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예술?, 예술!

2019.03.30 10:24

어디로갈까 조회 수:834

1. "예술가들은 오히려 단순한 사람들입니다."라고 미팅이 끝날 무렵 P 씨가 웃으며 말했어요. 저보다 10 년쯤 위인 그는 시인이자 독립영화 감독이자 광고 감독이기도 합니다.
나누던 대화의 맥락에서 자연스레 나올 법한 말이었고, 그런만큼 좌석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죠. 예술가가 아닌 저로서도 ' 어, 그런가요?'라는 식의 미소만 지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겠어요. 단순해 보이는 유형의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예술가든 아니든, 세상에는 단순한 사람들과 단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예술을 하기 때문에 단순하거나 단순하지 않은,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생활과 동떨어져서 예술만 하느라 단순해 보이는 예술가가 있더라도, 그의 그런 면모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의 소산일 뿐인 거죠. 이런 생각은 듭니다. 창작의 어느 국면에서는 단순성을 통과하거나, 단순함에 도달할 때가 있으리라는 것.
분명히 모든 예술 속에는 일면 단순성이 있고, 또 있어야 할 거에요.  삶에 비하면 예술이란, 욕망의 뿌리들을 다듬고 제한하여 추상화한 유희인 것이니까요.

2. 저에게 예술가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 지불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예술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지불해서 예술을 얻는 존재라는 느낌이 있어요.
좋은 작품들을 볼 때면, 과연 그는 뭘 지불했기에 이토록 기묘한 아름다움과 통찰로 빛날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세상의 모든 결과물이 그렇듯, 예술에도 우연이나 횡재는 없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예술가를 향한  터무니없는 선망은 갖지 않게 됐습니다. 지불하지 않으면 예술도 없습니다. 창작은 대상 없이도 상응해야 하는 작업이므로.

3. 예술을 하기 때문에 그가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더욱 잘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예술은 당자에게도, 감상자에게도 좋을 게 없는 거죠. 하지만 자기노출의 느낌은 그 자신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으니까 그는 몸을 상하게 하는 취미나 습관에 중독된 것처럼 자꾸 뭔가를 발굴해냅니다. '아무리 애써도 나는 나아질 수 없는 인간이다.'라는 사실을 부연하는 소소한 증거들을. - -;
그러나 예술에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 예술가는 변화 - 라기 보다 진화 - 할 수도 있을 거에요. 그럴 겁니다.

4. 그나저나 우리 할아버지는 왜 어린 제게 이런 말씀을 또박또박 남기셔서 저를 이렇게 헤매게 만드신 걸까요.
"예쁜 척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면 예술이 된단다. 예쁜 척하지 않고 무릎 꿇고 입술을 깨물면 예술이 된단다. 살아보니 가장 안쓰러운 건 예쁘지 않은데 예쁜 척하는 예술들이었다."

5. 저는 생활의 단순함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그러나 좁은 것에는 진력이 납니다. 광활한 넓이 앞에 서고 싶고, 그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싶어요. 거대한 공간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제게 주어진/허락된 세상을 넓게 걸어다니고 싶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새벽에 근린공원에 나가 한 시간쯤 걸었습니다. 입구에 서서 어둠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숲을 건너다 보노라니, 두려울 만큼 쓸쓸한 느낌이 엄습하더군요. 이른 시간의 어둠 속인데도 하늘에 모형비행기가 날고 있었어요.
아직 냉기가 머물고 있는 봄밤, 공원에 나와 모형비행기를 날리고 있는 모르는 사람을 향해 친밀감이 솟았습니다. 그도 나처럼 소명없는 삶에 대한 미열이 있는 건가, 하는 맥락없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어요.
휴일 새벽 공원에서, 각성이 필요한 그와 나는 한 우주가 저무는 소리를 같이 듣고 있던 사람들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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