 고려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에 대한 모든 판단은 결국 가차판단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망각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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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지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학생이나 직원은 이성으로 접근하고 건드리지 마, 그 학생이나 직원이 혹시라도 너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착각 하지 마

특히 니가 그 직원보다 나이도 ㅈㄴ 많고 유부남인데 니가 ㅈㄴ 멋지고 잘나서 그 직원이 너와 잠자리를 갖을거라는 착각 절대 하지마

그냥 그 학생이나 직원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니 앞에서 비위를 맞춰주고 있는거지 너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은 1이 아니라 0.00001도 없어

그것만 알고 살면 되, 그러면 안희정처럼 좆될 걱정 없을거야 그러니 (할 수 있다면) 걱정 말고 연애질 해 99"


"심선수가 지난해 동계올림픽 직전 자신이 당한 일반? 폭행을 폭로하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기 시작한지도 수개월 지나서,

최초 성폭행이 발생하고 5년이 지난 이제서야 폭로를 하게된 이유를

그 사정을 한남새X들이야 절대 이해 못할것입니다.

안희정의 위력에 의한 간음, 강제 성폭행이 법정에서 부정되버린 것이 한국사회의 수준이고 그 수준이 심석희 선수가 오랜 시간을

고통속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온것입니다. "


다른 이들에게 하듯이, 박원순에게도 분노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과거와도 부딪히게 됩니다.

박원순을 추모하고 싶은 사람들은 박원순에게 먼저 분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게 없으면 그 추모는 무조건 실패합니다. 필연적으로 2차 가해가 됩니다.

박원순에게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은 본인을 돌아봐야합니다. 피해자 여성의 입장에서, 그가 어떻게 느꼈을지. 그도 박원순을 똑같이 존경하고 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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