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2020.03.26 18:14

은밀한 생 조회 수:628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병원을 다녀왔어요.
항암치료 예후검사 진행 중인 남친의 대장내시경 보호자로 간 건데요.
수면 내시경은 보호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규칙이고 아주 드물게 보호자 없이 검사받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마저도 규모가 큰 병원에선 여의치가 않더라고요. 친구든 누구든 보호자가 와야 하는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있어요. 환자가 수면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내시경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한 후에, 낙상 방지라든가 그런 부분을 주의시키더군요. 이런저런 검사와 치료를 병행해온 남자친구 말로는 골수 체취가 제일 뭣 같다고....

암튼 와중에 내시경이 끝난 뒤 아주 잘 자는 남친을 보면서 있는데, 커튼 옆에서 한 모자가 대화를 나누는 게 또렷하게 들리더라고요. 사실 대화가 아니라 아드님 혼자 중얼중얼 한 거지만. 어머니가 도무지 잠에서 깨어나질 못하자 간호사들도 여러 번 다녀가고 “저희 퇴근할 때까지 주무실 것 같아요 ㅠ ㅠ 일어나셔야 하는데 ㅠ ㅠ"라면서 애원 섞인 압박을 하는 중이었거든요. 음 근데 그 아드님이 어머니를 깨우면서 하는 말들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엄마.. 많이 졸리시죠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소리가 들림)
“으응 으으.. 우어..” (어머니는 잠에 취해 계심)
“엄마.. 힘드시죠..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다시 토닥토닥 쓰다듬)

-5분후-
“엄마.. 많이 졸리시죠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소리가 들림)
“으응 으으.. 우어..” (어머니는 잠에 취해 계심)
“엄마.. 어젯밤에 늦게 잠드셨구나..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다시 토닥토닥 쓰다듬)

-5분후-
“엄마.. 에고...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소리가 들림)
“으응 으으.. 우어. 검사 몇 분 했어?” (어머니는 잠에 취해서 웅얼대다 희미하고 어눌한 발음으로 물어보심)
“엄마.. 5분쯤 했어요 .. 괜찮대요 엄마..” (아들이 어머니 등을 다시 토닥토닥 쓰다듬)

-다시 대략 5분후-
“엄마.. 많이 졸리시죠” (아들이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소리가 들림)
“으응 으으.. 우어. 검사 몇 분 했어?” (어머니는 잠에 취해서 웅얼대다 희미하고 어눌한 발음으로 아까와 같은 걸 물어보심)
“엄마.. 5분쯤 했어요 .. 괜찮대요 엄마..” (아들이 어머니 등을 다시 토닥토닥 쓰다듬)

정말 이 같은 대화가 시간차를 두고 계속 반복이 되더라고요. 다정하기도 하여라. 어지간하면 엄마 양팔을 잡고 “자 엄니 일어나십시다!!!! 여엉차!!” 할 만도 한데. “아 엄마 쫌 인나요!!!” 할 만도 한데. 아님 혼잣말이라도 “하... 언제 가지 ;;;” 할 법도 했고. 간호사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꽤 오래 잠들어 계신 것 같더군요. 아들이 계속 기다리면서 어머니 등을 쓰다듬고 토닥이며 고작 하는 말이라곤 “엄마 많이 졸리시죠 ㅠ ㅠ” 절대 짜증 1도 안 내고. 우리가 일어나서 이런저런 주의사항 듣고, 조직검사 결과 외래 예약까지 마치고 나오는 길에도 그 모자는 계속 그렇게 있는 중이었어요...

그 아들의 다정하고 안타까운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리네요. “엄마... 많이 졸리시죠..”
마음에 작은 촛불 하나가 켜진 기분이에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2020년 게시판 영화상 투표 [18] DJUNA 2020.12.13 126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87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13737
113092 평화의 소녀상 저작권 문제 [3] eltee 2020.05.29 779
113091 Richard Herd 1932-2020 R.I.P. 조성용 2020.05.29 182
113090 Anthony James 1942-2020 R.I.P. [1] 조성용 2020.05.29 174
113089 이런저런 일기...(망고빙수, 농사) [1] 안유미 2020.05.29 427
113088 '극장에서 다시, 봄' 영화 지원 사업- 6천원 티켓 (6/1부터) [1] 보들이 2020.05.29 454
113087 밀리터리 미드 추천받습니다 + 더 라스트 쉽 [4] 노리 2020.05.29 644
113086 이장 선거 결과 [9] 칼리토 2020.05.28 833
113085 진영 논리에 자유로운 인간 [6] 사팍 2020.05.28 1030
113084 Bigger than life + 질문 [7] mindystclaire 2020.05.28 375
113083 안녕하세요, 가입 인사 드립니다. [9] 76.19kg 2020.05.28 491
113082 [넷플릭스바낭] 본격 지쟈스(...) 재림 스릴러 '메시아'를 봤습니다 [20] 로이배티 2020.05.28 942
113081 정의연 사태를 보고 느끼는 분노 [14] 메피스토 2020.05.28 1586
113080 듀나님의 새 책이 나왔네요. [7] 둥가둥가 2020.05.28 828
113079 이런저런 일기...(던파, 고기, 망고빙수, 아이랜드, 장기판) [1] 안유미 2020.05.28 340
113078 요즘 게시판 하단에 뜨는 옛날 글들을 보며 듀게가 생각보다 PC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5] woxn3 2020.05.27 1337
113077 애들을 보며 [1] 가끔영화 2020.05.27 239
113076 언더워터(크리스틴 스튜어트)-강스포일러 [2] 메피스토 2020.05.27 667
113075 안성 쉼터 매수 가격 관련 [12] 왜냐하면 2020.05.27 894
113074 나만 알고 있었으면 하는 것 [6] 예상수 2020.05.27 835
113073 나랏돈 투입됐다, 정의연 모든 의혹 신속 규명하라 [3] 사팍 2020.05.27 59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